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같은 남자, 조약돌 화가 남학호 씨
돌 같은 남자, 조약돌 화가 남학호 씨
  • 노정희 기자
  • 승인 2020.08.19 17: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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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석당(近石堂), 돌 같은 남자
화백은 버들이와 동거 중
남학호 화백, 화업 40년
조약돌 그림의 게스트, 나비와 하트
남학호 화백. 남 화백 제공

◆돌 같은 남자

지루한 장마가 무겁다. 온몸이 찌뿌둥하고 마음 역시 게을러진다. ‘근석당(近石堂)’을 오르는 계단이 가팔랐다. 접은 우산에 떨어지는 빗물은 계단 아래로 흘러내렸다.

왜 ‘근석당’일까, 화실에 들어서니 ‘아하~’ 하는 탄성이 나온다. 조약돌 그림으로 가득 채워진 화실. 검은 돌, 하얀 돌, 붉은 돌… 햇볕에 달군 돌, 층층 쌓인 돌, 물가에 엎드린 넓적한 돌, 그늘에 웅크린 돌, 물에 젖은 돌… 근석당은 ‘돌을 가까이’ 하는 ‘돌과 함께 하는’ 화가의 집이었다. 문득 돌아본 화가의 모습이 큼직한 돌덩이로 보였다. 화가 자신이 바로 주변에 있는 돌, 돌이었다.

조약돌과 바윗돌 위에는 예외 없이 나비, 그리고 하트 모양이 내려앉았다. 나비는 저기 있는데, 하트는 어디에 있을까, 때론 숨바꼭질하듯 눈을 비비며 찾아야 했다. 날아가는 나비가 아니라 조약돌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자태가 기도하는 듯 수행의 모습으로 비침은 지나친 비약인가. 돌 같은 남자, 남학호(61. 수성구 수성2가) 화백에 대해 궁금증이 밀려왔다.

버들이가 사는 집

◆버들이를 사랑하는 남자

화가는 목청을 높여 얘기하고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그 웃음이 쓸쓸해 보였다. 무언가를 움켜잡은 듯, 그러나 그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가 와르르 퍼부었다.

화실 베란다 쪽에 파란 물풀이 무성한 몇 채의 집이 있었다. 신기해서 바라보는 내게 버들이가 살고 있다고 했다. 버들이는 임신했다가 얼마 전에 출산하여 아기를 키우고 있단다. 버들이의 남편이 누군지는 구태여 알고 싶지 않았다. 단지, 버들이가 잘 지낼 수 있도록 화백은 돌보고 있었다. 외로운 화가는 그동안 버들이와 동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릴 때 읽은 동화 내용이 떠올랐다. 낮에 일하고 들어오면 밥상을 차려놓는 우렁각시. 화가에게도 따뜻한 밥상이 필요한지 모른다. 화가는 애정 어린 눈으로 버들이를 가리켰다. “어항 속에는 귀하고 보기 드문 우리 토종물고기 버들붕어가 살고 있어요. 올해는 이미 부화해서 치어들이 수초 사이에서 놀고 있습니다. 최대한 자연환경을 만들어주려고 물풀 속에서 기릅니다”라며 씩 웃는다. 여기저기 투명한 어항 속 수초 사이에 버들붕어가 졸고 있었다.

◆남학호 화백, 화업 40년

지난달 7월 21~26일 수성아트피아 호반갤러리에서 ‘남학호 화업 40년展’ 초대전이 있었다. 그는 1979년인 20살 때 미술계에 데뷔했다. 한국화로 붓을 들었으나 서양 화법까지 자유롭게 넘나들며 40년 동안 붓을 들고 있다.

대구대학교 미술대학 및 동 대학원 졸업한 그는 한국미협회원으로 대한민국미술대전, 정수미술대전, 대구시미술대전, 경상북도미술대전, 신라미술대전, 개천미술대전, 전국소치미술대전, 대한민국한국화특장전, 김해미술대전 등의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1990~2020년까지 서울, 대구, 부산, 안동 등에서 14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많은 단체전과 미술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신라미술대전, 대구미술대전, 경북미술대전‘초대작가상’을 수상하였다. 작년에 환갑기념 전시회를 열려고 했는데 코로나19로 인하여 미뤄졌다고 한다.

“작년에는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기획한 중견작가 초대전이 있었고, 올해는 코로나19로 시끄러웠는데도 수성아트피아 초대전이 이뤄졌습니다.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합니다. 이제는 아카이브 쪽으로 의미를 두려고 합니다. 내 작품을 원하는 곳이 있으면 기꺼이 응하려고 합니다. 특히 올해를 인생 2막 원년의 해로 삼아 새로운 화가, 남학호로 시작하겠습니다.”

예술적 가치는 여러 갈래의 미묘하고 복잡한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예술은 상상력을 이용해 다양한 가치의 근원들을 탐색하는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조약돌 그림의 게스트, 나비와 하트

남 화가의 조약돌 작품에는 나비와 하트가 등장한다. 십장생의 하나인 돌은 장수를 뜻하며, 하트를 새겨넣어 생명을 불어넣었다. 나비 역시 장수와 행복을 상징한다. 나비는 80년을 살 수 있는데, 조선 시대에는 장수, 신선의 상징물이었다.

 

-조약돌 그림을 그리게 된 연유를 알고 싶습니다.

▶작가 생활 작가 40년 중에 조약돌 그린 지 30년이 되었습니다. 돌을 그리는 것은 고향 환경을 잊지 못하는 그리움입니다. 그 돌은 영덕과 영해의 고향 돌입니다. 동해안의 몽돌, 영해 벌영들과 송천들의 돌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동양화는 먹으로 수십 가지 먹색을 냅니다. 십장생 중 으뜸인 돌을 보면서, 돌의 단색조를 여러 색으로 만들기 위해 물상이 드러나도록 불투명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천사는 날개를 그려 넣고, 도깨비는 뿔을 그려 넣으면 충분히 상징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돌을 돌답게 그리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일상적인 소재를 제대로 표현하기는 힘들거든요. 그러나 작업을 마치고 새 작품을 탄생시켰을 때 감동은 더 크게 다가옵니다. 그동안 풍파를 겪으며 살아온 삶의 여정이 조약돌 작품에 투영되더군요. 자연스러운 변화였습니다. 조약돌에는 추억, 그리움, 고독이 들어있습니다. 조약돌은 나의 신념이자 조형입니다. 내 그림의 키워드는 고향 바다이고, 그림은 바로 자화상입니다.

-조약돌 그림에 이입된 나비와 하트는, 어쩌면 눈에 보여주기 위한 시의적 상징물로 대입시킨 것 같은데요. 나비를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지만, 혹여 진정한 의미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닌지요?

▶조약돌에 그려진 하트는 돌의 심장이지만 결국은 사랑을 말함이지요. 사랑은 거룩합니다. 사랑하는 연인, 사랑하는 가족, 그림에 대한 사랑, 살아온 날에 대한 사랑, 세상살이의 끝은 사랑으로 집결됩니다.

며칠 전이 집사람 기일이었습니다. 떠난 지가 20년이네요. 집사람이 떠난 후 세상이 먹물보다 시커맸습니다. 뭔 재미로 사나, 붓을 들고 있으면 화폭은 하얬으나 세상은 까맸습니다. 우울했습니다. 우울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우울을 포장하려다 보니 그림에 컬러가 들어갔습니다. 남들은 그림이 밝아졌다고 했으나, 실상은 우울한 내용물을 감추고 싶었지요. 그러니까 나비는…….

 

◆남학호를 읽다

더 이상 질문은 그를 아프게 만드는 것이었다. ‘사랑’은 상대방의 부재로 엄청난 고통을 겪을 때만 쓸 수 있는 용어이다. 사랑과 고통은 하나의 패키지라고 하지 않은가. 인생이 뜻대로 되던가, 뜻대로 안 되기 때문에 낙담한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포기하고 또 누군가는 도전한다. 새로운 모험에 나서는 것이다.

오류 없이 남학호를 읽을 수 있을까, 이렇게 넘겨짚기를 하는 것도 어쩌면 그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덧붙이고 싶은 말은 이제는 그만 그가 가면을 벗었으면 싶다. 가면은 약할 때 쓰는 것이다. 화가는 돌처럼 강해져 가고 있다. 울퉁불퉁 모나고 사나웠던 돌이 동그랗게 닳아 조약돌이 되기까지는 무한한 닦음이 있었다. 떠밀리고, 부딪히고 구르면서 상처와 통증을 삭혔을 것이다. 그는 아프고 힘들 때마다 붓을 들었고, 차가운 돌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결코 쉽지 않았을 일이다. 그의 붓 터치는 과거 속에 있으나 그림을 그림으로써 위안을 받은 것이다. 그의 조약돌 그림은 앞으로 만들 또 다른 조약돌 작품의 기반을 마련할 것이다. 그래서 조약돌에는 ‘석심(石心) 생명’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것이다.

“문화를 가꾸는 것은 가까운 사람이 도와야 합니다. 옆에서 물을 줘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화백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이번 환갑기념 전시회에 물심양면 도와준 분들께 고마움을 전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남학호 화백에 의해 재탄생된, 생명을 부여받은 조약돌 그림을 돌아보았다. 세찬 빗물이 화실 창문을 내리칠 때 다글다글 조약돌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조약돌이 웃었는지, 울었는지, 침묵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화가는 웃고 있었으나 기쁜지, 슬픈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렸다. 어쩌면 그 둥근 조약돌은 남학호 화가의 눈물방울이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