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㉘땅, 흙 그리고 논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㉘땅, 흙 그리고 논
  • 정재용 (엘레오스) 기자
  • 승인 2020.07.1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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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농부의 평생소원은 소작농 면하고 내 논 서너 도가리 가져보는 것
회자되던 어느 부자의 일화

경북 경주시 안강읍 소평마을은 140여년 전만해도 허허벌판이거나 어래산 줄기가 뻗어 내린 작은 구릉이었다. ‘나무위키’에 의하면 “원래 ‘안강’은 무인 하천 지역이었으나 ‘칠평천’ 유수의 변천으로 민가가 형성되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 주민의 평안함을 염원하는 뜻에서 ‘안강(安康)’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소평마을은 ‘소평’(小坪, 작은 땅)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읍내 북쪽의 구릉이 끝나는 부분에 농토를 일궈 사는 ‘작은 촌락’이었다.

소평마을은 윤 씨 성 가진 분이 개척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1960년대 쉰 호 가운데 윤 씨는 윤학이 씨 한 가정뿐이었고, 김, 황 씨 대소가와 권, 이, 구, 강, 주, 정, 임, 박, 장, 최 씨 등이 살았다. 이들의 윗대 고향은 대부분 월성군(현재 경주시), 영일군(현재 포항시), 영천 등 인근이었고 멀어야 영남권을 벗어나지 않았다. 친인척 따라 드넓은 농토가 있는 곳으로 몰려 든 터였다.

처음 소평마을 사람들은 땅 한 평, 논 한 도가리를 북간도로 살러 간 사람들이 땅을 일구듯 스스로의 힘으로 장만했을 것이다. 소평마을에서 보이는 안강평야는 동쪽으로는 양동산, 남쪽으로는 철둑과 안강시가지, 서쪽과 북쪽은 어래산 줄기에 이르는 들판이었다. 광활한 평야 가운데 오도카니 엎드려 있는 마을은 육지 속 섬이었다. 작은 어선을 가진 어부가 연안에서 고기를 잡듯 소평마을 사람들의 농토는 반경 1km를 벗어나지 않았다. 마을 앞쪽으로 양동들, 고래전, 안강들이 있고 뒤쪽으로 한들, 모래골, 섬배기, 야마리라 이름하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양동마을 쪽이라 양동들, 안강읍내 쪽이라 안강들이었다. 고래전의 ‘고래’는 ‘바닥이 깊고 물길이 좋아 기름진 논’을 뜻하는 ‘고래실’에서 왔다. 처음에는 밭(밭 전, 田)이다가 논(논 답, 沓)으로 변했다. 그리고 크고 넓은 들이라 ‘한들’, 모래가 많아서 ‘모래골’, 큰거랑이 양쪽으로 흘러 ‘섬배기’였다.

철둑에서 본 안강들과 어래산. 소평마을은 오른쪽 끝 부분이다. 정재용 기자
철둑에서 본 안강들과 어래산. 소평마을은 오른쪽 끝 부분이다. 정재용 기자

해는 일찍 뜨고 늦게 졌다. 논보리 베어 내고 그 논 갈아 모내기 하는 여름 해는 길고 길었다. 해 뜨기 전에 일하러 나가서 해 져서 돌아오는 농부는 기진맥진이었다. 해 길어 일 쳐내기는 좋았지만 점심은 논둑에서 먹고 종일 흙과 씨름하느라 삼베 저고리 위로 소금이 피어올랐다.

기계천과 칠평천의 물은 너른 평야를 적시고도 남아 형산강으로 흘러들었다. 수리시설도 잘 돼 있었다. 농로, 다리, 수로, 수문 등 모두 일제강점기에 만들었다. 그 시설물은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거기에 비해 1960년대 경지정리하면서 만든 시설물은 시멘트가 부스러지고 철근도 가늘어서 큰물이 지면 넘어지거나 떠내려가기 일쑤였다. 이럴 때 어른들로부터 흔히 듣던 말은 “왜놈들 일 해놓은 거 봐라. 그놈들은 대충하는 법이 없어. 하나를 해도 똑 부러지게 하거든”, “일본 따라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였다.

농민들은 전원 수리조합원이 돼야했다. 수리조합에서는 매년 조합비를 거둬가면서도 본격적으로 모내기가 시작되기 전에 기계천으로 가서 보(堡)를 보수하고 큰거랑 수로를 준설하기 위해 부역을 부쳤다. 새벽밥 먹고 나간 농부는 점심 때 지나 삽을 어깨에 메고 허기져서 돌아왔다. 여름날 한 나절이 그렇게 갔다.

농토를 기름지게 하는 것은 온전히 개인 몫이었다. 비료가 귀한 시절이라 국가에서도 매년 ‘퇴비증산운동’을 벌였다. 못자리를 해 놓고는 양동산으로 가서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싸리나무의 연한 잎을 베어다가 무논에 넣고 쟁기로 갈아엎었다. 마른 논에는 소 거름을 달구지로 실어다가 쇠스랑으로 골고루 뿌렸다. 소 거름은 밤에 소가 누워 잘 수 있도록 외양간 바닥에 짚을 깔아줘서 만든 퇴비다. 날이 밝으면 농부는 소를 마당 거름 터로 몰아내고 밤새 똥오줌으로 버무려진 짚을 소쿠리에 담아 퇴비무더기로 날랐다. 소가 없는 집은 장만할 수 없는 귀한 퇴비였다. 퇴비를 ‘두엄’이라고도 했다.

메주나 누룩이 겨우내 처마에 매달려 뜰 때 퇴비는 마당 한 모퉁이에 쌓여서 떴다. 부잣집에서는 이른 중간에 놉을 들여서 퇴비를 한번 뒤집었다. 터를 옆으로 옮겨 위의 퇴비가 밑으로 가고 밑의 것이 위로 가도록 쌓아 올리는 작업이었다. 미리 실어다 놓은 모래와 짚을 깔고 그 위에 재래식 변소에서 인분을 퍼내어 뿌리는 일을 켜켜이 했다. 이튿날 새벽이면 떡시루에 김 오르듯 퇴비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발효를 시작한 것이다. 한번은 거름 속에서 삽날에 가득할 정도의 알이 나왔다. ‘웬 달걀?’ 하면서 깨보니 뱀 새끼가 꼬물거렸다. 쇠스랑을 꽂아 놓고 잠시 쉴 수밖에 없었다. 기역 자 두 날 쇠스랑을 ‘소래’라고 불렀다. 소래는 흙이나 퇴비를 찍어낼 때 사용하고 세 날 쇠스랑은 찍어 낸 것을 퍼 담을 때 사용했다.

비가 내리면 빗물은 마당을 가로질러 서쪽 수챗구멍으로 흘러들었다. 마당은 처음부터 배수를 고려하여 동쪽에서 서쪽으로 기울어지게 만들어져 있었다. 거기다 본채와 대문 쪽 터를 돋워 놓아 빗물은 손바닥의 손금마냥 마당을 가로질러 흐르기 마련이었다. 큰비가 내리면 뒤뜰에서 앞마당으로 조조군사가 몰려나오듯 휘돌아 쏟아졌다. 거름 터에서는 간장 빛깔의 물이 나와 흘러들었다. 간장을 ‘지렁’이라고 하고 거름 터에서 나오는 물을 ‘소지렁물’이라고 했다. 아까운 비료 빠져나가는 게 안타까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마당을 쓸 때도 대문에서 본채 쪽을 향해 빗질을 하는 게 상식이었다. 옛날부터 어른들은 대문 쪽으로 쓸면 복이 빠져나간다고 그렇게 가르쳤다. 지푸라기 하나라도 아깝게 여겼다. 닭똥, 개똥도 살림이었다.

어느 부자어른의 일화는 유명했다. 그는 읍내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변이 마려워도 참고 본인의 논에 이르러서야 보았다고 한다. 길에 지푸라기가 떨어져 있으면 주워서 들고 걷다가 본인 논에 버렸다. 경지정리 하면서 불도저가 흙을 깎아냈다. 검은 흙이 다 날아가고 기름기 없는 붉은 흙이 드러나자 윤기(潤氣)를 돋우기 위해서 뚝새풀 씨를 뿌렸다. 보리밭에 잡초는 상극인데 일부러 뿌리다니 얼른 이해가 안 가지만 곡식보다는 잡초가 더 적응력이 빠르니 제초작업에 고생이 되더라도 지력을 높이는 일인 만큼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일념이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사람마다 혀를 내둘렀다.

​1990년 여름 마을 앞길, 멀리 양동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1990년 여름 마을 앞길, 멀리 양동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가난한 농부의 평생소원은 ‘논 많이 갖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서 머슴부릴 정도의 부자 되려는 욕심은 아니었다. ‘소작농 면하고 내 논 서너 도가리 가져보는’ 소박한 꿈이었다. 자녀들 공부시키는 것은 둘째였다. 돈을 두고는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다”, 땅을 두고는 “송곳 하나 꽂을 자리 없다”가 마을사람이 쓰던 관용어였다. 그 넓은 들 복판에 살면서도 제 논 없는 한탄이었다. 객지에 나가서 돈 벌다가 친정에 논 한 도가리 사 주고 시집 간 딸은 집안의 효녀이자 마을의 자랑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흙을 닮아갔다. 뙤약볕에 얼굴과 팔다리는 황토 빛깔이 되고 어려움이 닥쳐도 비올 때를 기다리는 논처럼 견뎌냈다. 햇빛과 물과 바람에 감사하며 철따라 곡식과 채소와 과일을 만들어 내는 땅처럼 자식 다섯을 먹이고 입히고 길러 어엿한 사회인으로 길러냈다.

처서(處暑) 무렵이면 벼꽃이 핀다. 가을들녘 알곡에 비하면 꽃은 볼품이 없다. 더위가 물러가고 함초롬히 밤이슬 머금고 피어나는 하얀 벼꽃, 소평마을 사람들은 벼꽃처럼 조용하고 알곡처럼 성실했다. 아무리 고된 농사일에 아무리 지쳤어도 웃음을 잃지 않고 서로 정답게 인사를 나눴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면 이웃과 나누고 기쁨도 슬픔도 내 일인 양 같이 했다. 그들은 흙과 더불어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흙으로부터 평생에 걸쳐 체득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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