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될 뻔한 국내 최대(最大) 길안 용계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수장될 뻔한 국내 최대(最大) 길안 용계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 장희자 기자
  • 승인 2020.10.07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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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임하댐 건설로 수몰위기 처하자, H-빔 공법으로 23억 들여 상식(上植) 성공
나무 높이 37m, 가슴 높이 둘레가 14.5m로 국내 은행나무 가운데 가장 굵음.
수령 700살이 훨씬 넘은 것으로 추정 되며, 1966년 천연기념물 제175호로 지정.
탁순창이 은행나무계(契)를 만들어 나무를 보호, 우리선조들의 나무사랑 소중한 자료
H-빔공법으로 15m 상식(上植)에 성공한 용계리 은행나무. 설치 당시 쇠기둥 프레임과 빔이 그대로 있다. 장희자 기자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 743번지 임하댐 순환도로변에는 가슴높이 둘레(흉고)가 국내에서 가장 굵은 천연기념물 은행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높이 37m, 흉고 둘레는 14.5m, 수간 폭은 33m로 수령이 700살쯤 된다. 이 나무는 원래 길안초등학교 용계분교 운동장 한 편에 서  있었으나 1987년 임하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했다. 

그대로 두면 나무가 9m까지 물에 잠기게 될 상황이었다. 주민들의 청원으로 수자원공사에서는 있던 자리에서 15m까지 들어 올렸고, 은행나무는 수몰 위기를 면했다. H-빔 공법, 생명토 공법, 요철공법을 이용해 둑을 쌓아 나무 주위를 에워싼 뒤 대형 크레인으로 조금씩 나무를 들어 올리면서 상식 작업은 1990년부터 1992년까지 흙을 메우면서 3년에 걸쳐 이뤄졌고, 1994년부터 1999년까지 6년동안 유지관리를 했다.

당시 34억을 들여 건설한 은행나무 전용 아치형 다리 너머로 용계리 은행나무가 보인다. 장희자

은행나무는 성공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아직도 밑동 부분과 양쪽으로 휘어진 큰 가지 부분이 쇠로 만든 지지대, 강철 와이어의 도움을 받고 있긴 하지만, 나무는  건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공사 때 잘려나갔던 가지 끝부분에도 새 살이 돋았다. 올려 심을 당시 뿌리의 80%가 잘려나가 스스로 영양과 수분 공급을 잘 해낼 수는 없었지만 이제 나무는 원기를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밑동은 물론이거니와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지들도 온전하다. 가지에 무성하게 달린 잎들은 검푸르게 빛나고 있다한 해 5천만 원을 들여 영양분을 공급하고 병충해 방제를 위해 꾸준히 관리를 했다.

이 나무에는 조선 선조(재위 1576∼1608) 때 훈련대장이었던 탁순창(卓順昌)이 서울에서 내려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은행나무 계(契)를 만들어 이 나무를 보호하고, 매년 7월에 나무 밑에 모여 서로의 친목을 도모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현재 이 마을은 사라졌지만, 탁씨의 자손들은 해마다 나무에 제사를 드리며 보호하고 있다.
 
용계리 은행나무는 주민 단합을 이루게 하는 상징물로서의 가치가 크고, 우리 선조들이 나무를 사랑하고 보호한 것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은행나무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 중에 하나이므로 1966년 천연기념물 제175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나무를 신성시해 온 전통이 있어 나무들마다 뜻깊은 전설·설화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 탁순창이 은행나무 계(契)를 만들어 이 나무를 보호하던 그때 이미 300살이 넘었던 이 나무는 여느 나무와 다른 신목(神木)으로 길러지면서 추앙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뒷산인 약산봉수대를 지키던 봉수꾼 여남은 명이 왜병에게 쫓기어 마을로 내려와 이 나무에 올라 숨었다. 뒤쫓아 온 왜병은 숨은 봉수꾼을 보지 못하고 나무그늘에서 쉬었다 떠났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마을의 수호신 노릇을 하는 오래 묵은 당산나무가 울음소리로 나라의 위기를 예고하고 슬퍼하였다는 얘기는 드물지 않다. 당연히 이 신목도 울음소리로 나라의 변란을 예고했다. 은행나무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국치(國恥)를 못내 서러워하여 울었고, 6.25한국전쟁 때도 울었다고 전한다.

원래 은행나무는 암수가 서로 마주 보아야만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데 용계리에는 수나무가 없다. 그런데 암나무만으로 한 해 은행을 서른 말가량 수확하였다 한다. 이는 나무 아래 맑은 냇물이 있어 그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수나무로 착각하여 결실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은행나무에 접해 있는 임하댐, 길에서 학교로 연결하는 조그만 다리가 있었으나 지금은 물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 장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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