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인생, 울산 김정곤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인생, 울산 김정곤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 장희자 기자
  • 승인 2020.10.05 17:00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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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보다 치열한 작은 거인 김정곤 시인
중학교 때 친구들의 장난에 의해 반신불수의 몸으로 병상에서 일년반을 지내다가 기적같이 일어나 또 하나의 다리를 집고 혼자 몸도 가누기 힘든 몸으로 의과대학을 진학하여 정신건강관리과 전문의가 되어 칠십년 동안 굴곡진 삶을 살아온 김정곤원장. 장희자 기자
혼자 몸도 가누기 힘든 상태에서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정신건강관리과 전문의가 되어 70년 동안 굴곡진 삶을 살아온 김정곤원장. 장희자 기자

 

.......

해부용으로 제공하겠다는 각서를 신께 바치고서야

수술대에 오른 열아홉 청춘

평생을 다리 셋으로 사는 선물을

받고서야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는 불편한 육신에

히포크라테스는 찾아오는 길을 열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육신

멀쩡한 사람도 힘들다는 전문의 과정을 거쳐

정신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못살겠다고 찾아온 환자들은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내모습을 보고서는

할 말을 잃은채 용기를 내어 돌아갑니다

삶이 처방전이 되고

내모습이 그들에겐 용기를 내고

다시 사는 꿈이 되고

희망이 되어 돌아갑니다

 

뿐입니까

무거우면 힘든다 하여 신은 또 내 몸속의 것을

위암이라는 선물을 주어 다섯에 넷을 가져버렸습니다

맹장도 쓸데없다고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길고긴 장도 끊어서 가져갔습니다

세상의 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주고서야 비로소

덤으로 얻은

작고 가벼워진 육신의 다리 세 개의

사나이는 병든 마음을 고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계단아래에서 핀 야생화처럼

오늘도 죽음과 타협하려는

이들에게 환생의 삶을

몸으로 보여 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

- '내 몸에 담은 동주의 꿈' 부분 

 

16번의 수술을 받고, 8번의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으나  불굴의 정신으로 현재까지 굳건히 진료실을 지키고 있는 작은 거인, 정신과 의사이자 시인인 김정곤 씨를 만났다.  그의 70년 인생을 짧은 시간에 다 담을 수는 없겠지만, 그 단편들만으로도 파란만장했던 삶의 여정을 느낄 수 있었다. 

 

-고희에도 하루하루 다이나믹한 도전의 삶을 영위하고 계신 김 원장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출생 및 성장과정에 대하여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부산의 평범한 가정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토성초등학교, 경남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는 아버지 직장을 따라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충남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습니다.


- 원장님께서는 몸이 불편하신데 어릴 적 건강상태는 어떠하였습니까?    

▶ 중학교 입학시험 당시 체능시험 만점을 받았을 정도로 건강했습니다. 어릴 때 꿈이 육군사관학교 진학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중학교 2학년 재학 중 불의의 사고로 척추를 다쳐 21개월간 입원 중 6번의 대수술을 하고도 걷지를 못해 휠체어를 타고 퇴원하였습니다. 너무나 가난하여 재활치료는 엄두도 못내고 스스로 걷기까지 또 2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입원 전후로 여섯 번의 자살시도를 했었습니다. 중학교 동기생들보다 4년이나 늦게 고등학교에 입학했지요.

-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의과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습니까?

▶ 고등학교 재학 중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문학소년이었습니다. 가톨릭신부가 되고 시인이 되는 꿈을 갖고 있었기에 고등학교 졸업반 때 신학교로 진학하고자 했습니다. 신앙심이 두터웠던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형의 허락도 간신히 받았습니다만 당시 신자가 아니었던 아버지의 반대로 의과대학으로 진학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결혼을 할 수 없는 신학교 진학도 안되고, 문학을 하게되면 생계가 어렵다며 반대하셨지요. 불편한 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의사 뿐이라는 이유였습니다. 결국 의과대학 입학시험을 보게 되었고 필기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면접시험에서 제 건강상태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이 몸으로는 도저히 졸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그 해 수석으로 합격한 친구가 저처럼 하지지체장애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수석을 한 덕분에 입학을 할 수 있었지요. 입학 후 졸업까지의 과정은 험난 그 자체였습니다만 의지력으로 견뎌냈습니다. 의과대학 입학식 날 아버지께서  " 정곤아,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아버지의 눈이 항상 너의 뒤꼭지에 붙어 다닐것이다." 하신 말씀이 저에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의사가 된 지금의 영광이 있기까지 가족의 보살핌과 내조가 중요했다고 생각하는데 한마디 해주시겠습니까?

하지지체장애인인 데다 의과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았을 때인데도 주저없이 결혼을 승낙해 준 아내에게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사를 전합니다. 아버지의 건강을 늘 염려하는 것은 물론 장애인인 아버지를 단 한번도 부끄러워하지 않은 두 아들에게도 고마운 마음 이루 말할 수 없지요.

평생 수술 한번 받지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16번의 수술을 받았다니 놀랍습니다. 그 과정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 중학교 재학 중에 척추를 다쳐 수술을 6번이나 받았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해드렸습니다. 결혼 후에도 입원을 수시로 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전문의 시험 끝난 그날 맹장이 터져 응급수술을 받았으며, 이후 위암수술, 소장수술을 받았습니다. 작년 칠순날 급성방광염으로 응급 입원을 했었는데 올해 봄 고희 이틀 전에 또 응급실을 통해 입원하여 방광의 종양을 다섯개나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악성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84세에 돌아가셨는데 치과치료 이외에는 단 한번도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없이 점심식사 후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의사이면서도 건강관리를 제대로 못한 탓이라고 자책도 많이 했습니다.

- 문학활동은 처음 어떻게 하여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 경남중학교 입학 당시 신입생을 대상으로 " 신입생은 말한다." 는 글을 공모하였는데 제 글이 당선되어 학교신문에 게재된 것이 계기가 되어 글을 읽고 쓰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랜 병상생활 동안의 독서가 적지않은 힘이 되었고 문학에의 열정을 포기하기 싫어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원탑'이라는 동아리 활동을 했으며, 의과대학 재학 중에는 문학동아리인 '필내음'에서 시인이신 오세영 교수님과 역시 시인이신 손기섭 교수님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의사가 된 후로는 틈틈이 시를 쓰며 인제대학교 재직 중에는 학보사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산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간간이 신문이나 잡지에 제 글이 게재되기도 했었지만 여러 대외 활동 때문에 본격적으로 글 쓰는 일은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 대외 활동에 대한 말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 본래부터 오지랖이 넓어서인지 남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해서인지 의사회 일을 17년간 하면서 울산광역시 대의원회 의장, 동구의사회 회장 두 번, 대한의사협회 대의원회 운영위원, 대한의사협회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대한의사협회 고문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기타 대외 활동으로는 봉사단체 이외 울산광역시청, 교육청, 경찰서, 건강보험공단 등에서 활동했으며 현재에도 보건소 정신보건심의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동구의사회 감사 일을 맡고 있습니다.

- 시인으로 등단한 이야기와 등단 후 활동에 대하여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짬짬이 쓴 시를 아내한테만 보여주었는데 아내가 자랑 삼아 친구들에게 공개하자 아내의 친구들이 등단을 권유하게 되었고, 제가 망설이자 제 몰래 '영남문학' 신인문학상에 응모한 것이 당선되어 65세에 늦깎이 등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문학시선작가협회 고문, 영남문학예술인협회 상임부이사장직을 맡고 있으며 한국문인협회와 영축문학회 회원이기도 합니다. 2018년 윤동주탄생100주년기념 문학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같은 해에 대구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수상, 작년에는 영남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첫 시집 '자화상'을 작년 봄에 칠순을 맞이하며 발간하였으며, 고희 기념으로 수필집 '아파봐야 세상이 제대로 보인다' 가 올 10월 중순에 발간 예정입니다.

- 첫시집은 어떤 내용입니까?

▶ 부끄러운 자전적 이야기와 시에 대한 열정, 연수의 그리움과 정애, 비움에 대한 철학, 노블레스 오브리주에 관한 이야기 등이며 미흡하기 짝이 없는 글이지만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스스로 위로하며 북풍한설 거센 비바람에도 아랑곳없이 앙상한 팔다리로 끝없이 뻗어가는 담쟁이처럼 살고자 하는 각오를 다지는 내용입니다.

-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척추를 다쳤을 때 집이 너무나 가난하여 치료시기를 늦추었던 일, 입원 당시 치료비가 전무하여 수술이 성공하면 치료비 일체는 무료로 하되 만약에 실패해서 죽게 되면 시신은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해부실습용으로 기증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했었다는 사실을 안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 향후 활동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아들에게 진료의 상당부분을 맡기고 작가로서의 수업을 제대로 해 볼 각오입니다. 미루고 미루었던 문학평론 공부는 물론 시와 수필에 대한 심도있는 작업을 해볼 작정입니다. 무엇보다도 늘 내 영혼이 깨어있기를 바라며, 계속해서 그늘진 곳도 살피겠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등한시했던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원장님의 평소 생활 철학이나 인생관에 대하여 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진료실에서는 빈래희귀(嚬來喜歸), 찡그리며 내원한 환우에게 웃으며 돌아갈 수 있게 하자. 평생 신조인 Laborare est Orare(라보라레 에스트 오라레), 일하듯 기도하며, 기도하듯 일하자. 최선을 다해 거짓이 없으며, 성실하게 살자. 그리고 항상 감사하며 겸손하게 살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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