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㉙밀가루 다섯 포로 나던 여름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㉙밀가루 다섯 포로 나던 여름
  • 정재용 (엘레오스) 기자
  • 승인 2020.07.27 1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보리밥, 칼국수, 수제비에
옥수수, 감자, 밀가루 빵 간식으로 행복했던 시절
동고동락하던 그리운 얼굴들. 정재용 기자
동고동락하던 그리운 얼굴들. 서로가 이웃의 가정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정재용 기자

여름은 마당에 무쇠 소죽솥 내다 거는 것으로 시작됐다. 소죽은 여름에도 반드시 끓여서 먹였다. 소도 뜨거운 것을 먹느라 고생이고 더운 날에 소죽 쑤는 주인도 죽을 맛이지만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뜨물에 생 여물과 보릿가루 탄 것을 넣고 섞어서 ‘생식’시키는 것은 훨씬 뒤에 생겨났다. 누군가 젖소를 생식시키는 데서 착안하여 시작한 것이 입소문을 탄 것 같다.

백철 솥도 곁에 걸었다. 아침, 저녁밥을 짓는 솥이었다. 점심은 아침에 지은 밥을 서늘한 데 두었다가 식은 밥으로 먹었다. 대나무 소쿠리에 퍼 담고 삼베 보자기로 덮어서 바람 잘 통하는 부엌에 매달아 놓았다. 파리나 생쥐가 달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식은 보리밥은 요즘 말로하면 식감이 영 아니었다. 그렇지만 농부는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에 감사하고 오이냉채 국이나 찬물에 말아서 맛있게 먹었다. 반찬은 된장 또는 고추장에 풋고추를 찍어 먹고 생마늘을 찍어 먹기도 했다. 당시는 곰피가 흔해서 이를 초집해서(초간장에 버무려서) 많이 먹었다. 아무리 가난해도 중복(中伏) 즈음에는 눈 딱 감고 닭을 고았는데 이럴 때는 거의 잔칫집 분위기였다.

여름 간식으로는 삶은 옥수수, 삶은 감자가 인기였다. 감자를 많이 깎은 놋숟가락은 닳아서 반달모양으로 날카로웠다. 숟가락의 손으로 잡는 자루를 숟가락총이라고 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술총’ 혹은 ‘숟가락몽둥이’라고 불렀다. ‘숟가락몽둥이 하나 없다’는 극심한 가난을 뜻하는 말이었다. 사카린을 적당하게 넣고 물이 자작하게 마르도록 삶아 낸 옥수수와 감자는 노릇노릇하게 익어서 군침이 저절로 돌게 했다.

밀가루 빵떡은 얼마나 부풀게 만드느냐에 달렸다. 반죽은 커다란 양푼에 물을 붓고 사카린, 소금, 식용소다, 이스트를 적당히 넣어 휘저어 녹인 후 그 물에 밀가루를 조금씩 넣으며 주걱으로 후렸다. 생밀가루가 안 보일 때까지 주걱을 돌렸다. 그리고는 부풀어 오를 때까지 보자기를 덮어 놓으면 일단 준비는 끝났다. 반죽이 한껏 부풀었을 때 백철 솥 위에 채반을 얹고 쪄내면 스펀지 마냥 부푼 밀가루 빵떡이 돼서 나왔다. 삶은 완두콩을 통째로 반죽 위에 뿌려서 찌기도 했다.

더위를 먹으면 수박 꼭지 부분을 동그랗게 따고 속을 긁어 낸 뒤 꿀과 섞어서 다시 넣고 밑동이 잠기게 우물에 담가놓았다가 이튿날 아침에 꺼내서 먹었다. 비 오는 날은 애나 어른이나 입이 심심하기 마련, 농부의 아내는 뭔가 만들어 내 놓아야했다. 가마솥에 밀과 콩을 볶아 양푼에 담아내면 방안에 웃음꽃이 피었다. 소년은 방문을 열어젖히고 방바닥에 배 깔고 엎드려 계림문고에서 나온 소설을 읽고 농부는 삽을 둘러매고 “궂은 비 오는 밤 낙숫물 소리”노래를 흥얼거리며 물꼬 보러 나섰다.

저녁식사는 칼국수나 수제비로 하는 게 보통이었다. 국수는 홍두깨로 밀고 부엌칼로 썰어서 다시멸치와 감자가 끓고 있는 백철 솥에 넣어 삶으면 끝이었다. 찬물에 헹굴 일도 없고 멸치를 건져낼 일도 없었다. 채썰기로 대기하던 애호박은 국수가 끓기 시작할 때 넣었다. 온 식구가 마당에 멍석을 펴고 ‘둘레판’(두리반)에 둘러 앉아 후후 불어가며 칼국수를 먹었다. 국자가 커다란 백철양푼에 걸쳐 있어서 더 먹고 싶은 사람은 각자가 알아서 떠먹으면 됐다. 불어터진 멸치는 그것도 고기라고 네 맛도 내 맛도 없었지만 대가리 떼고 똥 빼 내고 먹었다. 두 그릇은 기본이었다. 반찬은 양념간장 하나면 족했다.

저녁식사를 마친 아이들은 마을 복판에 있는‘미뿌랑’이나 곤실댁 마당 앞 공터에 나가 놀았다. 정관이는 방귀를 잘 뀌어서 심심하면 아이들이 둥글게 서 있는 복판에 들어가서 엉덩이를 한 바퀴 돌리며 방귀를 따발총처럼 발사했다. 어른들은 모깃불 피워놓고 멍석에 앉아 별을 쳐다보며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웠다. 놀다 온 아이들은 퍼져서 엉겨있는 국수를 한 사발씩 더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어느 일곱 식구 가정은 여름나는 동안 밀가루 다섯 포를 먹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갱빈에는 여뀌풀이 많았다. 오른쪽에 양동산 북쪽 끝부분이 보인다. 소평마을은 사진의 왼쪽 멀리 들 복판에 있었다. 정재용 기자
갱빈에는 여뀌풀이 많았다. 오른쪽에 양동산 북쪽 끝부분이 보인다. 소평마을은 사진의 왼쪽 멀리 들 복판에 있었다. 정재용 기자

모깃불로는 바랭이, 고마리, 강아지풀을 얹는 게 보통이지만 모기를 얼씬도 못하게 하는 풀은 여뀌였다. 소도 매워서 안 먹는 여뀌 연기는 허드레고추가 달린 고춧대를 태울 때만큼 매워서 기침과 “모기 쫓으려다 사람 죽이겠다”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했다. 부채는 식구 수대로 있어서 네 부채 내 부채를 찾아 들고 썰렁썰렁 모기를 쫓고 바람을 일으켰다. 대나무살로 만든 파초선에 버금가는 크기의 부채였다.

은하수가 물길을 바꾸고 공기가 선선해지면 자러 들어갔다. 잘 준비는 초저녁에 이미 해 놓았다. 방 닦고, 베개를 정한 위치에 놓고, 앞뒤 방문에 모기장을 쳤다. 빈틈이 없도록 싸리나무나 대나무를 구부려 상중하 세 군데 탱기를 쳤다. 모기장을 펼치거나 오징어를 말릴 때 평평하게 펴지도록 가로로 나무를 구부려 탱탱하게 대는 것을 ‘탱기친다’라고 했다. 요즘처럼 방안 네 곳 못에 거는 사각형 모기장은 훨씬 뒤에 나왔다. 방안에 들어갈 때는 사람이 들어가는 틈에 모기가 따라 들어가지 못 하도록 한 사람은 열심히 부채질을 하고, 들어가는 사람은 재빨리 들어갔다.

농부의 아내는 ‘보쌀차’지나갈 때 끓여서 부엌 찬장 안에 넣어 둔 보리쌀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맨 나중에 방으로 들어갔다. 보쌀차는 동해남부선 열차가 언제나 저녁 보리쌀 끓일 무렵에 마을 앞 철둑을 지나가면서 생긴 이름이다. 보리밥은 언제나 두 번 삶아야 먹을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메뉴는 물으나마나 보리밥에 콩잎 삭힌 것, 된장, 고추장이었다. 된장은 따로 끓일 필요 없이, 된장뚝배기에 멸치와 청양고추 넣어서 보리쌀 앉힐 때 넣어두면 밥물이 적당하게 들어가서 맛있는 된장찌개가 됐다. 콩잎은 사흘 전에 항아리에 풋 콩잎 단을 넣고 콩잎이 잠기게 된장을 풀어 넣어 발효시킨 것이었다. 콩잎을 따서 짚으로 둘러매면 작은 묶음이 됐다.

콩잎을 어린 순 채로 뜯으면 콩잎은 세 개였다. 쌈을 쌀 때 어른은 세 잎 그대로, 아이들은 하나씩 뜯어서 손바닥 위에 펼쳤다. 그 위에 보리밥 한 숟갈 퍼 담고, 고추장 한 점 찍어 바르고, 마지막으로 끓인 된장 한 숟갈 끼얹으면 순간을 못 참고 침이 먼저 목줄을 타고 넘어갔다. 호박잎과 들깻잎도 밥솥에 쪄서 먹었다. 매미가 더위를 먹었는지 아닌 밤중에 신나게 울어댔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