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생가를 찾아서
김용택 생가를 찾아서
  • 장희자 기자
  • 승인 2020.09.07 1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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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물소리,바람소리,풀벌레의 말을 들으며
김용택생가는 돌담으로 잘 정비되어 있고, 마당에는 감나무 한 그루와 담장 주변으로 여름꽃들이 잘 가꿔져 있다. 장희자 기자

내 등짝에서는 늘 지린내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업은 누이를 내리면 등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지요
(중략)
어머니는 동이 가득 남실거리는
물동이를 이고 서서 나를 불렀습니다
용태가아, 애기 배 고프겄다
용태가아, 밥 안 묵을래
저 건너 강기슭에
산그늘이 막 닿고 있었습니다
강 건너 밭을 다 갈아엎은 아버지는
그때쯤 쟁기 지고 큰 소를 앞세우고
강을 건너 돌아왔습니다
이 소 받아라
아버지는 땀에 젖은 소 고삐를
내게 건네주었습니다.(이 소 받아라. 김용택)

 김용택의 위 시는 어린시절 동생을 업고 공기놀이나 땅따먹기를 하면서 밭에서 일하시는 부모님을 기다리던,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어린시절의 풍경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우리에게 알렸다. 자연과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자연을 사랑한 섬진강 시인 김용택 생가를 찾았다.

 

생가 뒷편으로 연결되어 있는 현대식건물로 새로 조성된 시인의 살림집으로 잔디와 화단을 잘 조성해 놓았다. 장희자 기자

김용택 생가는 바로 앞에 섬진강 물줄기기 흐르는 전북 임실군 덕치면 장암2길 16번지 진메마을에  있다. 진메라는 말은 마을 앞의 산이 길게 생겼다고 해서 원래는 ‘긴뫼’라고 불리었는데 이것이 점차 변형되면서 진메로 바뀌었다.

진메마을은 전형적인 산촌마을로 마을 입구에 도착하면 거대한 고목 느티나무 2그루가 마을 앞을 지키면서 방문객들을 마중하고 배웅한다. 김용택 생가 바로 앞에 있는 느티나무는 김용택 시인이 27살 때 마을 뒷산 당산나무 아래에 자라는 작은 느티나무를 한 그루 뽑아 집 마당에 심었다고 한다. 모친이 큰 나무를 집 안에 심으면 집이 치인다고 해서 지금의 강변길에 심었다고 한다.

김용택 시인은 이 나무를 소재로 하여 ‘푸른나무’ 제목으로 7편까지 연작을 쓰면서 이 나무를 '시를 쓰는 나무'라고 칭하였으며, 이 나무 아래에는 자연석으로 된 그의  ‘시인과농부’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 나무 옆에도 느티나무 노송이 한 그루 있는데, 이 정자나무는 2007년에 새나 돌에게 상을 주는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으로부터 '제13회 풀꽃상'을 수상했다.

느티나무에서 30m 정도 마을도로를 걸어 들어가면 돌담으로 잘 정비된  한옥집이  김용택 생가이다. 오래된 감나무 한 그루가 마당 한 켠에 서 있다. 생가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 있고 네모난 대리석으로 디딤돌을 만들어 놓았으며 담장밑으로는 여름꽃이 있다.

 생가 건물은  회문제((回文齋)라는 편액이 건물 우측에 걸려 있는데 ‘글이 돌아 오는 집’이라는 뜻으로 한글 민체(民體)의 대가 여태명 교수의 글씨이다.   

한옥 우측에는 현대식 건물로 지은 서재가 있다. 한옥 뒤란 한편에는 아담한 크기의 연못이  있고, 네모난 대리석 디딤돌로 살림집과 연결되어 있다. 살림집은 현대식으로 사방에 꽃이 심겨 있고 한켠에는 장독대가 놓여 있다.

생가 툇마루에서 앞산쪽을 바라본 모습으로, 시인이 심은 느티나무와 태풍때 내린 비로 섬진강 물결이 많이 불어 넘실대고 있다. 장희자 기자

시인은 농사꾼의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순창농고를 졸업한 뒤 직장 생활이 아닌 농사짓는 삶을 꿈꾸었다.  친구 따라 우연히 치르게 된 교원양성소 시험에 합격, 22세에 모교인 덕치초등학교 교사가 됐다. 그는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21인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당시 발표작 중의 하나가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로 시작되는 ‘섬진강’ 이었다. 〈섬진강〉, 〈맑은 날〉, 〈그 여자네 집〉, 〈강같은 세월〉 등의 시집과 〈인생〉, 〈오래된 마을〉,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콩, 너는 죽었다〉 등 여러 권의 산문집과 동시집을 냈다. 김수영문학상(1986년), 소월시문학상(1997년) 윤동주문학상(2012년)등을 수상했다.

그는 자신의 모교이기도 한 덕치초등학교와 인근 분교 평교사로 38년간 봉직한 뒤 2008년 교단을 떠났다. 

 임실군에서 ‘섬진강 벨트사업’ 일환으로 예술가와 작업실을 지원하는 사업을 진행하면서 그가 고향집과 뒤편 땅을 기부채납하고 임실군이 건축비 예산을 지원해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게 되어,  8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시인은 생가가 있는 이곳에서 문학수업을 진행하고 오가는 여행객과 인사를 나누며 작업을 이어간다. 문학수업은 사전 예약제로 운영한다고 한다.

시인이 심은 느티나무(시를쓰는나무) 우측편으로 사인의 한옥생가와 현대식 건물의 살림집과 서재가 함께 보인다. 장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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