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㉛가뭄은 피를 말리고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㉛가뭄은 피를 말리고
  • 정재용 (엘레오스) 기자
  • 승인 2020.08.24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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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는 벌건 태양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을 헐떡이고
농부는 벤허가 노를 젓듯 반티질을 했다

연중행사처럼 형산강 범람으로 물난리를 겪는 안강 들판에도 때로는 가뭄이 찾아 들었다. ‘칠 년 가뭄에는 살아도 석 달 장마에는 못 산다’는 속담을 마을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장마에 대한 불평이겠지만 가뭄 대한 굳센 의지이기도 할 터였다. 가뭄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애처로웠다. 칠 년은커녕 칠 일만에 논바닥은 갈라지고 농부의 입술은 부르트고 피가 말랐다. 먼 산 위로 떠오르는 구름 한 조각에도 희망을 걸었으나 매번 허사였다.

모내기가 힘들 정도로 가물기도 하고 겨우 모내기를 해 놓았는데 가뭄이 들어 그냥 말라 죽이기도 했다. 그 동안 쏟은 정성과 고생은 헛수고가 되고 들판은 모내기를 다시 하고자 늦모 구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모내기하고 한 주일 정도 지나면 하얀 뿌리가 새로 나오는데 이렇게 활착하는 것을 ‘사람 하다’라고 했다. 사람하고 나면 웬만한 가뭄은 버텨보련만 하늘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김매기를 마친 벼가 가뭄을 탈 때도 마찬가지였다. 작열하는 햇볕에 논물은 소죽통의 물을 소가 들이킬 때처럼 줄어들고, 논바닥이 꾸덕꾸덕해지는가 싶으면 며칠 못 가서 갈라지기 시작했다. 농부는 물 댈 차례를 살피고 확인하느라 하루에도 수차례 봇도랑을 오르내렸다. 순서가 까마득해도 속에 천불이 나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말라가는 논. 정재용 기자
말라가는 논. 정재용 기자

고래전은 딱실못에서 앞거랑을 타고 내려오는 물을 대고, 한들과 모래골은 기계천에서 농수로를 따라 오는 물을 댔다. 양동들 논은 큰거랑의 수문을 내려서 물을 끌어들였다. 수로에 나무판을 가로지르거나 흙으로 둑을 막아 물길을 자기 논으로 돌렸다. 그런데 가뭄으로 물의 원천이 말라가니 방법이 없었다.

물 대는 차례는 ‘며칠간 물길을 지켰는가’순서였다. 제 논보다 높은 데 위치한 논에 대해서는 물 대는 순서를 꿰고 있어야 했다. 만약 늦게 나타난 사람이 먼저 물을 대면 그때는 싸움이 벌어졌다. 말다툼은 몸싸움으로 진행됐다. 물길 막은 흙둑을 헐고, 다시 막고를 몇 차례 반복하다가 급기야 엎드려 있는 사람의 등을 발로 밟아 물에 쳐 넣으면 서로 엉켜 붙어 수로에 뒹굴고 삽을 휘두르기도 했다.

가까이 둠벙(웅덩이)이 있는 집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양동이로 물을 푸거나 남편과 아내 또는 아버지와 아들이 마주 서서 맞두레질로 물을 퍼 올렸다. 물을 담기 위해 나무 상자로 짠 두레를 ‘반티’라고 불렀다. 반티의 네 모서리에 긴 끈을 매어서 두 줄씩 잡고 물을 퍼 올렸다. 이 맞두레질을 마을사람들은 ‘반티질’또는 ‘파래질’이라고 불렀다. 파래란 용두레의 비표준어다. 섬배기 논은 큰거랑 물을 반티질 했다. 더운 날씨에 논둑에 두 다리를 버티고, 세 마지기 논 벼 뿌리가 잠기도록 물을 퍼 올리는 단순하고 반복되는 작업은 노예선으로 팔려간 벤허가 노를 젓는 것만큼이나 죽을 맛이었다.

가뭄이 보름 정도 계속되면 내 논 네 논 할 것 없이 논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갈라진 틈으로 손바닥을 모로 세워 집어넣으면 쑥쑥 들어갔다. 농부는 벌겋게 타들어 가는 벼를 보면서 속을 까맣게 태웠다. “자식 죽어가는 꼴을 보는 것 같다”고 한탄했다. 잠을 설친 두 눈은 퀭하게 들어가고, 입맛을 잃은 입술은 부르트고, 꺼추리한(껄떡한) 얼굴은 웃음을 잃었다.

뉴스는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기우제 소식을 전했다. 안강 지역 기우제는 무릉산, 어래산, 도덕산 정상에서 지냈다. 마을사람들은 손바닥 차양을 치고 언제 어느 산에 연기가 올라가는지 살폈다. “날이 이렇게 가문 것은 뉘가 몰래 어래산 정상에 묘(墓)를 썼거나 ‘깡철이’가 앉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꽝철이’라고 했다. 강철이(鋼鐵이)를 그렇게 불렀는데, 강철이의 사전적 의미는 ‘지나가기만 하면 초목이나 곡식이 다 말라 죽는다고 하는 전설상의 악독한 용(龍)’이다. 교회서는 “엘리야의 제단에 단비를 내리시듯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했다.

태양은 아침에 양동산 위로 뾰족이 얼굴을 내밀 때부터 더위를 뿜어냈다. 소는 태양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숨을 헐떡이고 농부들은 아침밥 먹을 장소를 찾아 멍석을 이리저리 옮겼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서 그나마 있던 서쪽 그늘도 사라져, 농부는 앞뒷문 열린 부엌 뒤턱에 걸터앉아 점심을 먹었다. 찬물에 보리밥 덩이를 말고 반찬은 풋고추와 마늘쪽을 고추장에 찍어먹는 것이었다.

도덕산 너머로 불덩이가 사라지기까지 여름날 낮은 길고 길었다. 강한 햇볕에 논물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갔다. 개구리는 풀숲에 들어가서 숨을 헐떡이고 물방개, 장구애비, 물장군, 게아재비는 개구리밥이나 마름을 덮어쓰고 말라 죽고, 미쳐 큰거랑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는 배를 허옇게 뒤집었다. 논바닥에는 방동사니, 골풀 따위 물풀이 마지막 남은 물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앞공굴 수로. 오른쪽부터 양동산에 이어 멀리 비학산(761.5m) 자락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앞공굴 수로. 오른쪽 양동산에 이어 왼쪽 멀리 비학산(761.5m) 자락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이윽고 물 대는 차례가 돌아와 물을 넣을 때 기쁨은 그 동안의 피로를 말끔하게 씻겨 주었다. 옛 사람은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다. 그날 저녁 농부는 숟가락을 놓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남쪽에서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큰물 날 때 나더라도 당장은 복음이었다. 비는 대부분 도덕산, 무릉산 쪽에서 묻어 왔다. 장대비는 세익스피어의 소설 ‘맥베스’에서 버남숲이 덴시네인 언덕을 넘어 이동하는 것 같았다. 서쪽하늘은 대나무 발로 가린 듯 어두컴컴하고 일제히 바람에 댓잎 부대끼는 소리를 냈다. 농부는 천둥소리를 두고 ‘하늘 높이 살고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부부싸움을 하면서 장롱 부수는 소리’라고 손자에게 일러줬다.

완두콩만한 빗방울이 마당에 탄환처럼 내리 꽂히면서 먼지를 풀썩이더니 곧 바로 놋날처럼 쏟아졌다. 놋날은 돗자리나 가마니 칠 때의 날줄이다. 어디 숨어 있었던지 참개구리들이 몰려 나와서 마당을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청개구리는 호박잎 뒤에 붙어 앉아 노래를 불러댔다. 구슬 같은 빗방울에 등뼈가 부러지거나 배가 터져도 농부는 김동환(1901~?)이 말했듯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할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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