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량초등 38회 동기회
진량초등 38회 동기회
  • 방종현 기자
  • 승인 2020.08.3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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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의 산실 진량초등학교

경산은 크게 하양. 자인. 경산 3개 권역을 이루고 있다. 5일 장으로 자인장. 하양장. 경산장 3개 장은 전국적으로 이름이 나 있다. 경산은 학문을 숭상하는 곳으로 하양. 자인. 경산 등 3곳에 있는 향교가 이를 증명한다.

경산지역은 신석기시대 이래 금호강의 지류인 오목천·남천 등의 유역으로 사람의 거주가 많았던 곳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압량(押梁) 또는 압독국(押督國)이라는 국가가 있었다.

진량 초등학교는 경산시 진량읍 낙산길 37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1922년 진량 보통학교로 문을 열고 1923년 진량 공립 보통학교로 개교했다. 1966년 전국 교명 통일로 진량 초등학교로 개칭하고 2020년 94회까지 6천698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지금은 이영희 선생님이 ‘참된 마음 힘찬 기상으로 꿈을 키우는 진량 어린이가 되자’라는 슬로건으로 교장을 맡고 있다.

진량초등학교 전경 동창회제공
진량초등학교 전경 동창회제공

배출한 인물로는 교통부 장관, 재무부 장관을 지내고 제헌의원을 역임한 4선 박해정 국회의원. 서울치대 교수로 있다가 6.25 때 낙향해 진량 중 고교를 설립한 김문조 교장이 있다. 재계에는 전 대구상의 회장과 신라섬유 회장을 역임한 박성형 회장. 장광수 조일산업 회장, 장병국 전 대구컨트리 회장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법조계에는 박승렬 변호사. 김찬돈 대구고법 부장판사 등이, 의료인으로는 안원효, 배광원, 박수식 등이 있다. 학계에는 김만기 카이스트 교수, 채희락 외국어대 교수, 김종훈 서경대 교수, 김대기 포항대 교수, 김순천 달서중고 교장 등이 있고 군 출신으로는 서두효 소장, 서철수 준장 등이 있다.

다음은 진량초등학교 38회 김찬진 전 회장의 소회를 옮긴다.

우리 지역은 남쪽에 토산지가 있으며 토산지 앞에 명품 대구컨트리클럽이 있다. 북쪽에는 도로공사 경북지사가 있고 그 뒤에 우방 아파트가 있다. 아파트 옆 산봉우리가 사직봉(社稷峯)으로 유서 깊은 곳이다.

우리 38회 동기는 6.25 전쟁 중에 태어나 잘 먹지를 못해 체구가 거의 작은 편이다. 학교 앞 토산지에서 나는 말을 채취해 말죽을 자주 끓여 먹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세대는 4.19 혁명, 사라호 태풍, 5.16 군사혁명을 거쳐 1964년 3개 반으로 180명이 졸업했다.

진량초등 38회 졸업 앨범 동창회 제공
진량초등 38회 졸업 앨범 동창회 제공

어려운 가운데도 우리 동기 중에는 채종호 경산시의회 의원, 채종수 경산시 국장, 정현대 HD 철강 회장, 성환이 교장, 배창원 경산시 기술센터 소장, 최재원 전국 복숭아 동호회 회장 등이 있다.

38회 동기들은 이제 70고개를 넘어 황혼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 동기는 일 년에 총동창회 체육대회 참가와 년 2회 모임을 해오고 있다. 모두 건강관리 잘해서 오랫동안 만남이 이루어지기 기원한다.

동기회 좌로부터 배창원.최재원.최종호.김정자.이주태.김찬진 동기회제공
동기회 좌로부터 배창원, 최재원, 최종호, 김정자, 이주태, 김찬진 동기회 제공

우리 학교 교정에는 일제시대 1925년 본교에 부임하신 문택수 선생님이 “말 잔디”라는 노래를 작사, 작곡해 항일 정신을 일깨우신 그 뜻을 기리고자 제자들이 세운 기념비가 있고, 1942년 본교에 부임하신 최명진 선생님께서 1943년 1학년을 담임하시던 중 그 해 7월 9일 체육수업을 마치고 토산지에서 더위를 식히다가 실족한 제자를 구하려다 순직하신 추모비가 서 있다.

나는 경북도청과 경산시청에서 행정국장을 끝으로 공직을 마치고 정년퇴직했다. 퇴직 후 경산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지역을 위해 일해 보고자 경산시장에 출마했으나 내 진심이 전달되지 않았는지 석패를 했다. 지금도 나를 돌아보는 반성의 기회로 삼는다.

지금은 덕암 초당에 모이는 문학 동호인들의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덕암 문우회(悳庵文友會)는 덕암(悳庵) 채형락(蔡瑩洛) 선생님의 유지를 따르는 모임이다.

덕암 선생님이 증조부 낙애공의 문집을 덕암 문우회 이름으로 발간 하자는 뜻에 따라 문집 발간이 시작되었고, 부족한 내가 낙애문집 서문을 쓰는 기회를 얻었다. 낙애공은 조선조 헌종(憲宗) 13년 정미(丁未) (서기 1847년) 10월 16일 아버지 홍한(洪漢)과 어머니 경주 김씨(慶州金氏) 사이에서 태어나셨다. 공의 자(字)는 선여(善汝)요, 호는 낙애(洛涯)이시다.

5살에 글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재주가 뛰어나 경서와 제자 학설에 통달하셨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경술국치 후 삿갓으로 하늘을 가리시고 낙산 효양산 아래에 하락재를 지어 후진양성에 진력하셨다.

하락재 계안(河洛齋鍥案)에 의하면 하양, 자인, 경산, 대구 등지의 제자들과 학연(學緣)을 맺은 분들이 247명이나 되었다.

낙애공은 퇴계,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낙재 서사원 선생의 학맥(學脈)을 이어받았으며 동시대(同時代)에 계셨던 직제(直齊)와 묵암(黙庵)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았다.

나는 직제(直齊)의 후손으로 직제의 제자인 낙애 문집 서문을 쓰니 감회가 새롭다.

김찬진 동기회 전회장
김찬진 동기회 전회장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조셉 토인비는 “장차 한국문화가 인류에 기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모를 공양하는 효(孝) 사상일 것이다.” 라고 했다.

우리나라가 중국, 일본의 칼날 속에서도 살아남아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된 것도 충효(忠孝)의 사상이라 생각되며, 이 충효사상은 앞으로 이루어질 통일한국의 초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