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악의 평범성
[인문의 창] 악의 평범성
  • 장기성 기자
  • 승인 2019.03.13 08:21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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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1906-1962)이란 이름만 들어도 전율과 소름이 돋는다. 독일 나치 친위대 장교(대령)였던 그는 6백만 명의 유대인학살을 총괄했다. 더욱이 1940년 1월부터 1941년 8월까지 독일 여러 병원에 수용되어있던 지체장애인과 정신장애인 27만 5천명을 잔인하고 참혹하게 죽였다. 유전학적으로 볼 때 장애가 독일인에게 우성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는 패망(1945년) 후 독일을 떠나 남미의 아르헨티나로 피신하여 가족과 함께 가명을 써가며 15년간 숨어 지내다가, 1960년 5월 11일 이스라엘 비밀경찰 모사드에 의해 체포된 지 9일 만에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압송되었다. 아이히만은 체포된 이듬해인 1961년 4월에 예루살렘 법정에서 전범재판을 받았으며, 그해 12월 사형이 선고되었고, 이듬해 1962년 5월 31일 자정에 교수형에 처해지게 되는데, 그날의 현장모습이 참으로 이채롭고 기이하다.

아이히만은 아주 근엄한 자태로 교수대로 향해 걸어갔다. 그는 붉은 포도주 한 병을 요구했고, 그 절반을 마셨다. 그는 마지막으로 개신교 목사가 성서를 읽어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했다. 앞으로 두 시간밖에 살 수 없기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자신의 감방에서 형장에 이르는 50미터를 조용히 그리고 꼿꼿이 걸어갔다.

간수들이 교수대 앞에서 발목과 무릎을 묶자, 자신이 똑바로 설 수 있도록 느슨하게 묶어달라고 요청했다. 교수대 앞에서 검은색 두건을 머리에 쓰겠냐고 물었을 때, ‘ 필요 없습니다.’라고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으며, 한 점의 흐트러짐 없이 당당하고 여유있는 자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 모두는 (천당에서)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 직전에도 자신만만했다. 재판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지켜보았던 독일 출생 유대인 여성철학자 아렌트(1906-1975)는 자신이 직적 목격한 광경과 생각을 엮어 출판한 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이다. 이 책에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냈던 아이히만의 얼굴을 처음 본 아렌트는 “악의 얼굴이 이토록 평범하다니”라고 말하며 그때의 전율을 이 책에 또렷이 기록하고 있다.

아이히만은 평소엔 매우 착한 사람이었으며, 개인적 관계에서도 매우 도덕적 사람이었다. 법정에서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의 수행과정에서 어떤 잘못도 느끼지 못했고, 자신이 받은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이 책에 썼다.

실제로 예루살렘 감옥에서, 어느 간수는 교수형을 앞둔 그 사형수가 혹시 불안과 초조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리적 안정을 주기 위해 소설책 한권을 전해주었다. 그 소설은 어린 소녀에게 성폭행을 가한 중년 남자의 성애를 다룬 책이었다. 아마도 그 간수는 아이히만 같은 희대의 살인마는 평범한 내용의 책이 아니라, 약간은 도착적이고 짜릿한 무엇인가를 즐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반대로 아이히만은 그 책을 간수에게 비웃듯 돌려주면서 ‘아주 비윤리적 책’이라며 불쾌한 심경을 보였다.

나치에 협조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그는 성실히 일하면서 승진을 꿈꾸는 평범한 독일인이었고, 그냥 평생 조직에서 명령하는 대로 열심히 자신에게 부여된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수용소에서 일과가 끝나면,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며 가족과 저녁시간을 함께 보낸 평범한 남자였다. 국가에서 시키는 대로 유대인들에게 소집통지서를 성심껏 전달했고,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실어 나를 기차의 운행시간과 배차간격을 조정하느라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들 모두는 매일 성실히 근무하며 살아온 죄밖에 없어 보였다. 오히려 관료사회의 믿음직한 구성원으로 집단의 원리에 충실했던 것이 죄가 되는지 항변했을 정도로 느꼈으니 말이다.

아이히만이 재판정에 섰을 때 세계 언론은 ‘인간의 얼굴을 한 악마’를 보기 위해 열띤 취재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에게서 ‘괴물’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한 그의 모습에 아연실색하였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끔찍이 아끼는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재판관:“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나”라는 엄중한 심문에 그는 간단 명료하게 대답했다.

-아이히만:“나는 나치친위대 장교로서 상부의 명령을 받고 청소했을 뿐이다. 나는 죄가 없다. 군인의 신분으로서 국가에 충성한 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재판관: “당신은 당신의 죄를 인정하나?”

-아이히만: “도대체 무엇을 인정하란 말인가? 나의 열성 덕분에 우리 조직은 시간낭비 없이 이 모든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었다.”

 

살인은 그저 단순한 업무였다는 것이다.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그녀는 너무나 평범한 악의 실체에 충격을 받아 집필한 책에서, 이것을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 불렀다. 누구든 악마가 될 수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한걸음 더 나아가, 아렌트는 이 책에서,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저 상부의 명령만을 따랐으므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아주 근면했고 무능하지도 않았다.”라고 썼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부여된 집단의 일만 숙지했고 그 집단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집단은 늘 선(善)이기에 그에게는 숙고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전 생애를 칸트의 실천이성에 따라 살아왔고, 집단이라는 톱니바퀴의 작은 톱니가 되어서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근면하게 수행할 뿐 이었다. 유대인, 말하자면 타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성찰하지 못했기에, 아렌트는 이러한 상태를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혹은 ‘사유능력의 부족’이라 불렀다. 그런 삶 자체가 악한 것임을 지적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살았기에 아무 생각 없이 명령에 따랐고, 그 결과 엄청난 비극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몰고 간 것은 그가 아니라, 철저한 ‘무사유’였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품‘사랑의 기술’을 썼던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1900-1980)은 "아이히만은 관료의 극단적인 본보기다. 그는 수십만의 유대인들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들을 죽였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서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견해를 거들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거대한 국가권력과 자본주의의 맹목적 신봉자가 되어, 삶의 모든 척도나 기준을 오직 그곳에 맞추어 사는 것을 절대적 선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성과 반추를 하게 한다. 영혼 없는 거대한 조직이 가지는 충직성과 맹종성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니 말이다.

물론 아렌트가 명명했던 ‘악의 평범성’이란 테제와 아이히만이란 인물에 대한 판단은 당시는 물론이고 최근까지 많은 논쟁과 반론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아이히만이 법정에서 보였던 모습은 모두 연기에 불과했다는 증거들이 다소 나타나기도 했다.

우리 모두는 지금도 어떤 조직에서 사유나 영혼 없이 살고 있지 않은지, 타자의 시선에서 되돌아봐야 할 강한 의무감을 느끼게 된다. 예컨대 자신에겐 한없이 관대한 태도를 취하면서 타자의 고통에 대해서는 무감각과 무사유로 일관하는, 이른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는 자가 결국‘악의 평범성’이 아닐까?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2차 대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이런 말을 했다.“타인을 죽이는 행위를 막기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고 팔짱 낀 채 보고만 있었다면, 그것이 바로 내 자신의 죄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일이 벌어진 뒤에도 아직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죄가 되어 나를 뒤덮는다.”라고 말이다.

이 글은 쓰고 있는 나 자신은 아이히만과 얼마나 다르게 살고 있는가? 오늘따라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문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상철 교수가 말한 ‘집단의 오류’를 다시금 여기서 인용해 본다.“인류역사의 진행과정에서 발생했던 수많은 죽음의 명제를 기억해보라. 신의 이름으로, 국가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되지 않았던가. 악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화려하게 지구 도처에서 피어오르고 있다”

 

김남주가 쓴 ‘어떤 관료’라는 시가 불현듯 떠오른다.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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