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옹지마 (塞翁之馬)
새옹지마 (塞翁之馬)
  • 김외남 기자
  • 승인 2020.07.2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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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사 새옹지마.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격는 길 흉 화 복

팔순 넘은 은사님을 찾았다. 백발의 성성한 머리카락을 쓸며 덮고 있던 얇은 이불자락을 밀치며 겨우 일어나 맞으며 제자의 두 손을 덥석 잡는다. 온기만 느껴지는 손은 뼈만 앙상했다. "은사님 절 받으세요."

좌정하는 모습을 본 후 큰절을 올리고 일어선다. 선생님도 먼 힘들었던 세월을생각하며 눈물그렁하게 제자를 올려다본다.

“진즉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어 이게 누구야. 정자 아니냐. 그간에 많이 변했구나. 내가 이렇게 나이들었는데 변하는게 당연하지. 누추하지만 어서 이리로 안거라." 편찮아서 누워있는 사람에게 드리면 보은의 뜻이 퇴색될 것 같아 바깥에서 사모님께 사은의 두툼한 봉투와 경산시장에서 방금 산 우골 상자를 드리고 방으로 든 것이다. 주방으로 보따리를 드려놓고 뒤따라 들어온 사모님이 은사님께 이 사실을 고한다.

"아이고 이렇게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아픈 게 다 낫는 기분이 든다. 뭘 또 사서 오느냐 그냥 오지. 이젠 많이 먹지도 못해. 부군이랑 집안은 다들 무고하시고, 들리는 말로는 딸을 그렇게나 훌륭한 연예인으로 키웠담서. 장하구나. 그 바닥이 어떤 덴데. TV에서 연속극 볼 때 네 딸 얼굴을 한 번씩 본단다. 지금 서울 어디에 살지?"

"네 송파구 잠실에 살아요.”

1950년대 6.25 때 피난 와서 정착한 곳, 경산시의 변두리 마을, 부엌 이래야 아궁이와 쪽마루가 있는 바로 이 집이었다.

오빠는 군대에갔고 언감생심 학교는 엄두도 못냈다. 홀어머니와 과수원 일과 들일로 품을 팔며 연명했다. 큰방 집주인은 경산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 일학년을 다니다가 피난 왔는데 이태나 지났다. 애를 이렇게 두면 안된다면서 자기가 담임한 3학년에 넣었다. 곱셈도 나눗셈도 구구단도 안되는 채로 맨 뒷자리에 앉아서 멀뚱히 보내야만 했다.

수년전 동창회 대둔산 출렁다리에서 찍은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탈렌트 김희선 엄마 박정자씨다
동창회때 대둔산출렁다리에서 오른쪽에서 두번째 탈렌트 김희선 엄마 박정자

봄날 경산 인근 남천면 산사로 봄 소풍을 가는 날인데 김밥을 쌀 형편이 못되어 엄마랑 산나물을 뜯으러 산에 갔다. 산나물을 뜯어서 시장에 팔아서 국수를 사야만 끼니를 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 한 명이 진달래가 곱게핀 산기슭을 보다가 소풍 오지 못하고 산나물을 뜯고있는 정자와 눈이 마주쳤다. 정자는 얼른 나무 뒤로 몸을 숨기는데 “어머! 저기 정자가 소풍은 안 오고 산에서 나물 뜯고 있다.”라고 소리쳤다.

소풍 한번 제대로 가보지 못하고 수학여행은 꿈도 못 꾸었다. 교복은 외가에서 어찌어찌 한 벌 해주어서 경산여자중학교에 들어갔다. 덩치와 키도 컸고 식견도 빨랐다. 일요일과 방학 때는 어른들 틈에서 김매는 일을 했다. 주인집의 과수원에서 적과, 김매기, 사과 따기등 등 결석도 해가며 품을 팔았지만 제때에 못낸 공납금 때문에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그 시절 학교도 무지 가난했다. 공납금을 내지 않으니 선생님들 봉급도 제때 못 주고 시험지 종이도 겨우 사서 기말시험을 치를 지경이었다. 전교 1, 2, 3학년 각 한 반이었고 5일장마다 그간에 들어온 공납금으로 선생님게 나누어 주면 그것으로 쌀도사고 땔나무도 사서 생활했다. 진학도 못 하고 일자리도 없던 시절 사과밭 일을 해서 돈을 모아 다른 친구들은 고등학교 다닐때 기차 통학하며 대구의 미용 기술 학원을 다녔다.

통근기차가 저쯤서 모통이를 돌아 들어온다. 이 기차를 놓치면 안 된다. 기관사가 선로 갓길을 죽을 힘으로 달려오는 소녀를 본다. 출발하려는 기관사가 분초를 헤아린다. 승객이 타는 객실 칸 까지 가려면 몇초 기차는 출발 후다. 벌겋게 달려오는 애를 보고는 기관사가 문을 열고 기관실로 끌어올렸다.

동창회때 팔공산자락에서  하모니카불면 친구들은 춤도추었다.
팔공산에서 하모니카도불고 춤도 추던 즐거웠던 시간

일 년여 기술을 익혔고 자격증을 취득했다. 미장원 손님들 머리 감기는 일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기술을 습득했고 경북대학교 근처에서 미장원도 열었다. 결혼도 했다. 자궁이 약해서 몇번이나 유산으로 이어지다가 사십을 바라볼 즈음 37살에 겨우 한 여식을 건졌다. 상경하여 갖은 고생 끝에 남편과 같이 허허벌판 서초구 빈터에 천막을 치고 가마니 장사를 하여 큰 수익도 남겼다. 구청에서 불법 무허가라며 철거하라는 통지문이 왔지만 통지문을 거꾸로 들고 이거 뭘 하라는 통지문인지 글자를 읽을 줄 모른다면서 능청을 떨었다. 봄부터 여름까지 빈 가마니를 나오는 대로 몽땅 사들여 큰 창고에 쟁여 두었다가 보리농사나 벼농사 철에 풀어놓으면 당시 백 원짜리가 삼백 원으로 팔렸다. 풍년이 들면 큰 창고에 있던 빈 가마니가 호남지방으로 경기지방으로 많이도 팔려 나갔다. 겸하던 미장원 일을 접었고 불면 날아갈세라 오직 육아에만 전념했다. 고등학교 3학년때 연기학원에 보내달라는 아이의 청을 들어주었다. 연기학원원장이 미스 코리아 주니어 선발대회에 추천을 해주었고 참여하여 대상을 받고 춘향이로 뽑혔다. 연예계에 딸아이가 발을 들여놓게 되어 최우수 명배우가 되어 스크린이며 TV에 떴다.

그 피난살이 했던 마을에 그 은사님이 여든이 훨씬 넘은 나이로 그 집에 아직 계신다기에 이렇게 찾아뵈러 온 길이다.

“선생님 그때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찌 오늘날의 제가 있겠습니까. 언제 또 은사님을 뵙게 될는지요.?”

돌아 나오는 길에도 또 한 번 절을 올리며 은사님의 쾌유를 빌었다. 연예계의 길은 험난했다. 딸을 지키기 위한 길이라면 외국 나가는 일은 못 했지만 국내에서는 몸소 매니저가 되어 24시간 밀착했다. 부당한 소문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거심을 부리고 팔을 걷고 딸을 지켜냈다. 수완이, 실력이 뛰어났다. 대전이며 서울이며 경기도 변두리에도 전원주택이며 건물을 사면 수익이 엄청났다. 이번 길도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 경산시장에 상가건물을 구입, 일 년치 집세를 고스란히 봉투에 넣어 은사님을 찾아뵌 길이다. 서울대학교병원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억단위로 기부를하는 기부천사다.

그때 이후부터 동창회를 활성화해서 그 친구는 회장 나는 총무로 25년간이나 이끌었다. 남편을 여윈 친구며 투병 중인 친구들을 일일이 찾아보는데 총무를 맡은 내가 항상 동행했다. 경기 강원 충청도며 못가보고 이름난 곳이면 해마다 1박 2일 코스로 두루 다녔다. 그 친구가 서울서내려왔다 하면 남자분들도 하기 힘든 일을한다면서 기꺼이 1박 2일을 허락해 주는 남편이다. 남편 친구 중에는 고향 동창이 세상을 떴는데도 자기네 대소사에도 다들 다녀갔는데도 핑계 대고 안가보는 누구 같은 사람도 흔한데 여자들의 우정이 대단하다며 치켜세워준다. 1박2일의 관광버스비며 협찬금도 펑펑 내놓고 총무가 애쓴다며 딸이 모델하고 받은 화장품이며 선물 세트를 아낌없이 주었고 엄두도 못내는 물품도 선물받았다. 행사일로 서울 가서 안부전화라도하면 택시로달려 와서 차비하라며 봉투를 챙겨주곤한다.

대구에 내려오는 날이면 호텔을 잡아놓고 커다란 여행 가방에 고급옷이며 신발이며 가득 넣어 온다. 저녁이면 패션쇼를 펼쳐서 입혀보고 신겨보고 맞는 사람에게 다 나누어주고 하하호호 거리다가 빈 가방을 들고 간다. 그때 그 시절 소풍도 못가고 ‘산나물 뜯던 내가, 산나물 뜯던 내가,’ 라며 펑펑 울었다. 동창들이 너무 소중하여 신나게 쏘려고 왔다면서 호텔에서 밤새우며 미쳐 몰랐던 이야기들을 풀어놓은 탈렌트 김희선 엄마 정자의 이야기를 올려본다. 변화 무상한게 인생이다. 길흉화복은 알수가 없다. 塞 翁 之 馬 새옹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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