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인생에서 ‘밥 푸는 할아버지’로 거듭난 박남규씨!
시한부 인생에서 ‘밥 푸는 할아버지’로 거듭난 박남규씨!
  • 박영희 (안젤라) 기자
  • 승인 2020.08.12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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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졸업신분으로 건설회사 이사로 발탁
혈액암으로 6개월의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굴하지 않고 봉사의 삶을 산 시인 박남규씨
'낙엽아! 나도 서서 울지...' 대한문학세계 신인문학상 수상작
시 낭송을 하고 있는 박남규씨   박영희 기자
시 낭송을 하고 있는 박남규씨. 박영희 기자

박남규(68) 씨는 대구 본동에서 태어났다. 6.25 전쟁의 상흔이 제대로 아물지 않았던 극도로 궁핍한 시절 10남매의 여섯째로 태어난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이 일 저 일 닥치는 대로 하다가 건설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잡부에서 이사가 되기까지는 그의 합리적인 사고와 직무수행, 뛰어난 잠재능력과 기본에 충실한 가치관 등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부족한 부분은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채워나갔다.

-중졸 학력으로 건설회사 이사가 되기까지는 많은 우유곡절이 있었을 텐데요?

▶ 우연찮게 건설회사에 들어가서 잡부로 일을 하게 되었죠. 현장 소장의 도움으로 도면 보는 법, 인력관리, 자재관리, 장비관리 등 건설회사에 필요한 공부를 체계적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6개월쯤 되니까 일의 순서가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군요. 배움에 대한 갈증으로 ‘철근기능사자격증’도 취득했습니다. 1980년대 해외수주공사의 붐을 타고 두바이를 거쳐 알제리, 아프리카도 다녀왔습니다. 1990년도 말 대전엑스포 공동구역을 하청받아 건설한 결과 대구의 모 신생 건설업체 부장으로 발탁되었습니다. 연 매출 6억에서 3년 만에 100억대로 올리는 성과를 거둬 총무이사로 승진했습니다. 연 매출 250억이 되면서 잠시 회사를 나왔다가 IMF 직전에 회사의 부름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죠. 회사 경영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IMF는 신생건설회사도 삼켜 버렸습니다.

-제주도에 오래 계셨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로 들어가게 되셨나요?

▶ 건설 회사를 그만둔 후 조경으로 개인 사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해서 결혼 초에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조경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죠. 결국 자본금에 밀려 2년 만에 접어야만 했어요. 딸 하나에 아들 둘이 있는데 IMF가 오니까 벌어놓은 돈은 없고 앞길이 막막했습니다. 잠시 택시 운전을 했죠. 그때 귀인을 만났습니다. 차에 탄 손님이 목적지에 도착하고도 내리지 않고 주변을 돌면서 IMF 극복 이야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등 30여분을 이야기하다가 내렸습니다. 그분이 바로 영어로 유명한 라이크 회사 김인환 대표였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2000년 경 그분이 운영하는 제주도 송단조경에 정착하게 됩니다. 직장이 안정되자 가족들도 제주도로 이주해서 함께 사는 행복을 누렸죠.

-일하면서 공부하는 것이 어려웠을 텐데 어떻게 만학도의 꿈을 꾸게 되었는지?

▶ 제주에서 10여 년 살면서 김인환 대표의 설득과 응원에 힘입어 2004년 51살의 나이로 제주일고(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지요. 2004년에 입학해서 2007년에 졸업했습니다. ‘비로소 나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구나’ 하는 기쁨에 날개가 있다면 마음껏 날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만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 졸업과 동시에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격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던 김인환 대표와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글은 언제부터 쓰셨나요?

▶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틈틈이 일기 형식으로 썼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글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모임인 ‘만학도 문학방’에 가입하게 됩니다. 국어선생님의 도움으로 비로소 제대로 된 글을 쓰는 계기가 되었죠. 학교에 다니면서도 틈나는 대로 신문사나 각종 언론 방송사에 수필이나 시를 기고해서 당선되는 기쁨도 누렸습니다.

아픔을 승화시킨 제2집 '몽동'. 박영희 기자
아픔을 승화시킨 제2집 '몽돌'. 박영희 기자

-시집도 내셨다고 들었는데 언제 등단하셨나요?

▶ 2016년 3월에 ‘낙엽아 나도 서서 울지...' 로 등단했습니다. 시집은 두 권을 냈고요.

1집(2018년) ‘아프지 않아도 사랑하게 해주세요’는 이생에서의 소중함을 제목으로 쓴 일종의 기도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골수 이식을 하고 6개월 지나도 산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습니다. 1년 만에 죽는 사람도 봐왔으니까요.

2집(2019년) ‘몽돌’은 거센 파도에 휩쓸려 서로 비비고 뭉개며 모서리가 깎여 나가는 아픔을 통해서 둥글게 자리잡듯이 모나지 않은 온기로 서로의 다름을 겹쳐서 세상을 둥글게 살아가고자 ‘몽돌’이라고 했습니다.

-백혈병(혈액암)으로 고생하셨다고 들었는데 백혈병 진단은 언제 받았나요?

▶평소에 건강하다고 자만했었는데 2012년 어느 날 갑자기 이상증세가 나타났습니다. 검사 받은 결과 ‘혈소판 감소증’이란 진단이 나왔죠. 별다른 약도 없었고 불편한 점도 없어서 일상생활을 해 왔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기와 비슷한 고열과 장염증세가 심해졌고 응급실행도 여러 번, 하지만 2015년 5월 그 유명한 메르스 때문에 집에서 관리를 해야만 했습니다. 메르스가 잠잠해지자 두 달 가까이 서울을 오가며 정밀검사를 받은 결과 ‘백혈병’이란 진단이 나왔습니다. 몸은 자꾸 쇠약해져갔고 여러 가지 합병증이 왔습니다. 의사는 "이 병은 치료약이 없다, 원인치료로 골수 이식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나이가 많아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순간 앞이 캄캄하다 못해 하얗게 되고 다리가 후들거려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60여 년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비로소 소중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대인관계, 아내와의 관계, 자식과의 관계 등. 결국 2017년 초에 6개월의 시한부 인생이 주어졌습니다. 항암치료를 하면 2~5년은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차피 죽는 목숨인데 비실거리며 살기는 싫어서 거부했어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의 도움인지 살아날 운명인지 백혈병으로 골수이식해서 살아난 골수이식 전문 의사를 만나게 됩니다. 그분의 집도하에 골수이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2017년 6월 20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골수이식 후에 찾아오는 숙주병도 잘 견뎌냈고 서서히 건강을 되찾아가는 중입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5일만에 무료급식소에서 봉사를 하고 있는 박남규씨.  '박남규씨 제공'
시한부 선고를 받고 5일 만에 무료급식소에서 봉사를 하고 있는 박남규 씨(오른쪽). 박남규 씨 제공

-‘밥 푸는 할아버지’로 유명하시던데 봉사는 언제부터 하셨나요?

▶ 시한부 선고 받은 지 5일 만에 무료급식소에서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심신이 지쳐있는 상태라 힘은 들었지만 이생에서의 마지막 봉사가 되리란 생각으로 주어진 일에 열심히 했습니다. 나에게 있어 좌절과 슬픔은 사치스런 생각일 뿐, 앞으로도 사람 냄새 풍기는 급식소에서 밥 푸는 봉사는 계속할 것입니다. 2019년 12월에는 대구시 자원봉사자 체험수기에서 ‘밥 푸는 할아버지’로 최우수상(대구시장 표창)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잠시 쉬고 있지만 평범한 일상생활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2019년 대구 달서구 자원봉사자 체험수기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박남규씨 제공'
2019년 대구 달서구 자원봉사자 체험수기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박남규 씨 제공

-지금은 건강이 많이 좋아지신 것 같은데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나요?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요?

▶ 아프고 나서 매일 1시간씩 학산(대구 월성동)을 걷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힘들어서 3시간 걸리던 둘레 길을 이제는 1시간이면 거뜬하게 걸을 수 있습니다. 가끔은 맨발로 걷기도 하죠. 숲을 오고가며 많은 생각을 할 때도 있고 무념무상으로 걸을 때도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집에 있는 날이 많아짐에 따라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답니다.

-삶과 죽음을 오가면서 느꼈던 점이나 꿈이 있다면?

▶ 나름대로 앞만 보고 진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돌아보니 그것은 나를 위한 삶이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삶은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 ‘선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 소박한 꿈이라고 할까요? 요즘은 일상이 행복합니다. 예전은 예전일 뿐 현실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지만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박남규씨는 시한부 인생의 악조건을 피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받아 들였다.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고, 감성 풍부한 한결같은 삶으로 살아가는 그에게 깊은 찬사를 보내며 건강이 회복되기를 빌 뿐이다.

김인환 대표는 “박남규 씨가 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는 내용은 참으로 소박하고 진솔하다”며 “자기 꿈을 실현시키며 열심히 살아온 그가 존경스럽다”고 했다.

 

낙엽아! 나도 서서 울지/ 박남규

 

세월의 찬바람을 이길 힘은 없지

그래도 원망일랑 말어라

미워서 흔들며 보낼 그도 아니란다.

 

뒹굴고 밟혀 산산 조각이 나도 울지 말자

아궁이 앞에 설지라도 어깨동무 하고 가자

 

푸른 여름의 기억일랑 저 멀리 잊자

너는 가면서 울고 나는 서서 울지만....(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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