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정구(鄭逑)선생의 무흘구곡(武屹九曲)
한강 정구(鄭逑)선생의 무흘구곡(武屹九曲)
  • 장희자 기자
  • 승인 2020.10.3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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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봉우리 지는 달 차가운 시냇가에 어리는데

나 홀로 앉아 있노라니 밤기운 싸늘하네

벗들을 사양하노니 찾아올 생각말게

어지러운 구름 쌓인 눈에 오솔길 묻혔나니(무흘정사 정구)

한강 정구선생은 62세 때 무흘구곡(武屹九曲)중 하나인 만월담 인근에 무흘정사(武屹精舍)를 짓고   시를 지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구곡(九曲)은 산림(山林)을 굽이굽이 흐르는 물줄기 가운데 경치가 아름답거나 깊은 뜻이 담긴 아홉 굽이를 의미한다. 주자를 존숭한 조선의 유학자들은 주자가 은거해 학문을 닦은 무이구곡을 학문적 이상향으로 동경했다. 이러한 조선의 유학자들은 자신이 은거한 산림에도 구곡을 경영하기 시작했고, 이후로 구곡문화는  더욱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구곡은 조선의 퇴계와 율곡선생을 비롯한 여러 성리학자들에게로 이어져 널리 향유되었으며, 특히 산천경승(山川景勝)이 빼어나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배출해 온 영남지역에서 성행했다. 전국에는 150여개의 구곡이 있으며, 경북에는 43여개의 구곡이 있다. 구곡을 거닐다보면 조선의 유학자들이 남긴  산림문화 유산을 만나게 된다. 더불어 피톤치드와 음이온 등 짙은 산림이 주는 천혜의 혜택을 자연스레 누리며  심신도 치유할 수 있다.
가을이 깊어가는 제9곡 용추(龍湫)는 샘물처럼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학문적 성찰과 도학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한다. 장희자 기자

무흘구곡(武屹九曲)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선생이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의 성주댐 아래쪽의 대가천에 자리한 제1곡 봉비암(鳳飛巖)에서부터 성주댐을 거쳐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의 수도암 아래쪽 계곡에 자리한 제9곡 용소폭포까지 약 35㎞ 구간의 맑은 물과 기암괴석 등의 절경을 읊은 시이다. 성주군에 1~5곡이 있고, 김천시 증산면에 6~9곡이 있다.

정구선생이 대가천 계곡의 아름다움에 반해 중국 남송 때의 유학자인 주희(朱憙)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받아 대가천을 오르내리며 경관이 뛰어난 곳을 골라 이름 짓고 7언 절구의 시를 지어 그 절경을 노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무흘구곡의 아홉 굽이를 한시로 표현하여 총 9수로 구성되어 있는 구곡의 경관을 노래한 절경지와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곡 봉비암」 대가천이 양정교 근처에 이르러 바위 언덕을 만나 잠시 멈추는 곳.    

첫째 굽이라 여울가 낚시 배가 두둥실/ 석양빛 강물 위에 낚시줄이 얼기설기/ 자질구레 인간 잡념 까마득히 잊고서/ 내 안개 속에 노질함을 그 누가 안단 말고

「제2곡 한강대」 봉비암에서 대가천 물길 1.5km 거슬러 오른 물가에 솟은 20~30m 높이 암벽.

둘째 굽이라 미녀가 봉우리로 화하여/ 봄꽃으로 가을 단풍 단장을 고이 하니/ 저 옛날 초나라의 굴원이 알았다면/ 한 편의 이소경을 또 지어 보탰으리

「제3곡 무학정」 한강대에서 대가천을 따라 12.5km를 거슬러 올라 배바위 위에 앉은 정자.

삼곡이라 이 골짝 누가 배를 감췄던가/ 천년토록 야밤에 지고 간 이 없었거니/ 건너야 할 큰 강이 그 아니 많을까만/ 건너갈 방도 없이 가련할 뿐이어라.

「제4곡 입암」 무학정에서 4km 정도 오르면 냇가 건너에 우뚝솟은 바위로 선바위라고도 함.

넷째 굽이라 백 척 바위에 구름 걷히니/ 바위 위 화초 보소 바람결에 하늘하늘/ 이 가운데 싱그럽기 이 같음을 뉘 알꼬/ 저 하늘 달그림자 못 속에 떨어졌네.

선바위라 불리는 제4곡 입암(立巖)으로, 한강 정구선생은 이 굽이를 최치원의 흔적이 남은 가야산 홍류동보다 빼어나다고 했다. 장희자 기자

「제5곡 사인암」 입암에서 3.8km 상류의 은적1교 다리 주변 맑은 옥류와 깎아지른 기암괴석

다섯 굽이라 맑은 못 그 얼마나 깊은고/ 못가의 솔이며 대 절로 숲을 이루었네/ 복건 차림 은자가 높은 당에 앉아서/ 인심이요 도심을 도란도란 얘기하네

「제6곡 옥류동」 수도계곡의 옥동천이 백천교 부근에 이르러 대가천 본류와  합류하는 지점

여섯 굽이라 초가집 여울 가에 놓였으니/ 어지러운 세상사 가리운게 몇 겹인고/ 여기 살던 은자여 그 어디로 떠나갔나/ 풍월만 남아 있어 만고토록 한가롭네.

「제7곡 만월담」 백천교를 지나 수도계곡 초입 옥동천 계곡안에 있는 집채만한 바위군락 

일곱 굽이라 높은 봉 여울물 감아도니/ 이런 풍광 일찍이 구경을 못했어라/ 장난꾸러기 산신령 조는 학을 깨워볼까/ 솔 이슬 까닭 없이 학 뺨에 떨어지네

「제8곡 와룡암」 만월담에서 1.4㎞ 상류 새하얀 너럭바위지대와 병풍 같은 암벽이 높게 솟은곳

여덟 굽이라 오르니 시야 한층 트이는데/ 멀리 갈 듯 흐르는 물 다시금 돌아든다/ 안개구름 꽃과 새들 저마다 낙을 누려/ 노는 사람 오든 말든 나 몰라라 하누나

「제9곡 용추」 와룡암에서 2km 정도 상류  계곡의  협곡지점에 있는 높이 17m의 폭포수,

아홉 굽이라 고개를 돌리고서 한탄한다/ 이내 마음 산천을 좋아한 게 아니거니/ 샘물 근원 이곳에 형언 못할 묘리 있어/ 여기 이걸 놓아두고 다른 세계 찾을쏘냐

정구선생은 수도산의 계류인 대가천 계곡에 주자의 구곡 경영을 차운하여 자신만의 구곡을 설정했다. 주목할 것은 9수의 시를 통해 구곡의 각 굽이에 주제를 부여하고 관념적으로 상징화함으로써, 1곡에서 9곡에 이르는 과정이 단지 아름다운 경관을 쫓아온 것이 아니라 도학의 근원을 찾기 위한 일종의 실천 과정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바위의 형상이 용이 누워 있는 형상과 같다는 제 8곡 와룡암에도 가을이 물들어 가고 있다. 장희자 기자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산수에 은거하여 아담한 정원을 꾸미거나, 산과 바위 혹은 시내의 물굽이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자신의 사상과 연결된 주위의 생활 세계를 창조하였는데, 이러한 사상은 구곡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구곡은 단순한 물의 굽이침의 차원을 넘어서 주자의 도학적 이상을 배우고자 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유행된 바 있는데, 당시 주자는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 절대적인 이상이었으며 흠모의 대상이었다.

특히 주자가 만년에 은거하며 강학하던 무이산의 절경은 아름다움을 넘어선 철학의 담론을 펼칠 수 있는 정신적인 이상향으로서의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 산수를 경영하여 정사를 짓고, 무이 산지를 탐독하며, 구곡을 경영하는 것은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자연을 완상하는 도학적 이상향의 해법으로 이해되었다. 심지어 서실에 ‘구곡도’를 걸어 놓고, ‘구곡시’와 ‘구곡가’를 차운하여 읊는 것은 무이산에 실제 가보지 못한 한탄과 동경의 실천적 방도로써 널리 유행했다

또한 구곡의 경영에 있어서도 유교·불교·도교 등의 종교적 교리나 사상을 반영하여 관념적 실체로 명명(命名)하였는데, 각 곡을 도학적 이상을 실현시키는 수신의 과정으로 생각하였으며, 얻으면 경세제민(經世濟民)하겠다는 그 당시 사대부들의 정치·사회적인 맥락으로도 이해됐다.

이처럼 정구선생의 「무흘구곡」은 조선 시대 선비들의 구곡 경영과 그를 통한 철학적·종교적 사상 및 실천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적(史的)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옥동천이 대가천과 합류하는 제6곡 옥류동계곡과 옥류정(玉流亭)정자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낸다. 장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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