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톺아보기] 송찬호의 '가을'
[문학 톺아보기] 송찬호의 '가을'
  • 김채영 기자
  • 승인 2020.10.21 10:00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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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픽사베이

 

송찬호의 ‘가을’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다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만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2008년 미당문학상 수상작

 

우리 집 마당이 상당히 넓었었다. 그러나 가을만 되면 유난히 좁아보였다. 나락가마니가 성城처럼 수북이 쌓이기도 했고 황토고구마가 온 마당을 뒹굴 때도 있었다. 팥이며 녹두며 밭에서 들여온 곡물들은 죄다 마당에서 일단 몸을 풀었다. 알맹이와 껍데기가 분리되는 일별의 시간인 것이다. 메주콩을 쪄서 멍석 위에 부려놓고 며칠 말렸다가 타작을 했다. 아버지가 도리깨를 들고 힘껏 후려치면 깍지 속에 숨어 있던 노란 콩알이 놀란 듯이 튀어나왔다. 반 한량인 아버지의 역할이 가장 빛나던 순간이었다. 마치 귀소 본능처럼 낱알이 흙속으로 파고들 때 녀석들을 주워 담는 게 내 몫이었다.

‘가을’이라는 시에서 아날로그적인 맛이 난다. 토속적 정취가 유년의 추억을 소환하기에 맞춤하다. 비밀상자를 여는 것처럼 흥미롭다.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구수한 옛날이야기 같고, 어른을 위한 아름다운 동화 같기도 하다. 외형상으로는 1연이 1행, 6연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장끼, 노루, 멧돼지, 콩밭 주인, 깍지를 여는 콩, 콩새 등등 각 연마다 등장인물을 내세워서 가을 이미지를 넓혀간다. ‘...자 ...었다’식은 인과관계로 연결된다. 딱, 이란 시어가 경쾌하지만 결딴을 의미하는 듯하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면서 소멸로 가는 절기이기도 하니까.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인생의 가을이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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