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이 두른 군위 한밤마을
돌담이 두른 군위 한밤마을
  • 장희자 기자
  • 승인 2020.10.2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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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의 문인으로 1392년 불사이군 정신으로 낙향한 홍로선생이 동성반촌 형성
조선초기 서당으로 출발한 대청은 문화공간 및 이정표, 1991년 무형문화재 제262호
마을 상징 남천고택은 1박2일 촬영지, 대청위 다락, 쌍백당의 주인 2그루 잣나무 일품
한밤마을 돌담과 한옥이 호롱불 달아놓은 감나무와 어우러지면서 가을이 무르익어간다. 장희자 기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달은 11월이다
더 여유있게 잡아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다  
낙엽 져 홀몸으로 서 있는 겨울나무
나무들이 깨금발을 딛고 선 등성이
그 등성이에 햇빛 비쳐 드러난 황토 흙의 알몸을
한없이 좋아하는 것이다  
황토 흙 속에는 시제(時祭) 지내러 갔다가
막걸리 두어 잔에 취해 콧노래 함께 돌아오는
아버지의 비틀걸음이 들어 있다  
어린 형제들이랑 돌담 모퉁이에 기대어 서서
아버지가 가져오는 봉송(封送) 꾸러미를 기다리던
해 저물녘 한 때의 굴품한 시간들이 숨쉬고 있다  
아니다
황토 흙 속에는 끼니 대신으로 어머니가 무쇠솥에 찌는
고구마의 구수한 내음새 아스므레 아지랑이가 스며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은
낙엽 져 나무 밑동까지 드러나 보이는 늦가을부터 초겨울이다 
그 솔직 청결 겸허를 못견디게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사랑하는 계절 나태주)
 
  돌담은 시골살이의 로망 중 하나로 예쁘게 쌓은 야트막한 돌담 하나로 운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난 도시인들의  향수를 부른다   .

대구와 가까운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소재하는 한밤마을이다. 이 마을의 남쪽에는 팔공산 정상에서 가산까지 1000m 내외의 팔공산 주능선이 뻗어있다. 남쪽의 주능선에서 북쪽으로는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동쪽과 서쪽으로 산줄기가 한밤분지를 감싸고 있어, 예로부터 냉해와 가뭄, 그리고 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빈번했다.

한밤마을의 상징인 담쟁이 돌담으로 둘러쌓인 남천고택과 대청 사이에 있는 은행나무가 가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장희자 기자

한밤마을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면서 전통신앙과 불교 및 유교문화가 어우러진 흔적들이 마을 곳곳에 남아 있는 팔공산의 대표적인 전통문화마을이다. 7세기 무렵에 조성된 제2석굴암의 모전석탑과 아미타 삼존석불은 한밤마을이 신라의 북방진출의 전진기지였던 흔적이다.  또한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62호로 지정된 한밤마을의 대청(大廳)은 당시 지휘소 자리로 추정된다. 신라시대에는 화랑(花郞)을 미륵(彌勒)의 화신으로 여길 정도로 우대하였으며, 화랑 김유신을 따르던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했던 예로 볼 때 보물 제988호로 지정된 대율리 석불입상, 즉 미륵불은 한밤마을에 머물면서 팔공산에서 수련하던 화랑들의 정신적인 귀의처 였다.

한밤마을에는 서기 1100년 이전, 고려 중엽에 재상을 지낸 부림홍씨 시조 홍난(洪鸞)이 현재 양산서원 근처의 갖골(枝谷)에 정착하면서 부림홍씨의 본향이 되었으며, 1300년 무렵에 신천강씨(信川康氏) 강인석(康仁碩)이 부림홍씨 처가 동네로 이거했다고 전한다. 1392년 여말 선초에 정몽주의 문인으로 문하사인(門下舍人)을 지낸 경재(敬齋) 홍로(洪魯·1366~1392)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이유로 낙향하면서 한밤마을은 동성반촌(同姓班村)으로 발전하여 부림홍씨(缶林洪氏)의 집성촌으로 영천최씨(永川崔氏)와  전주이씨(全州李氏)등과 함께 어울러 살아왔다.홍로(洪魯)는 마을의 옛 이름이 대식(大食)’, ‘대야(大夜)라 했던 것을 대율(大栗)’, 한밤으로 고쳤다고 한다. 대식(大食)은 한밥, 대야(大夜)는 밤이 길다는 의미의 한밤으로 의미는 같지만 한자를 달리 표기하던 것을 대율(大栗)로 통일했다.

한밤마을 입구에 있는 성안숲은 앞으로 남천, 뒤로 서원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팔공산의 지기를 막아 마을의 복을 내보내지 않으려고 수구막이를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비보림(裨補林)으로 한밤마을의 성역이자 주민들의 정신적 근거지이다. 진동단(鎭洞壇)은 동신제를 지내는 장소로 지기를 제압하는 뜻이 담겨있다. 진동단은 예전에는 비신또는 비신대라고 하여 돌무더기 위에 팔공산에서 정결한 나무를 베어 오리를 조각한 솟대로 매 3년마다 비신을 새로 세웠으나, 시대가 변하자 비신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하여 팔공산에서 나온 돌을 다듬어 지금의 진동단(鎭洞壇)을 세웠다. 한밤마을은 배 형국을 하고 있어 배가 가라앉는다고 하여 샘을 함부로 파지 않았다고 하며, 진동단은 배의 돛대를 상징한다고 한다

성안 숲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300명을 일으켜 영천성 수복에 선봉장으로 활약했던 송강(松岡) 홍천뢰(洪天賚) 장군의 추모비(追慕碑)와 군위지역 정대장으로 홍천뢰와 함께 출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던 혼암(混庵) 홍경승(洪慶承) 장군의 기적비(紀蹟碑)가 나란히 서 있다. 1973년 5월에 건립된 홍천뢰장군 추모비의 전면글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이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삼층석탑 1기가 동산2리 신리에서 출토되어 대율초등학교 앞 성안 숲에 옮겨놓았으나 1989년 6월 7일 심야에 도난당해 현재 석탑의 1층 기단부만 남아있다.

이끼되어 내려 앉은 돌담끝으로 가을꽃이 손짓하듯 부르고 있다. 장희자 기자

또 자연석 바위에 새긴 수해기념비(水害記念碑)도 풀밭에 서 있다. 기념비에는 1930년 경오년(庚午年) 7월 13일(음 6.18) 오후 3~7 사이에 팔공산 일대에 내린 집중폭우로 동산계곡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한밤마을은 혹심한 피해를 입었던 가슴 아픈 사연이 마치 뼈에 새긴 것처럼 깊다.

한밤마을 안길은 승용차가 비켜갈 만큼 널찍하다. 옛날에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심었다는 엄나무 두 그루가 돌담 옆에서 날카로운 가시를 드러낸 채 대문을 지키고 있다. 보물 제 988호 대율리 석불입상을 둘러보고 정겨운 옛 돌담부림홍씨종택을 알리는 안내표지판을 따라 가면 경운기가 겨우 다닐 정도로 길은 좁아진다. 큰길가의 돌담은 반듯하지만 이곳의 돌담은 구불구불하다. 옛 사람들은 오랜 경험과 미적 감각으로 돌담은 S자로 구불구불하게 쌓아 튼튼하고 오래가면서 아름다움다는 것을 돌담에 표현해 놓은것 같다.

돌담길을 둘러보다 보니 ‘한밤돌담 옛길안내판이 있는 골목은 더욱 좁아서 소가 겨우 다닐 정도로 협소하나 돌담 위로는 인고의 세월의 더께가 배인 이끼들이 자라고 있고, 가을꽃들도 곳곳에 심어 놓아 담장안 한옥과 어우러지면서 더욱 정겨운 고향 시골 정취를 풍기면서 향수를 지극한다. 육지의 제주도라 할만큼 한밤마을 돌담길이를 모두 합하면 2㎞정도는 된다고 하니 담장을 쌓으면서 감내한 인고의 세월들도 돌담에 녹아있는 듯하다 . 

돌담주변에는 산수유나무, 감나무, 사과나무, 은행나무가 많다. 봄과 여름에는 푸른 잎으로, 가을에는 빨갛게 익어가는 산수유 열매, 주황빛 감, 아무렇게나 떨어져 구르는 샛노란 은행과 은행잎, 겨울에는 바람에 쓸리는 말라붙은 담쟁이 잎들이 가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처럼 오랜 세월 쌓이고 반복되어 닳아 온 돌담들이 안온하게 감싸고 있는 한옥이다

남천고택 담장너머로 쌍백당의 당호로 된 250년잣나무 2그루의 자태가 조선시대 선비들의 기상을 품고 있는 듯 위풍당당하다. 장희자 기자

한밤마을을 고풍스럽게 만드는 일등 공신은 바로 상매댁(上梅宅)과 대청이다. 남천고택(南川古宅)이라고도 불리는 상매댁 전통 가옥은 쌍백당이라고도 불리는데 250여년 전에 홍우태 선생의 살림집으로 세웠다. 현재 건물은 그 뒤 1836(현종 2년)경으로 새로 지은 것으로 원래는 독특한 배치 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나 중문채와 아래채가 철거되어 현재는 ㄷ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 사당이 남아 있다.  쌍백당이라는 당호는 뒤안에 있는 250년 잣나무 2그루에서 따왔으며, 그 예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매우 독특한 배치 형태이나 일부가 훼철되어 매우 아쉬운 집이다. 또한 대청 위에 다락을 두거나 헛간 위에 다락을 둔 특이한 형태도 조선 후기에 보이는 실용주의 개념을 건축에 도입한 예로 볼 수 있는 주택이다.

마을의 중간에서 이정표 역할을 하는 대청은 조선초기 부림홍씨 문중에서 건립한 서당으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때 소실하여 1632년(인조 10)에 중창하여 학사로 사용했다. 그후 1651년(효종2)과 1705년(숙종 31)때 각각 중수했다. 근래에 와서는 1992년에 완전히 해체보수하여 부식재와 기와를 교체하고 기단도 보수했다. 현재는 마을의 주민들과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10월 31일에는 고택음악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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