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근대골목] 대구 달성공원의 기념비들(1)
[대구근대골목] 대구 달성공원의 기념비들(1)
  • 안영선 기자
  • 승인 2020.11.21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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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공원(중구 달성동)에는 기념비가 모두 9점(동상1, 헌장비1, 유허비1, 시비1, 기념비2, 예술비2 기타1)이 있다. 이 중 어린이 헌장비, 이상화 시비, 곽재우 동상, 달성서씨 유허비  4점을 우선 소개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어린이 헌장비

◆어린이 헌장비

1922년 5월 1일로 제정됐던 어린이날은 1946년부터 5월 5일로 날짜를 바꿔 새로 정했다. 1957년 어린이날에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이 선포됐고, 1958년 제36회 어린이 날에 대구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어린이 헌장비를 달성공원 입구에 세웠다. 어린이 헌장 초안을 만든 아동문학가 마해송이 제안했고, 당시 제2군 사령관이던 최영희 장군이 일을 맡았고 대구아동문학회와 언론계가 도왔다. 입구에 세워졌던 어린이 헌장비는 허물어져 1970년 5월 5일 당시 김학수 대구시장이 지금의 서침나무(회나무) 옆에 세워 현재의 모습으로 서 있다. 

한국 최초의 문학비, 이상화 시비

◆이상화 시비

대구 출신의 애국시인 이상화의 시비는 달성공원 말터의 높은 곳 코끼리 사육사를 지나 서 있다. 이상화는 1901년 4월 5일 대구에서 이시우 선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943년 3월 21일 4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47년 수필가 김소운이 '죽순'의 주간이며 편집자인 이윤수를 찾아가 시비 건립을 제안했고, 박목월, 김달진, 이호우, 이영도, 김동사, 오란숙 등 죽순 동인들의 찬성으로 1948년 정월에 건립되었다.

'상화시비' 위쪽의 한자는 죽농 서동균이 썼으며, 본문은 막내 아들 태희의 글씨이다. 시비의 뒷글은 김소운이 짓고 민족운동가 33인 중 1인인 위창 오세창이 썼다. 시비를 제막하던 날 소복을 한 상화의 옛 연인 송옥경이 먼 곳에서 눈물 짓고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동학 교주 최제우 동상

◆동학 교주 최제우 동상

수운 최제우는 경천사상을 바탕으로 유불선과 도참사상 등의 민중사상을 융합해 동학을 창시하고 '용담가' '안심가' 등의 한글 가사를 지어 포교 활동을 했다. 동학의 교세가 빠르게 확장되자 조정의 주목을 받다 1863년 11월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 죄'로 경주 용담정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철종의 국상이 발생하여 1864년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3월에 41세에 참형되었다.

1907년 순종황제에 의해 사면되었고 1964년 3월 11일 최제우 순교 100주년 기념 동상건립위원회가 지금의 자리에 동상을 세웠다. 대구 종로 초등학교에 최제우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에 바친 졸시가 있다. 종로초등학교에 있는/ 사백 년 된 회나무/ 수운 최제우나무// 최제우의 처형 명령에/ 잎사귀들이 몸을 짜/ 수액을 떨어뜨렸다// 나무가 울었다/ 하늘도 울었다/ 옥졸들도 따라 울었다/ 보는 사람 모두 따라 울었다// 인근의 나무들도/ 같이 흔들렸다니/ 사람보다 나은 나무//

달성 서씨 유허비

◆달성 서씨 유허비 

달성공원 터는 지방 호족인 달성 서씨 세거지였는데, 달성 터를 조선 세종 때 군사시설로 조건없이 조정에 양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돌은 정읍에서 가져오고 비석의 글은 시조시인 이은상이 지었으며 죽농 서동균이 글을 썼다. 유허비는 달성공원에 있지만 유허비각은 산격동 연암공원의 구암서원 숭현사 옆에 있다. 달성 서씨 유허비는 1971년 3월 22일 달성서씨대종회에서 건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