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명례(明禮)성당
밀양 명례(明禮)성당
  • 장희자 기자
  • 승인 2020.10.15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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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영남 지방의 네 번째 본당이자 마산교구에서는 첫 번째로 본당이 설립된 곳
복자이자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1828-1866년)가 출생한 영적 고향 및 신앙의 원천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3번째 방인 사제 강성삼 신부가 사목하다 돌아가신 곳
경남 문화재자료 제526호로 지정된 초기 신앙선조들의 삶과 신앙을 느낄 수 있는 공간
명례성당은 코스모스 등 가을꽃으로 둘러싸여 꽃대궐을 이루고 있다. 장희자 기자

명례성당(明禮聖堂)은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변 언덕인  경남 밀양시 하남읍 명례안길 44-3번지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어 낙동강을 조망할 수있는  아름다운 성지이다  이곳은  밀양과 김해를 잇는 강나루가 있던 곳으로 수운과 육로가 발달한 곳이다. 천주교 마산교구의 영적 고향이며 신앙의 원천이기도 하며,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가 출생한 곳으로, 1896년 설립한 마산교구의 첫번째 본당이자 영남 지방의 네 번째 본당이다. 또한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세 번째 방인 사제인 강성삼 신부가 사목하다 돌아가신 곳이다.

순교자 신석복(申錫福) 마르코는 1828년 밀양의 명례에서 태어났다. 농사를 지으면서 누룩과 소금행상을 하면서 밀양에서 김해로 나가려면 명례나루터를 건너야 했는데 이곳은 늘 사람들이 붐볐고, 박해를 피해온 교우들도 정착해서 살았는데 이들의 권면으로 신자가 됐다. 그의 신앙생활 10여년 정도 지날 무렵인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포졸들은 명례로 들이닥쳐 그의 집을 찾아낸 뒤 재산을 탈취했다. 그리고 창원 마포에 장사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목에서 그를 체포하여 밀양으로 압송했다.

포졸들은 밀양에서 하루를 머무는 동안 그에게 무수한 형벌을 가했으며,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 대구로 압송되는 그를 뒤쫓아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빼내려 했지만 오히려 그는 형에게 “한 푼 전(錢)이라도 주지 말라.”고 부탁했다. 결국 압송된 대구 경상감영에서 배교할 것을 강요 당하고, 교우촌 정보를 얻으려는 관장으로부터 9일동안 혹형을 받아도 “ 저를 놓아 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자 1866년 3월 31일 당시 나이 38세에 교수형이 집행됐다.
명례성당은 아담한 한옥과 종탑과 팽나무 고목이 어우러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평화롭고 고요한 마음의 안식처로 다가온다. 장희자 기자

그후 순교자의 아들인 신영순 이냐시오가 대구로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부친의 유해를 찾아 모셔왔지만 박해의 여파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하는 지방 유지들과 신씨 문중의 반대로 고향 땅에 안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 낙동강 건너 한림정 뒷산 노루목에 안장했다. 그로부터 110여년이 지난 1975년 진영 본당 신자들은 순교자의 묘가 야산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본당 공원묘역으로 이장했다.

순교자의 미망인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명례에서 살았고, 후손으로는 손자 신순균 바오로(1948년 선종)는 후에 사제가 되었으며, 4대 후손이 명례리 상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한편 신석복 마르코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내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1896년 본당 설립과 함께 1897년 초대주임으로 부임한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1866-1903)는 1898년 현재 부지에 네 칸짜리 사제관을 지었고, 1926년 주임으로 부임한 권영조 신부는 기와로 된 성당을 새로 짓고 1928년에 축복식을 가졌다. 하지만 1935년 태풍으로 성당이 전파되었고, 1938년 옛 성당이 무너진 자리에 현 성당을 축소 복원했다. 남녀 신자석이 칸막이로 분리돼 있는 성당 내부는 초기 신자들의 신앙과 영성을 느끼게 해 준다. 명례성당은 그 후 본당 소재지가 이전함에 따라 공소가 되었다가 한동안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빈 성당으로 남아 있었다.
성당 뒷편으로 보이는 건축가 승효상이 세운 복자 신석복 마르코 기념성당이다. 장희자 기자

그후 2006년 김해 진영성당에 부임한 이제민신부가 축사로 변해버린 순교자의 생가 터를 발견한 뒤 변화가 일어났다. 2007년 4월 매입한 입구의 한옥을 보수해 그해 8월 강성삼신부의 세례명을 따라 라우렌시오의 집으로 명명했다. 2008년 신석복 순교자의 생가 터 인근에 있는 명례성당을 성역화하기 위해 명례성지조성추진위원회(위원장 이제민 신부)를 설립하고 이듬해 8월부터 매주 토요일 미사를 봉헌하며 교우들에게 명례의 배경과 역사를 설명하며 5천여명의 신자들의 후원으로 성금을 모아 2010년 개인축사로 변해버린 순교자의 생가 터와 주변 일대를 매입하고 8월에 야외 돌제대를 설치했다.

그리고 명례성당과 그 일대를 2011년 경남 문화재로 신청하여 제526호로 지정받았다. 2017년 3월 4일 명례성지조성 기공식을 하면서 봉하마을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을 지은 건축가 승효상 이로재 대표가 이제민 신부의 부탁으로 소금이 되어 순교하신 복자 신석복의 영성과 초기 교회 신자의 삶을 느끼게 하는 성지, 하늘이 보이고 강이 내려다보이고 능선이 살고 주변 환경에 어울리는 성지, 언덕 아래 형성된 마을과 주민의 마음을 느끼게 하는 성지, 문화재로 등록된 명례성당을 위축시키지 않고 오히려 돋보이게 하는 성지로 설계했다.
 
2018년 5월 19일 복자 신석복 마르코 기념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으며 신석복 복자의 생가터를 발견한 후 12년만에, 그리고 성당 기공식을 한 지 14개월 만에 맞는 경사였다. 그후 신석복 순교자를 알리는 전시관과 카페·식당·성물판매소가 있는 안내센터 라우렌시오 집’과 성모당, 사제관, 수녀관, 순례자들이 머물 순례자의 집도 차례로 조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좌상) 성당내부 모습, 우상)성당 앞 넓은 잔디밭과 성모상 좌하) 성당 정면 모습 우하)성당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강건너 봉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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