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부모의 자격
[인문의 창] 부모의 자격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0.07.13 17:00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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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라는 이름의 자격과 책임은 무엇인가. 자식을 순간적인 실수로 생산했다면 이미 부모가 아니라 정자와 난자 은행에 불과하다
플뢰르 펠르랭(1973년 8월 29일 ~ ) 은 프랑스 정치인이자, 고위 공무원으로, 2010년부터 프랑스의 “21세기 클럽” 회장을 맡고 있다. 2012년 5월 16일, 프랑스 중소기업 및 디지털 경제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2014년 8월 26일 문화통신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위키백과
플뢰르 펠르랭(1973년 8월 29일 ~ ) 은 프랑스 정치인이자, 고위 공무원으로, 2010년부터 프랑스의 “21세기 클럽” 회장직을 맡고 있다. 2012년 5월, 프랑스 중소기업 및 디지털 경제부 장관으로, 2014년 8월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위키백과

낳아준 부모(친부모)와 키워준 부모(양부모) 가운데 누가 진짜 부모일까? 최근 뉴스를 보면서 다시금 부모에 대한 슬픈 자화상을 떠올리게 된다.

보스 카라(37)는 1983년 11월 충북 괴산 장날에 주차장에 버려져 이듬해 9월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의 친자녀를 둔 양부모에게 입양됐다. 그는 처음 발견됐을 때, 빨간색 코트에 빨간색 팬티를 입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강미숙이고, 나이는 두 살이라고 직접 말할 만큼 영리했다고 한다. 성인이 된 후 네덜란드 남편과 결혼해 두 자녀를 둔 그는 5년 전 딸을 낳은 후에야 한국인 어머니가 자신을 버림으로써 겪었을 엄청난 고통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어머니와 한번 만나길 간절히 바라게 됐다. 보스는 그래서 2017년 한국을 여행하며 1983년 자신이 버려진 괴산의 시장을 방문하고 자신을 기억하는 이를 찾기 위해 전단을 뿌렸다. 그녀의 사연은 한국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그런데 돌파구는 뜻밖의 곳에서 나왔다.

2016년 보스는 자신의 유전자 자료를 온라인 족보 플랫폼 '마이헤리티지(MyHeritage)'에 올렸다. 지난해 1월 이 플랫폼을 통해 헤어진 지 오래된, 어떤 두 자매가 만나게 된 이야기를 언론을 통해 들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보스는 친아버지를 찾았다. 그러나 한국 법원은 보스의 아버지 성이 오(吳)씨라는 것을 빼고는 주소 등의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2019년에 보스는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고 그러고서야 합법적으로 오씨의 주소를 알 수 있게 됐다. 지난 3월 아버지(85)를 만나기 위해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의 벨을 눌렀지만 생부는 보스를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생부(生父)는 ‘본처(本妻)’에서 낳은 이복자매들이 있었다. 만남의 거부가 아버지 본인의 뜻인지 이복언니들의 생각인지는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첩(妾)의 소생임을 알게 됐다.

그는 국내의 한 통신사와 서면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렸을지, 마침내 이해하게 됐다"며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닦은 그는 서툰 한국어로 "엄마, 만나고 싶어요. 정말 미안해하지 마세요. 그냥 오세요."라며 마스크를 벗고 환하게 웃었다. 생모의 존재여부를 아는 사람은 오직 생부인 오(吳) 씨 뿐인 셈이다.

2012년 한국은 프랑스 중소기업디지털경제부 장관의 취임으로 들떠 있었다. 프랑스 사회당 후보인 올랑드 대통령이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였다. 좌파 정권이 집권한 건 프랑스에서 17년 만의 일이었다. 한국의 관심은 동양인 외모의 여성 장관에게 집중됐다. 단발로 똑 자른 새까만 머리카락과 그에 대비되는 흰 얼굴, 까만 눈동자와 얇은 속 쌍꺼풀 까지, 그는 누가 봐도 한국 여성이었다. 외모와 달리 그의 이름은 발음조차 힘든 플뢰르 펠르랭(44)이었다. ​생후 6개월 때 한국에서 프랑스로 입양된 그는 지난 2012년 5월 중소기업디지털경제부 장관을 시작으로 2016년까지 통상관광부 장관과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2013년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한국 입양아로 장관직에 오른 뒤 처음 한국으로 돌아온 그에게 소감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냉정했다. ​"태어난 곳은 여기일지 모르지만 난 뼛속까지 프랑스인입니다. 한국인들이 나를 성공 신화의 주인공으로 봐주는 것은 고맙지만 나는 한국인이 아니에요." 친부모를 찾아볼 생각이 없느냐는 물음에 그는 대답했다. "없습니다."라며 한순간의 망설임이 없었다.

한국인들로부터 수십 번 들은 질문이었는지, '친부모'란 단어를 꺼내자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없다(No)"는 답이 튀어나왔다. ​그의 머릿속 한국은 '나를 낳아준 나라'가 아니라 '아시아에 있는 작은 나라' 정도인 것 같았다. ​​1973년 8월 29일은 길에 버려진 그가 발견된 날이다. 태어난 지 3~4일쯤으로 추정되는 여자아이였다. 6개월쯤 지났을 무렵 그는 하얀 강보에 싸여 프랑스의 양어머니 애니 펠르랭 품에 안겼다.

김종숙이 플뢰르 펠르랭으로 다시 태어난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한 번도 한국에 발 디딘 적이 없었다. 2013년 3월 '제4회 아시아리더십콘퍼런스' 기조연설을 맡아 방한했던 게 처음이었다. 프랑스로 입양된 지 40년 만이었다. 그는 당시에도 "내가 태어난 곳을 방문하게 돼 설렌다"면서 "나를 낳아준 부모가 누군지는 관심 없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내 나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나를 키워주신 두 분뿐이에요"고 선을 그었었다. 그는 친부모를 찾으려고 시도한 적도 없고 계획도 없다고 했다.

​스티븐 폴 "스티브" 잡스(1955년 2월 24일 ~ 2011년 10월 5일)는 미국의 기업인이었으며 애플의 전 CEO이자 공동 창립자이다. 2011년 10월 5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위키백과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 로널드 웨인과 함께 애플을 공동 창업하고, 애플 2를 통해 개인용 컴퓨터를 대중화했다스티븐 폴 "스티브" 잡스(1955년 2월 24일 ~ 2011년 10월 5일)는 미국의 기업인이었으며 애플의 전 CEO이자 공동 창립자이다. 2011년 10월 5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위키백과​
​스티브 잡스(1955년 2월 24일 ~ 2011년 10월 5일)는 미국의 기업인이었으며 애플의 전 CEO이자 공동 창립자이다. 2011년 10월 5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위키백과

세상을 바꾼 혁신의 아이콘이라고 불리는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의 패턴을 바꿔놓았고 이로 인해 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힌다. 그러나 세계적인 스티브 잡스의 명성과 달리 그의 개인사는 철저히 비밀에 쌓여 있었다. 그러던 2005년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졸업식에서 스티브 잡스가 현재 췌장암으로 투병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또 다른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놀랍게도 자신이 미혼모(未婚母)로부터 태어나, 양부모 밑에서 자란 입양아라는 것이었다.

1955년 태어 난지 겨우 2주가 지난 스티브 잡스는 결혼 한지 9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는 미국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2005년 당시 졸업식연설중계를 TV로 시청하던 한 사람이, 스티브 잡스의 연설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노인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스티브 잡스의 생부(生父)였다. 그는 지중해 연안, 시리아(Syria)의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1950년대 미국으로 유학을 온 뒤 정치학을 공부했고 이후 미국에 정착해 교수로 일하다가 사업가로 변신해 대형 카지노에서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스티브 잡스의 연설 내용을 듣고 그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게 된다. 그는 당장이라도 그를 만나고 싶었지만 차마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자식을 버렸다는 죄책감과 더불어 혹여 자신이 스티브 잡스의 재산을 노려 뒤 늦게 연락을 한 것처럼 보일까봐 조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들에 대한 그리움은 깊어졌고 결국 용기를 내어 스티브 잡스에게 E-Mail을 보낸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에게서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는 한 인터뷰에서 지금의 양부모가 100% 확실한 나의 부모님이라며 감사를 표하는데 반해, 자신의 생부모(生父母)는 정자와 난자 은행에 불과하다고 말할 정도로 그들에 대한 깊은 원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6년지 지난 2011년 드디어 스티브 잡스의 E-Mail이 생부에게 도착한다. 하지만 고맙다는 한 마디 뿐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달 후 스티브 잡스가 투병 중이던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발표된다. 결국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아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부의 희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6.26 전쟁 이후 70년간 해외로 입양된 한국아이는 20여만 명에 달하며, 미국, 캐나다. 이탈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순으로 보내졌다. 입양을 시켜야하는 친부모는 ‘미혼(未婚)부모’이거나, 결혼관계가 없는 ‘혼외(婚外)자식의 부모’이거나 양육을 포기하고 길에다 내다버리는 ‘유기(遺棄)부모’가 대부분이다. 입양된 아동의 자아정체성 형성은 어려서는 양부모와의 동일시를 통해서 발달하며, 성장하면서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발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입양 후 성인이 되어, 친부모를 찾는 입양아나, 찾지 않은 입양아나 그들의 선택은 하늘이 내려준 치외법권적 권리와 권능을 갖는다. 강미숙도, 김종숙도, 스티브 잡스도 보통가정의 아동이 가보지 않은 다른 길을 외롭게 걸었다. 특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국을 떠나야했던 그들은 자신과 다른 피부색의 양부모와 살면서 어려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궁금해 하고, 결국은 친부모에 대한 원망과 맘고생을 겪었을 것이다. 모두 친부모의 버림을 통해서 행해진 일이다. 하지만 김종숙과 스티브 잡스와 같이 친부모를 찾지 않겠다는 선택을 비아냥거리며, 낳아준 사람이 누군데 은혜를 알아야지 하고 훈계하거나 윤리를 저버린 자로 간주하는가 하며, 결혼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이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천륜지대사(天倫之大事)라며, 천륜을 여기에 갖다 대기도한다. 도대체 누가 먼저 패륜을 저질렀는가?  친부모다. 어느 쪽 선택이든 버려졌던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부모의 자격’를 곱씹어보는 것이, 보다 보편적이고 인간적 잣대가 아닐까? ‘부모’라는 이름의 거룩한 책임과 무게,  그리고 부모가 되기 위한 자격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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