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㉟벼 베기와 그루터기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㉟벼 베기와 그루터기
  • 정재용 (엘레오스) 기자
  • 승인 2020.10.19 1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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볍씨 1개로 낟알 100~140개 얻는 벼농사

추석과 운동회로 이어지는 잔치가 끝나고 열흘 정도 지나면 농촌은 벼 베기의 농번기로 접어들었다. 한창은 10월 중순 무렵이었다. 서리 맞은 벼는 농부의 처분만을 기다리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익어서 노란빛을 띤 벼를 마을사람들은 ‘나락’이라고 불렀다. 벼를 베어 묶은 단을 '나락단’ 혹은 ‘볏단’이라고 했다.

그즈음 길에서 얼굴을 마주치면 인사는 으레 “나락 다 베 가능교?”였다. “벼 베기 다 돼 갑니까?” 묻는 말이다. 안강, 경주, 포항 지방에서는 “합니까?”를 “하능교?”라고 했다. “하는가요?”가 “하는기오?”가 되고 준말로 “하능교?”가 된 것이다. 안동지방에서는 “하니껴?”라고 했다.

서리가 내리면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고 두렵던 뱀도 ‘서리 맞은 뱀’이 됐다. 학교는 가을소풍 이튿날부터 사흘 간 가정실습에 들어갔다. 일손이 달리는 농촌에서 자녀는 더 없는 지원군이었다. 모내기 때처럼 객지에 나가있던 자녀들은 주말을 맞아 고향으로 와서 일손을 도왔다. 누구 집 뉘가 와서 벼베기를 했다는 소문은 금방 돌았다.

농부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낫을 갈았다. 숫돌은 닳아서 가운데가 움푹하게 파여 초승달 모양이 된지 오래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는 논으로 향했다. 농부의 지게 위 바소쿠리 안에는 낫이 식구 수대로 담겨 있었다.

낫을 기다리는 나락들. 우물터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마을 동쪽 길, 가까이 어래산이 보이고 그 너머가 기계마을이다. 멀리 보이는 산은 비학산이다. 정재용 기자
낫을 기다리는 나락들. 우물터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마을 동쪽 길, 가까이 어래산이 보이고 그 너머가 기계마을이다. 멀리 보이는 산은 비학산이다. 정재용 기자

고래전은 물이 덜 빠져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했다. 다리를 걷고 논에 발을 들여놓으면 찬 기운이 온몸을 감돌아 몸을 부르르 떨게 했다. 두 발은 진흙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아침햇살에 날개를 말리던 메뚜기는 놀라서 달아났다. 누런 벼 색깔로 보호색을 띠고 있고 사람이 근접하면 살금살금 뒷걸음질하는 놈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벼들이 삼손의 머릿결 잘려나가듯 낫에 잘려나갔다. 샛노랗게 익은 벼 이삭이 농부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듯 찰랑거렸다. 농부의 성적표였다. 모내기로부터 김매기, 물대기, 비료 주기, 농약 치기, 피사리, 참새 쫓기, 물 빼기를 얼마만큼 성실히 했는지 볏단의 무게가 말해줬다.

모내기할 때 못줄 눈금 하나에 서너 포기를 심는다. 볍씨 한 알에서 나온 싹이 한 포기다. 그 서너 포기는 여름내 자라면서 20포기에서 35포기 정도 가지치기를 한다. 가지마다 한 개의 벼이삭이 열리는데, 벼이삭 하나의 낟알 수를 세어보면 100개에서 140개 정도이다. 같은 모내기를 하고도 낟알 수는 2천 개(20포기 곱하기 100개)와 4천900개(35포기 곱하기 140개)로 약 2.5배의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의미다. 거기다 알이 꽉 찼는지 정도까지 계산하면 그 차이는 서너 배로 벌어질 것이다. 그 차이는 근면 성실한 농부가 받는 상급이었다.

그 때면 교회에서도 추수에 관한 설교를 많이 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30배, 60배 혹은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집니다.” 수요일 저녁기도회는 오후 8시에 시작했다. 농부는 논에서 늦게까지 일하다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예배당으로 달려갔다. 설교는 길었다. 교인들은 피곤에 지쳐 쏟아지는 잠을 쫓느라 허벅지를 꼬집고 비틀었다. 소평교회 주일 낮 예배 참석 인원은 마흔 명에서 쉰 명이었다.

한들, 모래골, 섬배기, 양동들 논은 물이 잘 빠져서 보리농사가 가능했다. 농부는 추수가 끝나는 대로 보리를 갈기 위해서 벼 베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소달구지로 틈틈이 퇴비나 재거름을 냈다. 도로변이나 논둑 가까운데 벼를 동그랗게 베어내고 그 곳에 퇴비나 재거름을 쌓고 짚 고깔로 덮었다.

베어 낸 나락으로는 찐쌀을 만들었다. 찐쌀은 ‘쪄낸 쌀’이라는 뜻으로, 덜 여문 쌀은 찧으면 싸라기가 되기 때문에 쪄서 찧어야 했다. 벼훑이로 훑고, 소죽솥에 넣어 찌고, 멍석에 깔아 말리고, 절구통에 넣어 찧고, 키로 치기까지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벌어지는 고된 노동의 산물이었다. 찐쌀은 간식으로는 괜찮았으나 밥을 해 놓으면 찰기가 부족해서 별로였다.

조금이라도 더 일하기 위해서 점심도 들로 내다 먹었다. 농부의 아내는 점심 반티를 이고 한 손에는 물주전자를 들고 좁은 논둑길을 몸빼를 펄럭이며 잘도 걸었다. 놉을 들여 일할 때는 농주(農酒)가 빠지지 않았고 길 가는 사람도 불러서 함께 마셨다.

놉을 하거나 품앗이로 여러 명이 동시에 벨 때도 있었지만 여의찮아 이솝우화 ‘보리밭과 종달새’의 경우처럼 가족끼리 베기가 일쑤였다. 학교는 가정실습을 하고 중학교에서는 가정실습에 이어 사흘에 걸쳐 중간고사를 쳤다. 가정실습은 물론 시험 기간 중에도 곧장 집으로 와서 일손을 도와야하는 농부의 자녀는 시험 칠 때면 언제나 출발선 뒤에서 출발하는 기분이었다. 소년은 “일하라”는 말은 들은 적이 있어도 “공부하라”는 말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벼 베기를 마친 안강들에는 그루터기만 그득하다. 멀리 양동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벼 베기를 마친 안강들에는 그루터기만 그득하다. 멀리 양동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청랑한 하늘 아래 가을 햇살이 따가웠다. 허리를 굽혔다 폈다하는 벼 베기는 중노동이었다. 갈수록 말수는 줄어들고 “드드득, 드득” 벼 포기 잘려나가는 소리만 논 자락 가득했다. 소년은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혼자서 도로를 뚫듯 기다랗게 파 들어가고 섬을 만들어서 깎아내기도 했다.

매년 100배, 140배 소득을 얻으면 누구나 수년 내 부자가 되기 마련일 텐데 농촌의 삶은 해가 가도 별로 달라지는 게 없었다. 비료 값, 농약 값, 품삯, 농지세 등 각종 세금, 수세(水稅)와 농협조합비, 탈곡기 사용료, 정미소 이용료 등 농비(農費)가 그만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낮은 쌀값에 밀린 빚, 장리(長利)쌀(마을사람들은 ‘장려 먹는다’라고 불렀다) 갚고 나면 거의 본전치기였다. 농부 자신의 품값은 아예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나무를 베고 남은 등걸을 그루터기라고 한다. 그루터기는 희망이다. 기원전 586년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갈 때 선지자 이사야는 “밤나무나 상수리나무가 잘릴 때에 그루터기는 남듯이, 거룩한 씨는 남아서, 그 땅에서 그루터기가 될 것이다”라고 희망을 노래했다. 끌려간 지 70년이 지나고 이스라엘 백성은 거짓말처럼 귀환한다. 그들은 그 기쁨을 "꿈꾸는 것 같았도다"라고 노래했다.

농부는 그루터기만 남은 논을 둘러보며 다시금 마음을 추스르고 팔을 걷어붙였다. 탈곡을 위해서는 볏단을 충분히 건조시켜야 했는데, 그 틈을 이용하여 그루터기 사이로 골을 타고 보리씨앗을 뿌렸다. 일찍 벼 베기를 마친 고래전의 그루터기에서는 어느 새 새싹이 돋아나 모내기를 마친 논처럼 파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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