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㉚개 팔자가 상팔자?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㉚개 팔자가 상팔자?
  • 정재용 (엘레오스) 기자
  • 승인 2020.08.12 17: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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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많이 낳아 개차반도 풍부했다
소년은 파트랏슈를 떠 올렸다

소평마을에서 개는 소 다음으로 꼽는 가축이었다. 개먹이기는 여러모로 편리해서 집집마다 한두 마리는 기본이었다. 처음은 강아지로 시작했다. 닭 두어 마리 팔면 갓 젖 뗀 강아지 한 마리를 살 수 있고, 아침에 밥찌꺼기 조금 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결하니 키우기 좋았다. 외딴 마을의 치안은 오롯이 개 담당이었다. 낮에는 농사일로 집을 비워 놓고 밤에는 피곤에 지쳐 골아 떨어져도 개가 있으면 든든했다. 그러다가 목돈이 필요하면 시장에 내다 팔고 다시 강아지를 사 들였다. 팔려 간 개 생각에 집안이 텅 빈 것 같았다. 식구 모두가 한 동안 침울했다.

아이들이 ‘점수놀이’로 골목길을 달리면 개는 개들끼리 어울려 뛰어 다녔다. 마을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가장 먼저 발견한 개가 짖고 이어서 개 짖는 소리가 파도타기처럼 마을 전체로 이어졌다. 잔치나 초상이 나면 개 쫓는 게 일이었다.

개 이름은 국어책에 나오는 ‘바둑이’ 대신 외국 이름인 ‘메리’, ‘워리’가 많고 털이 복슬복슬하다고 ‘복실이’, 뿌글뿌글하다고 ‘뿌구리’, 검다고 ‘검둥이’, 누렇다고 ‘누렁이’ 등이었다. 멀리 있는 개를 부를 때는 개 이름과 상관없이 “워~리”라고 불렀다. 그러면 주인의 음색을 아는 개는 부리나케 달려왔다.

아기가 똥을 싸면 개를 불러 대서 먹게 했다. 개가 방안에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개도 이것을 아는지 눈치를 힐금힐금 봐 가면서 주인이 “싹싹”하면서 손바닥으로 두드리는 곳을 정성껏 핥았다. 그래서 ‘똥개’였다. 이때 유의할 점은 절대로 똥 묻은 엉덩이를 개에게 핥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기저귀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소평교회 교우들이 개가 지켜보는 가운데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정재용 기자
소평교회 교우들이 개가 지켜보는 가운데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정재용 기자

마을의 개들은 전부 똥개였다. 농부들이 보리타작으로 모내기로 눈코 뜰 새 없을 때에도 똥개는 동무들끼리 어울려서 마을을 신나게 돌아다니고 날이 더우면 그늘에 누워 하늘을 향해 네 다리를 벌리고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낮잠을 즐겼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온 들판이 그들의 놀이터였다.

그러다가 흘레붙었다. 흘레붙는 시간은 길고 장소는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았다. 엉덩이를 맞대고 머리를 서로 반대방향으로 한 채 가만히 서 있는 개를 향해 아이들은 돌멩이나 흙덩이를 던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돌팔매질을 하듯 쉴 새 없이 던져댔다. 도망가기가 힘들어서 낑낑대던 개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서야 흘레붙기를 풀었다. 그런 일이 있고 두 달쯤 지나면 귀여운 새끼를 낳았다. 눈을 감은 채 태어난 강아지는 보름 정도 지나면서 튼실한 놈부터 차례로 눈을 떴다.

개의 젖꼭지는 열 개였다. 새끼도 거기에 맞춰 낳는 지 보통은 일여덟 마리, 열 마리를 넘지 않았다. 나폴레옹 오버코트의 단추처럼 가슴에서 배까지 2열종대로 달린 젖꼭지를 강아지는 눈을 감고도 잘 찾아 물었다. 힘 센 놈은 두 개를 차지해서 번갈아 물고 약한 놈은 뒤로 밀려났다. 어미 개는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만약 새끼들이 졸졸 따라 다녀도 본체만체한다거나 누워있던 개가 새끼가 다가오자 벌떡 일어나 멀리 가버린다면 젖 뗄 때가 됐다는 증거였다. 보통 한 달쯤 지나면 젖을 뗐다. 농부는 강아지 대부분을 장에 내다 팔았다. 1967년 7월 29일 암캉아지 한 마리 값은 630원이었다. 큰 닭 한 마리 270원, 미꾸라지 한 사발 150원 할 때였다. 안강 장날은 그때도 4일, 9일이었다.

개는 살가운 식구였다. 개는 화낸 표정은 지어도 웃는 표정을 지을 수는 없어서 둥글게 말아 올린 꼬리를 흔드는 것으로 대신했다. 어두운 밤에도, 거리가 멀어도 식구들을 알아보고 꼬리치며 달려 나갔다. 식구들의 기침소리 발자국 소리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한 겨울에 새벽기도 나가는 주인의 기척이 들리면 앓는 소리로 알은체를 했다. 웬만하면 뛰쳐나오련만 추워서 안 나오는 것으로 판단한 농부의 아내는 헌 옷가지 하나를 들고 나와 주둥이를 파묻고 웅크려 있는 개를 덮어주었다. 툇마루 밑에 사과궤짝으로 만든 개집이었다.

5일장 아침, 마을 앞 도로는 곱게 차려 입고 파라솔 들고 걷거나 소달구지를 끌고 시장으로 나서는 사람들로 붐볐다. 개들도 주인을 따라 나섰다. 가만히 두면 시장까지 따라 올 기세여서 개 쫓아 보내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었다. 저마다 가다말고 자기 개를 향해 돌팔매질을 하고, 욕을 하고, 험한 인상을 짓고, 한바탕 부산을 떨었다. 개는 돌아가다가는 다시 따라오고를 반복하다가 앞공굴 너머 한참에서 발길을 돌렸다. 자신이 진정 미워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 줄 아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혼자 집을 지킨 날에는 ‘어디 갔다 이제 오느냐’고 추궁이라도 하듯 발걸음을 옮기기 힘들 정도로 다리 사이를 휘감고, 땅바닥에 이리저리 뒹굴다가, 일어나서는 단거리 육상선수처럼 저만치 달려갔다가 돌아오고,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가슴팍까지 뛰어 올라 두 발을 턱하니 걸치고 혀를 내밀어 얼굴을 핥으려고 할 때도 있었다. “이 놈의 개 왜 이래 야단이냐, 옷 다 버리겠다”농부는 화낸 듯 꾸짖었으나 도리질할 때 얼굴은 웃고 있었다.

목줄 한껏 뛰어 오르는 개. 정재용 기자
목줄 한껏 뛰어 오르는 개. 정재용 기자

강아지가 자라서 큰개가 되면 어미 개는 팔려가기 마련이었다. 개는 개장수를 알아봤다. 여느 때 같으면 낯선 사람이 마당에 들어오면 으르렁거리며 큰 소리로 짖는데 개장수가 들어서자 곧바로 꼬리를 내리고 숨을 곳을 찾았다. 술도가 자전거의 뒤 개장에 실려 마당을 나가기까지 철망 사이로 살피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으나 주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주인의 배신을 알 리 없었다.

복날 즈음하여 곤실댁 앞마당 뽕나무에는 개가 매달렸다. 당시는 ‘개는 몽둥이로 잡아야 한다’는 게 정설이었다. 길 가던 아낙과 아이들은 귀를 막고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개 팔자 상팔자’는 빈말이었다. 소년은 ‘위다’의 소설 ‘플랜더스의 개’에서 읽은 ‘파트랏슈’를 떠 올렸다. '벨기에에서 태어났더라면 저렇게 무참하게 죽지 않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개는 보통 네다섯 집이 돈을 모아서 잡았다. 잡아 주는 사람에게는 대가(代價)로 개 껍데기를 주고, 나머지 네 각(脚)과 머리, 내장을 분배했다. 모내기부터 김매기까지 농사일하느라 지친 원기를 보충하고 다가 올 가을걷이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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