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향연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해변은 천상의 세계
호텔 내 식당 분위기가 심상찮다. 위생 모자를 쓴 직원과 식판을 든 투숙객이 서부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모습으로 대치하고 있다. 아침 음식이 동이 나버렸기 때문이란다. 투숙객뿐만 아니라 재료가 떨어져 음식을 만들지 못하는 식당 직원도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몰래카메라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지만, 실제 상황이다. 자유여행 하는 이들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단체 관광객들은 아침을 먹지 못해 안절부절못한다. 황당 사건의 분풀이는 여행 가이드에게 할 것이 뻔하다. 여행하다 보면 별일 다 생긴다.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게 상책이다. '조식을 주지 않는 호텔?'... 커피 한 잔으로 잠을 깨워 서둘러 호텔을 나선다.
오늘은 보홀섬(Bohol Island) 여행이다. 7천100여 개의 필리핀 섬 중 10번째로 큰 섬으로, 초콜릿 힐(Chocolate Hills), 알로나 비치(Allona Beach) 그리고 발리카삭(Balicasag)과 같은 75개의 위성 섬이 주변에 널려 있는 곳이다. 최근 팡라오섬(Panglao Island)에 국제공항까지 생겨 외국 관광객이 세부(Cebu)를 거치지 않고 보홀섬으로 갈 수 있어 편리해졌다고 한다.
항구로 가는 도로가 낡은 차량에서 뿜어내는 시커먼 매연과 함께 뒤엉켜 차와 장사꾼들로 인해 난장판이다. 항구까지 갈 수 있을지 조바심만 생긴다. 이들에게 환경문제나 법질서를 말하는 게 사치스러운 호들갑일지 모르지만, 자신들이 사는 터전이 망가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듯하여 애가 탈 뿐이다. 택시 기사는 교통 체증으로 지겨워하는 우리를 힐끗 쳐다보고선 세부의 뒷골목을 휘젓고 다니며 민낯의 세부를 아낌없이 보여준다. 다닥다닥 붙은 낡은 건물과 구멍가게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낙네와 아이들 그리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트라이시클(Tricycle, 삼륜의 교통수단)은 흥미를 자아내기 충분하다. 남자 세 명이니 가능한 여행이겠지만, 화려한 도시에 가려진 서민들의 삶을 가감 없이 볼 수 있다는 게 여행의 묘미를 더해 준다. 세부항구(Pier 1)에 도착하여 베테랑에게 엄지를 치켜세우자 베테랑은 여행 잘하라는 말과 함께 웃음까지 보내준다.
어느 지역이나 항구 인근은 항상 붐빈다. 이른 시간인데도 항구 매표소 앞은 표를 사기 위해 줄이 길게 뻗어 있다. 제시간에 배를 탈 수 있을까 하는 초조한 마음은 노선 시간표를 보고 나서야 사라진다. 섬나라답게 노선표에 적힌 섬들이 많기는 많다. 알려진 섬도 있지만, 대부분은 생소한 섬들이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대기 줄이 줄어들지 않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쇠창살 너머 매표소 안을 들여다보니 직원들이 히득거리며 잡담하느라 정신이 없다. 창구 여직원은 하던 일까지 멈추면서 이야기에 끼어들고 있다. 무더운 날씨에 기다리는 고객 따윈 안중에도 없다. 게다가 한참을 노닥거리던 매표 여직원은 고객이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인상을 찌푸린다. 친절과는 담을 쌓은 듯하다. 우리 차례다. 거만한 여직원에게 “탁그빌라란(Tagbilaran), 3명, 왕복”이라고 얼른 말하고는 간단한 신상을 적은 종이쪽지를 조심스레 내민다. 여직원은 힐끗 쳐다보고선 한참을 토닥거리더니 한 뭉치 표를 건네준다. ‘같은 값이면 좀 친절해지자. 어깨 힘 좀 빼고... 한국에 한 번 가 봐라. 얼마나 친절한지…’라고 중얼거리며 청사 안으로 들어선다.
승선 수속을 마치고 들어선 청사 안도 여행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사람 구경에 빠져든다. 큼직한 배낭을 멘 유럽의 청춘도 좋고 청바지 차림의 필리핀 사람도 보기 좋다. 여행은 누구 할 것 없이 들뜨게 하는 모양이다. 악사들이 불러주는 노래와 함께 개찰구가 열리고 사람들은 하나둘 배에 오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엔진 소리와 함께 배는 도시의 항구를 벗어난다.
잔잔한 세부 해협의 푸른 바다는 뽀얀 뭉게구름과 어울려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내고 시원한 바닷바람은 가슴 속까지 불어와 여행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가는 내내 말이 없다. 바다 위를 오가는 무심한 배들만 바라보며 지그시 눈을 감아본다.
두 시간여 만에 도착한 탁그빌라란 항구 전경은 세부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고 청사 앞은 여행객과 호객꾼들로 인해 혼잡스럽다. 타고 갈 승합차를 찾느라 두리번거리자 몇 년 전 우연히 알게 된 카즈(Kaz)가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다가와 아는 척을 한다. 자신의 차에 타야만 한다나 뭐라나. 갱(Gangster)처럼 생겼지만, 속은 여리고 착하다. 가격 흥정을 하고선 보홀섬 여행하는 이들이 반드시 들른다는 초콜릿 힐로 향한다. 우리를 여행객이 아닌 돈 많은 외국인으로 보았는지 카즈는 가는 내내 자신이 사는 지역에 펜션이 싸게 나왔으니 투자하라고 열을 낸다. ‘아이고 녀석아! 그만하고 운전이나 해라. 장사가 안되니 싸게 나오지!’
초콜릿 힐로 가는 길에 인공산림지대(Man-made Forest)가 있다. 이곳은 1960년대 홍수 방지와 산림 육성을 위해 조성된 숲으로, 필리핀의 아마존이라고 불릴 정도로 웅장한 나무들로 뒤덮여 있다. 무더위에 지친 이들에게 그늘을 내어줄 뿐만 아니라, 나쁜 공기까지 거뜬히 마셔주는 넓은 아량의 숲이다. 잠시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며 숲 공기를 들이마신다. 새파란 맛이 상쾌하다. 산림지대를 굽이 돌아 초콜릿 힐 광장에 다다르자 전망대 계단은 내려오는 이들과 오르는 이들로 장관을 이룬다.
초콜릿 힐은 빙하기 산호초에서 남은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1천200여 개의 원뿔 모양의 언덕이다. 마치 초콜릿처럼 펼쳐져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카즈의 이야기로는 미군 주둔지였던 이곳에 어느 날 보초를 서던 병사가 무심히 바라본 언덕이 초콜릿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붙여졌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가 더 솔깃하게 다가온다.
무리에 끼여 전망대에 오르면 초콜릿 힐을 알리는 빛바랜 간판과 함께 천사들이 먹다 떨어트린 초콜릿이 주변 산 너머까지 펼쳐진다. 볼수록 미군 병사의 상상력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관광객들은 온갖 자세를 취하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 바위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낯익은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때마침 구름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비친다. “와! 하늘이 열렸다. 드디어 공중 부양을 하는구나!”라는 소리에 친구 ‘콘’이는 깜짝 놀라 눈을 뜨며 가부좌를 얼른 풀어버린다. 바위만 보면 가부좌를 트는 이유를 아직 모른다. 아마도 정신 나간 놈인 게 틀림없다. 경이로운 광경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사진 몇 장과 함께 전망대를 내려온다.
기다리던 카즈는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를 로복강(Roboc River)으로 데리고 간다. 로복강 선상 투어는 음악을 곁들인 간단한 뷔페와 함께 강을 거슬러 되돌아오는 코스이다. 유명 관광지이다 보니 항상 관광객들로 붐빈다고 한다. 배에 오르자 빈자리가 없어 미모의 캐나다 여인네와 합석하는 행운을 얻는다. 괜히 가슴이 설렌다. 그런데 이상하다. 외국인은 일본인과 유럽인이 전부다. 필리핀 내방 외국인 관광객 중 부동의 1위인 한국 여행객이 보이지 않는다. 세계 어느 곳에 가든 만나는 한국인을 볼 수 없다는 게 오히려 신기하다. 친구들은 다른 여행객과 사진을 찍으며 이야기하느라 신이 났다. 선상 악사가 들려주는 정겨운 노래에 맞추어 춤까지 춘다.
로복강 선상 투어는 상업화된 원주민을 보는 것보다 강으로 뛰어드는 동네 꼬마 녀석들의 라이브 쇼가 더욱더 흥미롭다. 녀석들은 4~5m는 족히 되어 보이는 나무 위에서 온갖 묘기를 선보이며 다이빙을 해댄다. 그럴 양이면 배 안은 일제히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환호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고 녀석들은 더욱 더 신이나 깔깔대며 물 속으로 뛰어든다. 우리가 구경꾼인지 녀석들이 구경꾼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너무나 해맑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평화롭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실력이 부족하여 녀석들을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게 아쉽다. 선상 투어와 함께 몇 군데 관광지를 둘러보고선 알로나 비치(Alona Beach)의 석양을 보기 위해 팡라오 섬으로 길을 재촉한다.
숙소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해변으로 나간다. 해가 질 시간이 다 되어가기 때문이다. 알로나 비치의 석양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하얀 모래와 에메랄드빛 바다 위로 노랗게 되었다가 금세 붉어지고 붉어졌다가는 또다시 금빛으로 물든다. 야자수 사이로 펼쳐지는 향연은 그 무엇으로도 그려낼 수 없이 신비롭다. 하늘과 바다가 펼치는 협연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석양은 여행자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아름다운 순간을 친구와 보낼 것이란 걸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나의 삶의 한순간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자리를 잡고 있다. 바닷가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루이 암스트롱(Louis Daniel Amstrong, 1901~1971)의 ‘What a wonderful world’는 석양을 타고 바다를 향해 퍼져 나간다. 여기가 천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