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쑤! 우리 가락 좋을시고~" 명창(名唱) 김학영 씨
"얼쑤! 우리 가락 좋을시고~" 명창(名唱) 김학영 씨
  • 권오섭 기자
  • 승인 2020.10.06 10:00
  • 댓글 2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3세 입문(入門) 5년 만에 명창 반열에
내성적에서 쾌할 적극적 성격으로
열심히 봉사, 평생현역으로 우리소리 정통을 이어가는 국악인으로 노력
경창모습. 김학영 씨 제공
김학영 씨가 경창에 참가하고 있다. 김학영 씨 제공

“우리소리를 시작한지 5년 만에 명창부에 출전한 것도 큰 영광입니다. 그런데 본선에서 동상을 받아 개인적으로는 큰 꿈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지도해주신 최은회 명창 님. 최영숙 문화재 님 그리고 지금의 스승님께 수상의 영광을 모두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53세의 늦깎이로 우리소리를 시작, 5년 만에 명창의 반열에 우뚝 선 직장인 김학영(58·KB금융그룹·대구 북구 동변로) 씨. 김 씨는 지난달 26일 대구달성문화회관에서 열린 ‘최계란 명창 대구아리랑 경창대회’에서 긴 아리랑으로 명창부 동상 수상의 영예을 안았다.

김 씨는 “이날 감기몸살로 한 키를 내려 목소리의 청아함이 부족했던 점이 아쉬웠다”며 “명창부 입상이니 어디서든 명창이라 소개받을 수 있어 더없는 큰 상이다.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가 지나고 즐겁고 행복한 모습으로 뵙기를 바란다”고 기원했다.

고향이 안동(경북 안동시 풍천면 금계리)인 시골소년 시절, 김 씨는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부터 동네 풍물패 소리가 들리면 어김없기 뛰어나가 구경했다. 상쇠가 쉬기라도 하면 꽹과리를 한 번이라도 치고 싶어 하루 종일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또한 봄 화전놀이하는 날 어른들이 준 막걸리를 마시고 모내기한 논에 넘어져 온몸이 진흙 범벅이 되어 가족들에게 꾸중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초·중등학교 시절 일반 대중가요나 팝송 대신 김영임, 최창남 선생의 민요 카세트테이프를 즐겨들어 음악취향도 남달랐다.

김 씨가 체계적으로 우리소리를 마주한 것은 53세 때이다. 고향인 안동에서 근무하던 중 최창남, 안비취 선생의 수제자인 최은회 명창이 안동에서 민요학원을 차려 놓고 후진들을 양성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 걸음에 달려가 제자로 받아주기를 간청했고 2년 여 경기민요의 매력에 푹 빠졌다.

김 씨는 안동탈춤축제 특별무대, 매년 봄 창작무대, 각종 국악행사에 출연하는 유명 명창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명창소리를 들으며 초청 국악인으로 출연해보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고 한다.

경기민요의 매력에 푹 빠질 즈음 지난 2016년 서울 강남 본사로 인사이동 되어 주중에는 직장생활, 주말에는 가족들이 있는 대구를 오가며 우리소리와는 다소 먼 생활을 이어갔지만 끈을 놓지는 않았다.

그해 첫 출전한 상주 전국민요경창대회에서 신인부 장려상을 수상한 김 씨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최은회 명창의 소개로 2018년 여름 안비취, 최창남 선생께 동문수학한 최영숙 선생을 소개받았다.

백영춘 인간문화재와 최영숙 선생께 경기민요와 또 다른 서도민요인 산타령, 장대장타령 등을 사사했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백영춘 선생이 숙환으로 돌아가시어 배울 기회가 적었다는 것이 매우 아쉬웠다.

김 씨의 소리가 조금 안정되고 최영숙 선생의 서울시 인간문화재 기념공연을 준비하던 중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겨 가족이 있는 대구로 급히 내려오게 되었다. 최 선생은 목이 좋으니 절대 꿈을 잊지 말고 정진하라고 당부했다.

김 씨는 2019년 경창대회 일반부에 출전하면서 서울생활 중 최영숙 선생 발표회에서 한 번씩 보던 인간문화재 이춘희 선생을 심사위원으로 만났다. 이 심사위원은 목소리는 참 좋은데 안정적이지 않으니 12잡가를 배워보라고 충고했다. 민요와는 또 다른 12잡가, 그 중에 가장 어렵고 힘들다는 유산가를 비롯하여 제비가, 선유가를 배우는데 1년이 훌쩍 지나갔다.

김 씨는 “목소리가 안정적이고 점차 구성지게 바뀌고 있으니 명창부 출전을 해보라고 권유 받았을 때 우리소리 인생 중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김 씨는 지금 12잡가에 정진 중이다. 첫 번째 목표는 12잡가 완창이고 다음 목표는 12잡가로 인정받는 것이다.

김 씨는 “우리소리를 시작할 때 마음 속으로 다짐한 게 있다. 언제 어디서든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는 국악인이라는 소리를 둗는 게 꿈이자 목표이다”며, “지금까지 어렵고 힘들 때 개인적으로 가장 큰 함이 된 우리소리의 맥을 잇기 위해 더 열심히 배우고 정진하여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봉사도 열심히 할 계획이다”고 마지막 포부를 밝혔다.

경창대회 수상자와 대회관계자. 김학영 씨 제공
경창대회 수상자와 대회관계자. 김학영 씨 제공

2016년 상주대회 신인부 장려상 수상 이후 4년 만에 명창부 동상 수상으로 명창 반열에 오른 김학영 씨에게 궁금한 것을 알아본다.

-50세가 넘어서 우리소리를 시작했는데 우리소리만의 매력은?

▶요즘 미스트롯. 미스터 트롯 경연대회에서 상위 입상한 사람들이 우리소리를 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저에게 우리소리를 한 번 배워보겠다고 물어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너무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역의 고저와 길이가 가요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라서 무엇보다 스트레스 해소에 최고입니다. 그리고 어디에 가도 저는 스타입니다. 술자리에서는 권주가로 시작합니다. 그 이후에 모두들 저를 기억합니다.

-시작할 때 가족들의 반대는?

▶반대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소리를 하고 저의 성격이 쾌활하고 긍정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공연이나 대회가 있는 날은 가족과 동행해 맛있는 식사도 하고 흥겨운 공연도 보니 여행 가는 기분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서울생활 중 대구에서 안동공연을 위해 일요일 연습 가는 것을 서운해 하긴 했습니다. 그럴 때는 장인장모님까지 초청해서 최고의 음식으로 대접하며 미안함을 표현하곤 했습니다.

-많은 유명선생님들을 모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긍심이 크시겠어요.

▶정말 운 좋게도 소리로나 인격적으로도 최고의 명창님들을 모셨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세 분의 계보가 같습니다. 안비취, 최창남 문화재의 수제자들입니다. 친한 친구 분들이라 어려울 때마다 소개해 주셔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경기민요, 서도민요, 12잡가 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어 저만큼 행운아는 없을 겁니다. 그분들의 공연에 동참하면서 무대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었고 저 나름대로의 자긍심으로 동문회, 성당 음악회, 친구 부모님 팔순잔치 등 기회 있을 때마다 공연활동뿐만이 아니라 봉사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느 자리이든 제가 있으면 즐겁고 행복해지는 우리소리를 통한 행복전도사가 되는 게 꿈입니다. 힘들게 배운 12잡가로 대회에 참가하고 경기민요 이수자(履修者) 시험에 응시해 보고 싶습니다. 이수자 시험은 명창대회보다 더 어렵고 절차가 까다롭지만 열심히 정진하면 반드시 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장퇴직 후에는 열심히 봉사하여 평생 현역이 되고 지역에서 우리소리의 전통을 이어가는 국악인이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겠습니다.

※경기민요의 12잡가(十二雜歌)-①유산가(遊山歌) ②적벽가(赤壁歌) ③제비가(燕子歌) ④소춘향가(小春香歌) ⑤집장가(執杖歌. 집장 사령) ⑥형장가(刑杖歌) ⑦평양가(平孃歌) ⑧선유가(船遊歌) ⑨ 출인가(出引歌) ⑩십장가(十杖歌) ⑪방물가(房物歌) ⑫달거리(月齢歌)이다. 이들 12잡가의 음악의 특징은 4분의 6박자인 도드리 장단이 대부분이며, 형식은 약간 불투명한 유절(마루) 형식으로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직설적 표현이 많다. 서울ㆍ경기도를 중심으로 충청 북부와 강원 일부 지역까지 애창돼 중부 지방 민요로도 불린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