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들의 버킷리스트 경남 거창 요수정
조선 선비들의 버킷리스트 경남 거창 요수정
  • 장희자 기자
  • 승인 2020.10.22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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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학자 신권이 건립하여 제자를 가르치던 정자로 .경남 유형문화재 제423호
2008년 국가지정 명승지 제53호로 선정된 수승대 바로앞에 자리잡아 경치가 빼어남.
산과 하천, 적송에 둘러쌓인 수려한 경관으로 16개 현판이 걸린 선비들의 풍류 장소
누정 내부에 방을 놓는 등 지역적 특성과 건축적 의의가 잘 반영된 대표적인 문화재
요수정은 너럭바위와 물, 울창한 소나무 숲이 완벽한 삼합지다. 장희자 기자

산수 사이에 정자를 지으니
물을 사랑한다고 산을 버린 것 아니네.
물은 산으로부터 나오고
산은 물을 따라 둘러있네.
신령한 곳이 이로부터 열렸으니
물을 즐기는 뜻이 서로 통하네.
인자와 지자의 일을 헤아리니
모든 일이 오히려 부끄럽네. (요수정  신권)

위 시는 조선중기 거창 지역의 학자 신권(愼權 1501~1573) 선생이 1540년(중종 35) 거창 수승대 경내에 요수정(樂水亭) 정자를 짓고 난 후 빼어난 주변풍광을 읊은 시다. 요수정은 수승대 바로 맞은편에 있다.

남덕유산에서 남쪽으로 월종산을 지나 황석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금원산을 지나 기백산으로 가는 능선이 갈라지면서 만들어진 세 줄기의 계곡 심진동과 원학동, 화림동을 ‘안의삼동’이라 하는데, 예로부터 영남제일의 동천으로 이름난 곳이다. 그 중에서도 기백산과 황석산의 가운데를 흐르는 용추계곡이 있는 심진동의 심원정과 동쪽에 있는 원학동의 수승대, 서쪽의 화림동에 있는 농월대를 삼가승경(三佳勝景)이라 하여 최고의 절경으로 불렀다.

거창의 수승대(搜勝臺)는 뛰어난 주변 경관의 아룸다움으로 2008년 국가지정 명승지 제53호로 선정된 곳이다. 위천(渭川)은 덕유산과 남덕유산 등에서 몸을 일으켜 덕유산의 남쪽, 남덕유산의 동쪽으로 흐르면서 황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중국의 강태공 여상이 낚시를 즐겼던 황하의 지류, 위수를 본 따 지은 이름이다. 위천면 상류의 개울을 웃내 또는 상천이라 하는데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위천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수승대 일원은 조선 중종때 요수 신권 선생이 이곳에 은거하여 살면서 구연서원을 건립해 제자를 양성했다. 남덕유산에서 흘러내린 월성계곡과 덕유산에서 시작한 송계사 계곡이 갈계숲에서 합류해 내려와 수승대 북바위 옆에서 소를 이루니 구연(龜淵), 서원앞 계곡의 바위가 거북을 닮아 암구대(巖龜臺)라 하고, 경내를 구연동(龜淵洞)이라 했다. 

수승대 앞 구연교에서 바라본 요수대는 붉은빛 소나무 노송으로 둘러싸여 있다. 장희자 기자

수승대의 본래 이름은 수송대(愁送臺)였. 삼국시대 때 백제의 사신을 신라로 보내면서 전별하던 장소였으며,근심스럽게 보내는 곳’이라는 의미였다. 수송대를 수승대로 바꾼 이는 퇴계 이황으로, 수승대는 조선 선비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중 하나였다.

1543년 퇴계 이황은 거창 영승마을에서 농월정을 짓고 사는 장인 권질의 회갑을 맞아 찾아갔다. 당연히 수승대를 찾아가 신권을 만날 작정이었으나 임금이 급히 호출하는 바람에 만남을 이루지 못했다. 임금의 부름을 받고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황은 수송대라는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니 수승대로 바꾸자는 요지로 신권에게 편지와 시를 보냈다. 대학자의 요청을 받은 신권은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운데 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스럽네 라는 화답시를 짓고 바위에 수승대라는 각자를 새기면서 명칭이 유래되었다.  

신권은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언중(彦仲), 호는 요수(樂水)로 선교량(宣敎郞) 훈도(訓導)를 지낸 후 벼슬을 떠나 수승대 주변에 은거하면서 긴 세월 후학을 양성하며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정자 이름 요수정은 신권의 호 요수를 따서 지은 것이다.  요수는 논어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에서 따왔다. 요수정이라고 지었지만 신권의 마음속에는 산도 좋아하고 물도 좋아하는 지혜로우면서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고자 하는 마음인 ‘요산요수정’이라는 것을 신권이 요수정을 노래한 시를 음미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신권이 미관말직 후에 고향에 은거한 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연관이 있다거창 신씨는 한때 권문세가로 기세를 떨쳤다. 당시 신승선(1436~1502)은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장인으로, 임영대군이 수양대군 집권을 도운 덕에 탄탄대로를 걸었다. 딸을 연산군에게 혼인시겨 연산군이 왕이 되자 영의정까지 오르며 거창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신수근도 권력의 정점에 오르며 딸을 진성군(후일 중종)과 혼인시켰다. 그러나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신수근은 물론 아우 수영, 수겸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고 딸(단경왕후)도 쫒겨나 폐비 신씨로 전락했다중종반정 이후 거창신씨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렸다. 신권이 장성해 벼슬살이를 할 때까지 조정 내에서 거창신씨에 대한 견제도 상당히 심했다. 

요수정 바로 앞에 있는 수승대에는 퇴계 이황 선생의 시문이 각자되어 있다. 장희자 기자

요수정은 2005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신권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치던 강학당이다. 1542년(중종 37)에 구연재와 남쪽 척수대 사이에 건립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그후 재건하였으나 다시 수해를 입어 1805년 후손들이 현위치인 수승대 건너편 솔숲으로 이건했다. 거북바위 앞의 휘몰아치는 물길을 굽어보고 서 있으며,  자연그대로의 암반을 초석으로 사용했고 마루는 우물마루며 사방으로 계자난간을 둘렀다네 곳의 추녀에 정연한 부채살 형태의 서까래를 배치하여 세부장식이 뛰어나다.

특히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한 거창지역의 기후특성을 고려하여 정자 내부에 아궁이에 불을 때는 온돌까지 갖추고 있어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정자 아래쪽으로는 작은 굴뚝이 있는데 굴뚝을 아래쪽으로 뺀 이유는 따뜻한 열을 그 안에 오래도록 잡아 놓는 역할과 더불어 벌레를 쫓는 데도 아주 유용한 구조로 정자이면서 한옥에서 볼 수 있는 지혜를 그대로 갖춘 곳이다.

요수정과 수승대는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자그마한 정자에는 무려 16개의 현판이 걸려있고, 거북바위 수승대에도 빈 자리가 없을 만큼 시문과 글자가 가득하다

2012년 9월 17일 초강력 태풍 산바가 200년생 소나무를 뿌리채 뽑아 요수정을 덮쳤으나 요수의 제자와 후손들이 선생을 기리며 세운 기념비가 소나무를 받쳐 요수정의 피해를 막았다. 거창신씨 세거지로 이름난 수승대 인근 위천 황산마을에 거주하는 신 씨는 요수정이 태풍으로부터 보호받은 것은 요수 선생이 학문에 능하였으나 벼슬을 멀리하고 오로지 안빈낙도와 후학에 힘쓰셨고, 이를 하늘이 주신 업으로 삼으며 제자를 충심으로 키운 선생의 밝은 덕과 기개 덕분에 재앙을 예방하고 소중한 문화유산이 지켜진 것에 대해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