[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㊲달빛 쏟아지는 들판 길을 달리던 아이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㊲달빛 쏟아지는 들판 길을 달리던 아이
  • 정재용 (엘레오스) 기자
  • 승인 2020.11.24 1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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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다깨이 사용료는 가마니 당 벼 1되
찬송가는 곡조 있는 기도

1971년은 윤달이 있는 해였다. 윤오월이었다. 6월 22일 하짓날 음력 5월 30일이 끝나고 이튿날부터 다시 윤5월이 시작되면서 양력과 간격은 약 1개월 반으로 벌어졌다. 농사일은 양력에 맞춰진 24절기에 따라 짓기 때문에 윤달이야 끼든 안 끼든 상관이 없었다. 음력으로 해 먹는 생일이나 설, 추석 명절이 영향을 받을 뿐이었다.

그해 학봉댁 벼 타작은 탈곡기 차례가 늦어져서 12월 2일 목요일, 음력 10월 보름에야 할 수 있었다. 타작을 하려면 그 전날까지 소달구지로 무댕기 단을 마당으로 실어들이고, 놉을 해서 깻단을 타서, 탈곡기 놓을 자리 곁에 차곡차곡 쌓아 놓아야 했다.

옛날에는 발로 밟는 탈곡기 일색이었으나 새마을사업이 활성화되면서 농기계가 널리 보급됐다. 리어카가 지게를 대신하고 경운기는 농촌의 모습은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특히 경운기는 소가 하던 쟁기질과 소달구지 역할을 하고 원동기를 이용하여 농약을 칠 때도 사용됐다. 그러나 활용도가 높은 만큼 값도 비싸고, 가뜩이나 좁은 농로에 운전하기가 어려워서 있는 집이 몇 안 됐다. 탈곡기도 그 중의 하나였다.

벼 타작을 할 때면 경유를 연료로 해서 돌아가는 탈곡기의 원동기 폭발음이 “탁탁, 탁탁”온 마을에 울려 퍼졌다. 그래서 자동식 탈곡기를 모두가 ‘탁다깨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깻단을 타서 먹이는 반자동 탈곡기가 나오다가 얼마 안 돼서 무댕기 단을 펼쳐서 얹어주면 알아서 삼키는 전자동 탈곡기로 발전했다.

깻단을 타려면 무댕기 단을 집으로 실어 들여야 했기에 자연히 집 타작이 됐다. 타작 한번 하고나면 집안 전체는 먼지투성이였다. 자기 집은 물론이고 이웃집까지 장독과 부엌의 솥과 살림을 새로 닦아야했고, 계속되는 소음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피해를 줄이려고 좀 춥더라도 깻단을 논에서 타다가 전자동 탈곡기가 나오면서부터는 타작하면 으레 논 타작이었다.

탁다깨이 사용료는 가마니 당 벼 1되였다. 1가마니에 6~7말 들어가고 1말은 4되였으니, 24~28되 당 1되를 준 셈이다. 한 나절에 3~4블록을 타작했다. 한 블록은 서 마지기로 600평이다. 보통 1마지기에 벼 10~12가마니가 나왔다. 지게 작대기로 많이 쑤셔 넣을수록 가마니 수가 줄어드니 주인은 종일 가마니 쑤시는 게 일이었다.

타작 때가 되면 경주시(당시는 월성군이었다) 산내면 감산리 사는 김 씨가 트럭에 탈곡기를 싣고 나타났다. 트럭 운전수는 되돌아가고, 그는 타작하는 한 달 여 동안 곤동댁 사랑채에 머물렀다. 곤동어른과 8촌간이라고 했다.

날이 추워지면서 기러기나 청둥오리가 달려들어 바가리에 앉아 나락을 훑어 먹고 쥐는 논둑에 파 놓은 구멍으로 이삭을 물어다 나르기에 바빴다. 타작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손해여서 곤동댁 사랑채는 예약하려는 사람들로 날마다 붐볐다. 몇 년 후에는 안강 사람, 신방골 사람 탈곡기가 들어오고, 김석봉 씨를 비롯한 14명으로 구성된 마을청년회에서도 탈곡기를 구입했다.

안강-기계 도로에서 소평마을로 들어가는 길, 마을은 들 복판에 있어서 밤이면 무인지경이었다. 정재용 기자
안강-기계 도로에서 소평마을로 들어가는 길, 바깥공굴은 철둑 가까이(사진의 오른쪽 먼 곳에 위치) 있었다. 마을은 들 복판 이어서 어느 길로 가든지 밤이면 무인지경이었다. 정재용 기자

학봉댁 타작은 막바지여서 탈곡기도 사람도 지쳐있었다. 한 나절이 끝날 무렵 갑자기 탈곡기가 멈춰버렸다. 베어링이 파손된 것이었다. 건조가 덜 된 벼를 타작하면 볏단이 원통에 휘감기거나 볏단의 무게 때문에 그럴 수 있는데, 이번에는 건조 문제는 아니고 쉴 새 없이 운전하다보니 닳아서 생긴 것이었다. 그나마 피스톤 고장이 아닌 게 다행이라고 했다. 윤활유가 부족하여 피스톤이 망가지면 아예 중단하고 며칠 간 수리에 들어가야 된다고 했다. 김 씨는 점심을 먹는 대로 경주에 가서 베어링을 사 오겠다고 했다.

점심을 다 먹어 갈 때였다. 수업을 일찍 마쳤다며 북부학교 5학년에 다니는 둘째 딸이 마당에 들어섰다. 김 씨가 말했다.

“잘 됐네요. 어차피 오늘 오후 타작은 글렀고, 저 애와 같이 경주 나갔다가 베어링 사서 버스 태워 보낼게요. 그리고 나는 경주 간 김에 산내 집에 들렀다가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첫차로 들어올게요.”

거의 한 달 간 집에 못 가봤다는 하소연에 학봉어른은 그러라고 했다. 대신 “버스터미널에서 애가 버스에 올라타고 자리에 앉는 것까지 보고 나서 가기를” 신신당부 했다. 김 씨는 그건 당연한 것 아니냐는 투로 말하며 “지금 나서면 해 지기 전에 집에 들어 올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 했다. 아이는 김 씨를 따라 경주로 갔다. 안강 읍내에도 자주 안 나가던 터에 경주라니 덜컥 겁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경주에 도착한 김 씨는 아이를 버스터미널 의자에 앉혀 놓고 베어링 사러 나갔다. 그때부터 아이의 기다림이 시작됐다. 곧 돌아오겠다던 김 씨는 해가 서산을 넘어가는 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는 바깥에 나가 서서 기다렸다. 그러다가 추워서 다시 대합실로 들어왔다. 부모님이 애타게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안타깝기 그지없었으나 전화가 없던 때라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렸으나 끝내 김 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맞은 편 의자에 앉아서 지켜보던 할머니가 누구를 기다리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배고프겠다며 삶은 옥수수를 건넸다.

심부름 보낸 집에서는 집에서 대로 아이가 돌아올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안 돌아오자 모든 식구가 안절부절 못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차례대로 마을 앞길로 나가서 아스라이 먼 들판을 바라보는 게 일이었다. 날이 어둑해지면서 불안감이 밀려오고 걱정은 분노로 변해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천하에 쳐 죽일 놈, 어디 쳐 박혀 술 쳐 먹고 안 자빠져 있으면 애가 왜 아직 안 돌아올까, 온 식구들 눈이 빠지게 기다리게 하고, 안 딸려 보내는 게 맞는데 공연히 봐 줬더니…”

나오느니 한숨뿐이었다. 안강정류소로 가서 기다리고 싶었으나 길이 어긋날까봐 섣불리 나설 수도 없었다. 저녁도 굶었다.

김 씨가 다시 나타난 것은 안강 가는 막차가 출발할 무렵이었다. 아이는 배도 고프고 기다리기에 지쳐서 파김치가 돼 있었다. 안강정류소에 내려서는 다시 혼자서 밤길 2km를 걸어야했다. 다행히 보름달이 하늘 높이 떠서 들판 복판에 오도카니 엎드려 있는 집을 찾아가는 아이의 앞길을 환하게 비춰줬다. 아이는 종종걸음을 걷다가 바깥공굴부터는 뛰기 시작했다. 다리 밑에서 사람이 뛰쳐나와 “거기 안 서면 죽이겠다”고 고함을 치면서 따라오고 슈베르트 가곡의 마왕이 나타나서 뒷덜미를 낚아챌 것 같아 죽으라고 달렸다. 아이는 학교에서 육상선수로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이때를 위한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오니 내게 두려움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땅에 살아도 진리 안에서 이기고 이기게 항상 능력 주시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찬송가를 속으로 부르며 달렸다. 곡조 있는 기도였다. 무사히 집으로 갈 수 있도록 눈물로 호소하는 간절한 기도, 애타는 부르짖음이었다.

앞공굴을 서너 도가리 앞두고 아이의 어머니와 아이는 서로를 동시에 알아봤다. “재화냐?” “엄마!”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메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녀는 마주 달려가서 부둥켜안고 눈물을 삼켰다. 억울하고 분했다. 침을 흘린 건지 토사물인지 아이의 웃옷 앞섶은 달빛에 허옇게 번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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