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세 An Old Lady
69세 An Old Lady
  • 김채영 기자
  • 승인 2022.02.25 17:00
  •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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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아
괜찮다는 말은 괜찮지 않다는 말

 

자주 가던 영화관이 문을 닫게 돼 아쉽다던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코로나의 장기화로 힘들지 않은 업종이 없다는데 극장인들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밥을 벌어야하는 입장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매스미디어시대의 순기능이라고 할까. 영화 애호가들은 집에서라도 해소할 방법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지난여름부터 안방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 한국영화든 외화든 그리고 스릴러물이든 멜로든 국가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문화생활의 기근을 면하기 충분하다.

“69세 An Old Lady”​ 우리 영화다. 임선애 감독 예수정 배우 주연의 노인 성폭력 문제를 다룬 것이다. 69세의 효정은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다가 젊은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치욕적인 일을 당한다. 긴 고민 끝에 동거남에게 털어놓으면서 경찰에 신고하게 된다. 하지만 경찰은 젊은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그러겠냐는 듯 쓴웃음을 흘린다. 효정이 우울증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치매환자로 몰아가려한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 했던가. 수영장의 젊은 여인들은 할머니 몸매가 좋다는 둥 옷을 잘 입는다는 둥 조롱하듯 내뱉는다. 법원은 결국 나이차를 근거로 사건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한다.

효정은 피해자가 고통 받는 현실에 굴하지 않고 용기내어 가해자를 향한 일갈을 준비한다. 자신의 손으로 또박또박 작성한 고발장을 복사하여 아파트 옥상으로 간다. 난간에다 복사지 뭉치를 올려놓자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 장 한 장 불공정한 세상을 항해 배달하기 시작한다. 허공에 나부끼는 고발장을 뒤로하고 효정이 묵묵히 돌아서 걷는 무거운 뒷모습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인생,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아’ 영화가 끝나고도 효정의 대사가 오래도록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런데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모욕을 당하면 죽거나 죽이거나 두 방법밖에 없다 했던가. 법망과 맞서던 실제 주인공은 자살로써 억울함을 대변했다고 한다. “나이가 많아서 기분 안 나쁠 줄 알았다.”던 어느 가해자의 황당한 해명이 떠오른다. 더 큰 문제는 대부분의 노인들이 모욕을 당하고도 수치감에 신고는커녕 말조차 못한다는 사실이다. 부딪혀 싸울 힘도 용기도 없는 약자여서 그렇다. 판례에서 봐도 오히려 가해자를 관대하게 보는 시선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피해자의 고통에 동참한 연민은커녕 당할 짓을 했겠지, 식의 책임 전가 때문에 이중 피해를 입는 사람들, 궁극에 가서는 죽음으로 내몰린다. 

삐뚤어진 욕망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용서는 용서 받을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서라고 했다. 존엄성을 말살하는 이런 범죄자는 절대 용서하면 안 된다. 죄는 미워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란 말도 해당사항 없다. 현재 69세가 내 어머니일 수 있고 미래의 내 아내일 수 있다. 같은 여성끼리도 상처를 보듬어 함께 아파하며 분노할 줄 모르는 세태가 너무 무섭지 않은가. 세상을 한발 앞서서 지나갈 뿐 나이가 죄는 아닌데 말이다. 구난救難, 누군가의 고통을 살피고 구하려는 마음이 내 삶의 갈피 안에 있는지 자문해본다. 괜찮다는 말은 괜찮지 않다는 말일 수 있으므로 문맥을 한 번 더 살펴보라는 것. 영화 69세가 우리에게 던진 엄중한 메시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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