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지역에는 옛날부터 구전으로 전해져 오는 전설이 많이 있다. 전설과 관련된 물적 증거가 있는 경우에 그 전설은 신비성이 더 높다고 하겠다.
전설은 오랜 세월 민초들의 삶속에서 야사나 설화로 전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수 많은 전설 중에 그냥 흘려보내는 것도 있겠지만 예사롭지 않은 이야기는 우리가 잘 보존 계승하여야 할 소중한 자연문화유산이라고 본다.
전설을 찾아서 떠나는 문화유산 답사, 신비하고 물적 증거가 완벽하며 아기를 점지해 준다는 삼신(三神)할머니 바위를 찾아가 본다.
◆ 예천읍 상동리 연화봉(蓮花峰) 황새알바위
예천읍 상동리(上洞里) 208-1번지 소재 상봉재(相峰嶺)지나 연화봉(蓮花峰 121m)으로부터 동북방향에 있는 알바위는 황새가 마치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飛鳥抱卵)’하여 황새바우 또는 알바위로 부르고 있다.
옛날 이 곳에는 황새들이 많이 날아들었다고 하며 일대가 거대한 연못이었을 때 연화봉(蓮花峰)의 모양은 연꽃봉오리처럼 묘하게 생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이 산의 뒤편 지내리 쪽에 자리하고 있는 안동 權씨의 묘는 풍수지리사상으로 볼때 연화부수(蓮花浮水) 같다고 해서 연화봉(蓮花峰)으로 불리우고 있다.
연화봉이 있는 산을 장군산(將軍山)이라고도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임진왜란때 명나라장수 이여송이 산의 정기를 끊으려 정상 부근에 창을 깊숙이 꽂자 붉은 피가 솟구쳤다고 전해진다. 이는 산의 정기를 받은 장군(將軍)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원래 연화봉(蓮花峰)은 1560년경 건너편 봉우리(도장골산, 청미산)와 높은 뚝으로 연결되었다고 전해지며 뚝안은 거대한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1730년경 여름에 큰 홍수로 못둑이 붕괴되어 평지가 됨에 따라 차차 농경지로 변모하여 갔다. 그 당시 상동리에 살던 안동 김이성(金履成)이 이주하여 현재의 마을을 이루었고 못 안에 사는 마을이라 하여 지내(池內)라 이름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알바위에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이 이곳에 와서 정성껏 빌면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높이가 약 5m가 되는 알바위를 밑에서 바라보면 여자가 가랑이를 벌리고 앉아서 아기를 낳는 형상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의 흥미와 염원(念願)을 끌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하겠다.
지금도 황새알바위 밑에는 누군가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제단같은 것을 가져다 놓았으며 황새의 깃털과 분비물을 닮은 이물질 등이 떨어져 있어 황새의 서식 여부와 관련하여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다.
현재 황새바우 밑은 약30여 미터의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인 1940년경 상동마을 앞 서정자들에서 한천 제방을 축재하려고 토석채취와 암반 등의 무단 반출로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주변에는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일부 남아 있어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상동리 주민 정동수(93세)씨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 어느 장수가 바위를 들어서 이 산에 옮겨 놓았는데 형상이 솥과 비슷하다 하여 ‘솥바위’라고도 불려지고 있다. 이 마을사람들은 어릴 적 놀이터 삼아 알바위 밑 구멍속을 통과하기도 했으며 인근 주민들이 황새바위에서 아이를 낳게 해달라며 소원을 빌었다고 했다.
현재 연화봉은 인근 주민들은 운동을 위해 가끔 등산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 알바위 주변은 잡목으로 둘러쌓여 잘 보이지 않아 주변정리가 필요한 실정이다. 따라서 주민들은 연화봉 등산로를 재정비하여 누구나 편하게 다니길 원하며 옛날부터 신성시 해왔던 황새알바위에 대한 유래와 소개를 위한 안내판 등을 설치하여 소중한 자연문화유산으로 보존,관리 해줄 것을 바라고 있다.
◆ 감천면 마촌리 말뚝바위(男根石)와 암바위(女根石)
예천군 감천면 마촌리 말골 뒷산(속칭 달마산, 감천면 마촌리 산 23)에는 선사시대(先史時代) 고인돌로 추정되는 남근(男根石) 모양의 말뚝바위 3개가 있다. 맞은 편 150m 지점에는 여자를 상징(象徵)하는 암바위(女根石-玉根石) 한 개가 마주하고 서 있어서 조화를 이룬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달마산 정상에 암자(庵子)가 있었는데 그 옆에는 수백년 된 노송(老松)이 한 그루 있었다. 어느 날 한양(漢陽)으로 과거(科擧)를 보러가던 선비가 암자에 잠시 쉬기 위하여 말을 소나무에 매어 두었다가 말방울이 소나무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 과거를 보러 가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자식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 달마산 말뚝바위에 소원을 빌면 자식을 가질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와 인근(隣近)의 사람들이 많이 찾아 왔다고 전해져 온다.
남근석을 마주한 건너편 산의 암바위 앞에는 나무나 풀이 가려져 있을 경우는 불이 나지 않았으나 앞에 아무 것도 가려지지 않으면 산불이나 집에 불이 많이 났다고 했다. 그래서 마을 주민(住民)들은 암바위가 가려져 있지 않을 때는 나무, 나뭇잎, 볏짚 등으로 가려서 화재(火災)가 나는 것을 방지(防止)했다고 한다.
현장실사를 한 결과 말뚝바위는 높이가 4m 정도 되는 큰바위 3개와 작은 바위 4개 등으로 되어 있는데 말뚝바위 귀두 부분은 영락없는 남근(男根)을 상징하고 있다. 이 바위들은 신기하게도 모두 여근석 방향으로 약간 치우쳐 위용을 자랑하듯 당당하게 솟아 있는 것이 특징으로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듯 했다.
암바위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그 위치를 잘 찾지 못할 정도로 수풀에 가려져 있으며, 바위전체가 높이는 약 10여 미터이며 둘레가 30여 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여근석은 실제 규모가 엄청난 것에 놀라며 자세히 보면 여자의 자궁을 닮은 듯해서 참으로 신기하다. 바위는 뒷편이 높은 산으로 가려져 있고 동북방향으로 어둡고 습한 것이 한눈에 봐도 강한 음기가 내뿜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여근석이 크고 음기가 세다보니 강한 음기를 눌러야 하기에 건너편 남근석은 여러 개로 무리를 이루는 것 같았다. 실제로 현장 실사 날 여근석에서는 많은 물이 흘러내리며 추위에 얼어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현재 여근석 주변은 많은 잡목으로 우거져 있어 바위의 실체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고 하겠다. 또한 남근석에 비해 여근석은 진입로가 없어 접근이 쉽지 않았다.
말뚝바위와 암바위가 지척에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형상은 완벽한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기에 옛날부터 민초들은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빌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달마산의 남근석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시선을 끌며 신비감을 주기에 소원을 빈 듯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달마산은 장산2리(말골)로 들어가는 진입도로 우측에 있는 산으로 도로에서도 말뚝바위가 바라다 보인다.
옛날부터 민간에서는 성석(性石) 앞에서 아이 낳기를 기원하는 신앙행위가 많이 이루어졌다.
어떤 종류의 동식물 또는 자연물을 숭배하는 신앙을 토테미즘이라고 하는데 이 토템신앙은 가장 오래된 신앙이다. 종교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종교를 믿는 것은 마음의 안정을 얻고자 함일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대상으로 여기는 종교의 대상물은 다양하다.
이는 살아가는 환경과 문화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토템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민간에서 숭배의 대상이었고 그것이 자연물이라고 해서 터부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음양’ 성석(性石)은 인간의 성문화를 반영하고 있으며 바위에 행해지는 종교적, 주술적 의례들은 소원을 비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내지만 대체로 아이 낳기를 기원하거나 풍요를 기원하며 마을의 보호를 원하기도 한다.
전설로 전해져 오는 성(性)문화 중 ‘아이를 점지해 주는 바위’는 전국에 여러 곳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성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이혼할 수 있다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이 있을 정도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성들은 아이(男子)를 낳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한다.
최근 들어 문화원형을 유지하면서 전승설화, 일화, 민담, 전설을 소재로 재미와 감동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스토리텔링 관광상품 개발에 주력하는 지자체가 많이 늘어나고 있다.
예천 지역에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성(性)관련 자연물(自然物)이 있다는 것은 관광 상품의 소재로 활용할 가치가 높다고 본다. 예천군에서는 구전으로 전해져오는 이야기들을 스토리텔링으로 재구성해 자연문화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