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정원으로 자연과 인공의 조화, 담양 소쇄원(瀟灑園)
민간정원으로 자연과 인공의 조화, 담양 소쇄원(瀟灑園)
  • 장희자 기자
  • 승인 2020.10.08 1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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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보가 기묘사화로 인하여 출세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삶을 위해 꾸민 별서정원.
1981년 국가사적 304호로 지정된후 2008년 명승 제40호로 승격된 한국민간 정원의 정수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외와 순응, 도가적 삶을 산 조선시대 선비들의 만남과 교류의 장
조선 선비들의 이상향과 꿈을 광풍각, 제월당, 오곡문, 대봉대 등에 녹여내며 자연과 조화
비 온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의 광풍각(光風閣)은 머리맡에서 계곡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장희자 기자

집과 담장, 화단, 물살을 바꿈에 정성을 다했다.  자연 속에서 사람이 어울린다. 자연을 다스리지 않는다.

소쇄원(瀟灑園)은 1993년 유홍준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에서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라는 한 장으로 소개되어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었다. 물 맑고 깊은 깨끗한 원림이라는 뜻으로 뒷편으로는 까치봉과 장원봉(壯元峰)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앞쪽으로는 저멀리 무등산이 조망되는 전남 담양군 가사문학면 지곡리 123번지에 있다. 뒷산과 까치봉 사이의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계류를 중심으로 하여 산기슭에 터를 잡은 소쇄원의 바로 앞에는 증암천이 동서 방향으로 흘러 광주호에 들어가고 있다.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가 은사 조광조가 남곤 등 훈구파에게 몰려 전남 화순 능주로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향리인 지석마을에 숨어살면서 계곡을 중심으로 조영한 원림(園林)이다. 양산보의 은둔생활 기간 중인 1520년부터 1557년 사이에 조성됐다. 소쇄원의 ‘소쇄’는 본래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서 깨끗하고 시원함을 의미한다. 양산보는 이러한 명칭을 붙인 정원의 주인이라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소쇄옹(瀟灑翁)이라 했다.
 
소쇄원의 조성사상을 보면 주자가 중국 숭안현(崇安縣) 무이산 계곡의 경승지인 무이구곡에 무이정사를 짓고 현실을 도피하여 은둔하는 행동양식이 깔려 있다. 당시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80년쯤 전에 중수하여 현재 2동이 남아 있다. 한편, 소쇄원에는 김인후(金麟厚)가 1548년(명종 3)에 지은 오언절구의 48영(詠) 시(詩)가 남아 있다. 그리고 고경명이 1574년 광주목사 임훈과 함께 광주 무등산을 유락(遊樂)하면서 소쇄원에 들러서 보았던 계원(溪園)의 사실적 묘사가 '유서석록'에 남아 있다.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빛이라는 뜻의 제월당(霽月堂)은 마루에 앉아 고개를 돌리면 흙담 아래로 계류가 지나고, 꽃과 나무가 우거진 밝은 공간이 펼쳐진다. 장희자 기자

 소쇄원의 배치를 목판으로 새긴 '소쇄원도'가 남아 있다. 이 목판은 소쇄원의 원형을 상고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목판에는 위쪽에 김인후의 소쇄원 48제영이 새겨 있고 오른쪽 외곽에는 '창암촌 고암동 소쇄원 제월당 광풍각 오곡문 애양단 대봉대 옹정봉 황금정 유 우암선생필'이라 새겨있다. 우암은 송시열의 호이다. 이 소쇄원도에는 건물의 명칭 식물의 명칭 지당(池塘) 계류의 조담(槽潭)이나 바위 다리 물레방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정원의 평면적인 모습은 계류를 중심축으로 하는 사다리꼴 형태이며, 흙으로 새 메움을 한 기와지붕의 직선적인 흙돌담이 외부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계곡의 굴곡진 경사면들을 계단상으로 처리한 노단식 정원의 일종이지만, 구성면에서는 비대칭적인 산수원림(山水園林)이다.
 
소쇄원은 기능과 공간의 특색에 따라 애양단(愛陽壇) 구역·오곡문(五曲門) 구역·제월당(霽月堂) 구역·광풍각(光風閣) 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애양단  구역은 이 원림의 입구임과 동시에 계류 쪽의 자연과 인공물을 감상하면서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애양단이란 김인후가 지은 '소쇄원사팔영' 가운데 있는 ‘양단동오'(陽壇冬午)라는 시제를 따서 송시열(宋時烈)이 붙인 이름이다.
 
경내에 들어서면 입구 왼편 계류 쪽에 약 18m의 간격을 두고 두 개의 방지(方池)가 만들어져 있고, 과거에는 물레방아가 돌고 있었다. 이것은 장식용으로 오곡문 옆 계곡물이 홈대를 타고 내려와 위쪽 못을 채우고, 그 넘친 물이 도랑을 타고 내려와 물레방아를 돌리게 되어 있다. 이것이 돌 때 물방울을 튀기며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물의 약동을 건너편 광풍각에서 감상하도록 설계됐다. 위쪽 옆에는 계류 쪽으로 튀어나온 대봉대(待鳳臺)라는 조그마한 축대 위에 삿갓지붕의 작은 모정(茅亭)이 있다, 이것은 근래에 복원했다.
 
 
오곡문(五曲門)은 조선 선비들의 이상향이자 주자가 학문을 닦았던 중국 무이산 계곡의 무이구곡에서 따 왔다 . 장희자 기자

오곡문 구역은 오곡문 옆의 담밑 구멍으로 흘러 들어오는 계류와 그 주변의 넓은 암반이 있는 공간을 말한다. 계류의 물이 들어오는 수문 구실을 하는 담 아래의 구멍은 돌을 괴어 만든 높이 1.5m, 너비 1.8m와 1.5m의 크기를 가지는 두 개의 구멍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낭만적인 멋은 계류공간의 생김새와 잘 어울린다. 오곡문의 ‘오곡’이란 주변의 암반 위에 계류가 之자 모양으로 다섯 번을 돌아 흘러 내려간다는 뜻에서 얻어진 이름이다. 이 부근의 암반은 반반하고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물가에 앉아서 즐기기에 넉넉한데, '소쇄원도'에는 한편에서는 바둑을 두고, 다른 한편에서는 가야금을 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제월당 구역은 오곡문에서 남서 방향으로 놓여 있는 직선도로의 위쪽 부분을 말하는데, 주인을 위한 사적(私的) 공간이다. 제월당 앞의 마당은 보통의 농가처럼 비워져 있으며, 오곡문과의 사이에 만들어진 매대(梅臺)에는 여러 가지 꽃과 나무들을 심어 놓았다. 광풍각 구역은 제월당 구역의 아래쪽에 있는 광풍각을 중심으로 하는 사랑방 기능의 공간이다. 광풍각 옆의 암반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었는데, 이러한 조경방법은 고려시대의 정원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한편, 광풍각의 뒤쪽에 있는 동산을 복사동산이라 하여 도잠(陶潛)의 무릉도원을 재현하려 했다.
 
제월당의 ‘제월’과 광풍각의 ‘광풍’은 송나라의 황정견(黃庭堅)이 유학자 주돈이(周敦頤)의 사람됨을 평한 데서 유래했다. 소쇄원의 조경식물로는 대나무 등 여러 종류를 심었는데, 이들 가운데 소나무·매화나무·대나무는 국화와 함께 사절우(四節友)라 하여 선비들이 즐겨 심었던 것이다. 측백나무는 주나라 때 왕자의 기념식수로, 회화나무는 고관들의 기념식수로 쓰이던 나무들로, 그 풍습에 따라 자손이 성공하기를 비는 뜻으로 심었다. 현재는 당시에 심은 나무들 가운데 소나무·측백나무·배롱나무 몇 그루가 남아 있을 뿐이다.
오곡문에서 본 광풍각, 광풍각에서 본 제월당, 소쇄원 출입로인 대나무 오솔길, 봉황(조광조)을 기다린다는 뜻의 대봉대.(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  장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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