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㉝더도 덜도 말고 오늘 같기를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㉝더도 덜도 말고 오늘 같기를
  • 정재용 (엘레오스) 기자
  • 승인 2020.09.2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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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팔월대보름, 중추절로 불리던 추석
설날과 더불어 민족최대의 명절

추석맞이는 창호지 새로 바르고 도배장판 다시 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들판은 세 벌 논매기를 마치고 도사리 줍는 것으로 진인사(盡人事)하고 가을볕에 낟알이 잘 영글기를 바라는 대천명(待天命)으로 들어갔다. 농부들이 이른 봄부터 삼곳(삼을 삶는 가마) 같은 여름을 고된 노동 가운데도 견딜 수 있는 것은 머잖아 서늘한 바람이 불고 황금빛 벌판으로 변할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 길목의 초입에 추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도 덜도 말고 오늘만 같기를’바라는 바로 그날이었다.

1983년 가을, 마을의 서쪽 농로, 그해 가을은 풍년이었다. 농로 끝 멀리 옥산서원이 있는 도덕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1983년 가을, 마을의 서쪽 농로, 그해 가을은 풍년이었다. 농로 끝 멀리 옥산서원이 있는 도덕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농부는 돌쩌귀에서 문을 빼내 문살에 묻은 묵은 때를 씻어내고 문종이를 새로 발랐다. 사방연속무늬 도배지를 바를 때는 무늬를 연속시키는 게 포인트였다. 서까래 바르기가 가장 힘들었다. 장판은 벼가 익었을 때의 황금색이었다. 창호지로 초벌을 바르고 그 위에 두꺼운 장판지를 발랐다. 장판지를 흔히‘도깔포대기’라고 불렀다. 돌가루포대에서 온 말로 시멘트가루를 돌가루라고 했다. 당시 시멘트포대는 갈색의 두꺼운 종이 두 겹으로 돼 있었다. 장판지의 색깔이나 두께와 재질이 시멘트포대와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장판지를 발라 놓고는 그 위에 콩기름 칠을 서너 번했다. 그래야 물을 흘려도 스며들지 않고 질겨서 오래갔다. 생콩을 갈아서 삼베주머니에 넣고 그 물을 바닥에 문질렀는데 이를 ‘콩데미 칠’이라고 했다. 방안에 들어서면 구수한 콩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창호지를 통해 들어온 가을햇살이 샛노란 장판 위에 먼저 누웠다.

농부는 농비(農費)에 쓸 돈도 빡빡한데 자녀 다섯의 추석 치장(빔)해 줄 것을 생각을 하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없는 살림이지만 명절이 명절인 만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어느 가축을 얼마만큼 내다팔까, 미꾸라지는 통발을 댈까 반두로 잡을까, 쌀을 당겨서 낼까 고민하다가 닭 서너 마리를 팔고 쌀 두어 가마니를 내기로 했다. 추수해서 찧는 대로 바로 내기로 하고 선금을 받는 것이었다. 너도나도 낼 때라서 쌀값이 바닥이었으나 도리가 없었다. 소평마을 사람들은 거의가 ‘안강정미소’와 ‘북부리정미소’ 둘 중 하나를 이용했다.

시장은 추석을 앞둔 한 달여부터 대목장 분위기가 돌았다. 4일, 9일 안강 장날이면 경주, 영천, 포항, 기계에서 장사꾼들이 아카데미극장 뒤쪽 시장터에 전을 차렸다. 그리고 기계, 기북, 양동, 유금, 왕신, 사방, 곤실, 삽실, 하곡, 옥산, 육통, 노당 등 주민들이 농산물과 집짐승을 갖고 나와 난전을 벌였다. 이때면 우시장(牛市場)도 활발했는데 소전(牛廛)은 사거리에서 북부리 방향으로 가다가 왼쪽, 안강정미소 맞은편에 있었다. 그 후 나무전 옆으로 옮겼다가 사라졌다. 나무전은 시장터의 서편에 있었는데, 지금은 나무전이나 소전이 있었다는 것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다. 대목장은 포항이 가까워 해산물이 풍부하고 햇곡식, 햇과일, 버섯, 채소 등 반찬거리가 넘쳐났다.

농부는 자녀들의 옷과 운동화를 샀다. 따지고 보면 어차피 사 줄 옷을 추석 때 사 주는 것에 불과했다. 운동화도 벌써부터 너덜거려서 새로 사줄 때가 됐다. 추석에 임박해서는 돔배기(상어고기), 고등어, 오징어, 미역 등 해산물과 추석날 아침에 국으로 끓여먹을 쇠고기도 큰맘 먹고 샀다. 차례를 지내는 집은 제사상 준비에 많은 돈이 들었으나 믿는 사람은 가정예배를 드리니 그 걱정은 안 해도 됐다. 추석날 아침은 대소가 모두 큰댁에 모여서 함께 차례를 지내고 아침식사를 했다.

시장입구에 있는 ‘안강극장’과 ‘아카데미극장’에서는 추석특선프로 시네마스코프 영화간판이 걸리고 텔레비전은 ‘설’이 들으면 섭섭할 정도로 “연중 최대 명절을 맞이하여”라는 말을 계속했다. 매년 천하장사 씨름대회를 중계했다. 모곡제(耗穀制)로 하는 이발은 단대목에 가면 욕을 얻어먹기 때문에 일주일 정도 빨리 가서 깎아야 했다. ‘북부리이발소’였다.

추석 전날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아이들은 숟가락으로 호박을 긁고 어머니는 호박떡을 굽고 풋고추를 넣은 부추전을 구웠다. 호박은 호박전이라 하지 않고 호박떡이고 불렀다. 마당 한쪽에 마련한 바깥부엌에 무쇠 솥 뚜껑을 뒤집어 걸고 굽거나 솥에 그냥 구웠다. 솥뚜껑을 들깨기름칠로 반들반들하게 윤을 내놓은 것이 아까워서였다. 무쇠 솥을 ‘참 솥’이라고 불렀다. 누렁호박 꼭지로 만든 손잡이로 난두(산초)기름을 두르고 전을 구우면 구수한 냄새가 담을 넘었다. 아이들은 평상에 앉아 송편 빚었다. 귀한 음식이 한꺼번에 쏟아지니 ‘더도 덜도 말고’라는 말이 나올 법도 했다.

마을 앞길은 객지에 직장 따라 나갔다가 오는 자녀와 마중 나온 가족들로 붐볐다. 양손은 선물꾸러미로 무거웠다. 택시로 바퀴가 일으키는 먼지를 거느리며 오는 사람도 있고 대부분은 기계 가는 도로에서 마을 입구에 내려 걸어서 들어왔다. 한복 치마가 흙에 끌리고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더위로 연신 땀을 훔쳤으나 얼굴은 함박웃음이었다. 할머니는 자녀들이 말리고 손자도 걸어서 가겠다했으나 막무가내였다. 구부정한 허리에 손자를 들쳐 업고 신이 나서 걸었다.

추석날은 하루 종일 먹는 게 일이었다. 배탈이 나서 화장실에 다녀와서는 또 먹었다. 자전거로 설사약 사러‘회춘당약방’가는 사람들이 꼬리를 물었다. 술 취한 농부는 갈지 자(之) 걸음을 걷고, 청춘남녀는 영화 보러 읍내로 몰려나가고, 아이들은 놀이를 하느라 골목길을 내달렸다. 개들도 따라서 달렸다. 산들바람에 누렇게 익은 들판의 벼들이 파도타기를 하고 허수아비는 어깨춤을 췄다. 참새 떼가 이 논 저 논으로 우르르 몰려다녔다.

서쪽에서 본 소평마을, 멀리 양동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서쪽에서 본 소평마을, 멀리 양동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하이라이트는 보름달이 뜰 때였다. 여느 아낙들은 달을 향해 쉴 새 없이 정성스럽게 절을 하고, 풍물꾼들은 미뿌랑 공터에서 풍악을 울렸다. 달이 중천에 떠오를 때면 풍악소리도 사위고 분주했던 추석도 그렇게 저물어갔다. 어느 해 추석, 학봉댁 마당에서는 김석봉, 김형곤, 김형태 씨 등이 지게 작대기를 들고 군대생활을 더듬어가며 M1 총검술 36개 동작과 제식훈련 재현 쇼를 벌였다. 한손으로 총을 돌리는데서 작대기를 자꾸 떨어뜨리는 것만 빼면 옛날 솜씨가 살아있는 셈이었다.

밝은 달빛이 보릿짚 볏가리 위에 부셔지고 귀뚜라미와 풀벌레가 저물어가는 추석이 아쉽다고 울어댔다. 이따금씩 잿간에서 자던 닭들이 홰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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