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부석사 창건 설화에 담긴 선묘낭자 이야기(1)
영주 부석사 창건 설화에 담긴 선묘낭자 이야기(1)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0.11.11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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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8호인 부석사 무량수전은 얼마 전까지 현존하는 가장 오랜 된 목조건물로 알려졌었다.
배흘림기둥은 원통형기둥에서 보이는 시각적인 불안감을 일거에 없앤 건축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부처님을 졸라 여승이 되겠다고 조르다가 머리를 깎은 여인 숫까가 오히려 부럽다.
건물도 사람도 하나다. 이원선 기자
건물도 사람도 하나다. 이원선 기자

가을은 진정 가을인가 보다. 에머랄드빛 하늘을 머리에 이고 매표소를 지나자 줄지어 선 은행나무가 노랗게 맞는다. 성급한 이파리들은 벌써 바닥으로 내려앉아 자연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친 듯 천연덕스럽게 누웠다. 무량수전을 가려면 오르막과 계단의 연속이다. 쉽게 오르려거든 속세의 크고 작은 짐은 모두 내려놓으란다. 어쩌면 마음의 짐까지 비워 홀가분하게 오르라 속삭이는 듯하다. 밥을 먹으면 놀이공원에 데리고 간다며 내 아이에게 귓속말을 전할 때처럼 달콤하고도 은근하게 말이다.

영주 봉황산 중턱에 있는 소백산(小白山) 부석사(浮石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676년(문무왕 16) 2월 의상(義湘)이 왕명으로 창건한 뒤 화엄종(華嚴宗)의 중심 사찰로 삼았다. 2018년 6월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국보 제18호인 부석사 무량수전과 국보 제19호인 부석사 조사당(浮石寺 祖師堂)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인 범종루(梵鐘樓), 원각전(圓覺殿), 안양루(安養樓), 선묘각(善妙閣), 응진전(應眞殿), 자인당(慈忍堂), 좌우요사(左右寮舍), 취현암(醉玄庵), 성보전시관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17호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과 국보 제45호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국보 제46호인 영주 부석사 조사당벽화, 보물 제249호인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보물 제255호인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 보물 제735호인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인 영주 부석사 원융국사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국보 제18호인 부석사 무량수전은 얼마 전까지 현존하는 가장 오랜 된 목조건물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안동 봉정사 극락전(安東 鳳停寺 極樂殿 국보 제15호)이 이보다 약 30여년 앞선다는 학계의 발표로 인해 2위로 밀려난 상태다. 설령 그렇더라도 건축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든가 건축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꼭 한 번씩 찾는 건물이기도 하다.

이는 무량수전이 지닌 건축양식 중 배흘림기둥(목조건축의 기둥을 중간 정도가 직경이 크고 위 아래로 갈수록 직경을 점차 줄여 만든 기둥), 주심포(고려 시대의 건축 양식. 지붕의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기둥 위에 짜임새(=공포)를 만듦. 이 짜임새를 기둥 위에만 만든 건축 양식을 주심포라고 한다.), 팔작지붕(한국 목조 기와지붕 중에서 우진각지붕과 같이 사방으로 지붕면이 있으나 양측 지붕면 위에 삼각형의 합각(合閣)이 있어서, 우진각지붕 상부를 수평으로 잘라 그 위에 맞배지붕을 올려놓은 것 같은 복합형 지붕형식)등이 한국의 대표적인 한옥양식이고 보니 이를 보고 습득코자 함이다. 특히 배흘림기둥은 원통형기둥에서 보이는 시각적인 불안감을 일거에 없앤 건축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가을을 맞아 일주문을 가는 길에 은행나무가 노랗다. 이원선 기자
가을을 맞아 일주문 가는 길 은행나무가 노랗다. 이원선 기자

이와 관련하여 국보로 지정된 불교계의 유사한 전각으로는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康津 無爲寺 極樂寶殿 국보 제13호), 안동 봉정사 극락전(安東 鳳停寺 極樂殿 국보 제15호), 예산 수덕사 대웅전(禮山 修德寺 大雄殿 국보 제49호)이 있다.

부석사가 유명한 것은 무량수전 뒤편의 거대한 돌이 공중부양처럼 뜨고 많은 국보와 보물, 각종 문화재를 보유하고 나아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점도 있지만 전해오는 설화나 기이한 스토리를 간직한 사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석사 선비화는 의상대사가 사용했던 지팡이를 꽂아 놓았더니 살아난 것이라 하는데,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죽을 때 “내가 여기를 떠난 뒤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으리라”하였다. 하지만 단연 압권은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에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삼국유사((三國遺事)등에 따르면 부석사의 창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의상대사는 왕족 출신으로 출가 전 속가의 이름은 ‘김일지’다. 혼기가 찬 ‘김일지’는 몰락한 가문의 묘화라는 낭자와 혼인을 약속한 사이었다. 둘은 서로 깊이 사랑하였고 당연히 부부지연으로 맺어지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호사다마랄까? 이 둘 사이에 상대등(신라 최고의 관직, 현재의 국무총리)이 끼어들면서 둘의 꿈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당시 상대등은 장군의 직책으로 전쟁터에서 연전연승, 장래가 촉망되는 김일지를 사윗감으로 점찍었던 것이다. 그러자 묘화낭자가 눈엣가시처럼 보였다. 상대등은 궁리 끝에 그녀를 제거하기로 결심을 굳힌다. 낌새를 눈치 챈 묘화낭자는 극적으로 탈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당나라로 간다. 소식을 전해들은 김일지는 이전투구, 속세에 대해 허무함을 느껴 곧장 머리를 깎고는 출가를 하니 후일의 의상대사다.

당시의 승려들은 당나라 유학을 최고로 꼽았다. 현재의 미국이나 일본 등지의 최고의 대학을 찾듯이 말이다. 이에 6두품(신라시대 골품제도 17등급 중 하나로 아찬(현재의 차관)의 벼슬까지 올라갈 수 있다.)인 원효대사를 만난 의상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다. 첫 번째 유학길에서 두 사람은 백제 군사에게 사로잡혀 첩자로 오인받는 등 갖은 고초를 치른 끝에 겨우 풀려난다. 이에 굴하지 않고 둘은 두 번째 유학길에 오른다. 두 사람이 길을 가는 도중 당항성(현재 경기도 화성 부근)의 고총(오래된 무덤으로 석실을 만든 뒤 관을 놓아 둔 것으로 추정됨)안에서 소나기를 피하고 밤을 보내는 동안 원효는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다.

부처님이 마지막 단계에서 마라(불교계에서 말하는 악신)와 싸우듯 득도를 방해하는 온갖 나찰들의 등쌀에 밤새 시달린 원효대사는 심한 갈증을 참지 못해서 어둠 속에서 손에 잡히는대로 물을 찾아서 마신 것이다. 한 대접을 단숨에 비워 벌컥벌컥 마실 때는 감로주처럼 달콤했고 초가을을 맞아 새벽녘을 쓸어가는 바람처럼 시원했다. 하지만 날이 밝아 그 실체가 해골에 고인 빗물임을 알고는 격하게 욕지기가 이는 등 비위를 참을 수가 없어 온통 속을 게워낸다. 분명 어제 밤에는 목숨을 살린 생명수 같았던 물로 그 실체는 지금도 변함이 없건만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그 본질이 확연하게 달라 독약처럼 쓰다. 왜 그럴까? 한참의 몸부림 끝에 마음속으로부터 뭉게구름처럼 의문이 일자 결과부좌를 튼다. 원효대사는 “왜?”라는 화두를 잡고는 선정에 든 결과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한다는 즉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임을 뜻하는 불교용어)의 진리라는 깨달음을 얻고는 유학을 포기하고는 서라벌로 발걸음을 돌린다.

서산을 너머가는 태양빛은 받는 부석사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이원선 기자
서산을 너머가는 태양빛은 받은 부석사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이원선 기자

원효가 떠난 후 홀로 남은 의상대사는 이미 작정한대로 당나라로 향했고 마침내 도착한 어느 하숙집에서 선묘(과거의 약혼녀 묘화낭자)낭자와 극적인 재회를 한다. 하지만 의상대사는 이미 속세를 떠나 출가한 상태다. 미련과 아쉬움, 애틋함, 안타까움, 서러움 등등이 한꺼번에 몰려들었지만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내세에서는 알 수 없겠지만 현생에 있어서 부부지연은 가당치가 않다. 선묘낭자 또한 더 이상 조를 수도 매달릴 수도 없었다. 마음을 다잡은 선묘낭자는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의 공부와 교화와 불사(佛事)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어드리겠다”며 소망할 뿐이었다. 하지만 옛날에 품었던 사모의 정은 여전하여 의상대사의 공부를 조용히 지켜보며 일구월심 정화수를 떠 놓고 비는 지극정성의 심정으로 축원할 뿐이었다. 의상대사 또한 속세를 떠난 몸, 마음을 비운 뒤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지엄(智儼)을 찾아가서 화엄학을 공부한다. 그러던 중 의상의 유학생활이 끝나 모국 신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나 다시 만날까? 부부지연이야 이룰 수 없지만 늘 마음속에 품은 사람이다. 멀게만 느껴지던 날짜가 코 앞으로 다가들자 선묘낭자는 이별이란 단어 앞에 알절부절 못한다. 부처님을 졸라 여승이 되겠다고 조르다가 머리를 깎은 여인 숫까가 오히려 부럽다.

마침내 헤어지는 날이 왔다. 이별의 당일 선묘낭자는 작별의 선물을 마련코자 새벽시장으로 나갔다. 일찍이 이별은 필연적이다 여겨 점찍어 둔 선물이 오늘따라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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