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기의 '형님과 오미자'
신재기의 '형님과 오미자'
  • 김채영 기자
  • 승인 2020.08.05 10:00
  • 댓글 1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 픽사베이
픽사베이

 

신재기의 '형님과 오미자'

 

나의 오미자 중개상 노릇은 추석 후 이십 일이 지나서야 마무리되었다. 추석 보름 전부터 시작했으니 한 달 이상 이 일을 한 셈이다. 말만 오미자 중개상이지 직장 생활을 하는 내가 어찌 여기에 매달릴 수 있었겠는가? 기껏해야 주위 아는 사람들로부터 주문받은 것을 형님한테 문자 메시지로 알려주고, 받은 대금을 송금하는 일이 고작이었다. 아내까지 거들었다. 올해 형님이 수확한 오미자는 우리 부부가 거의 팔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황이었다. 끝에 가서는 생산량이 부족해 주문을 다 들어주지 못했다. 형님은 부치자니 힘들고 묵히자니 아까워 산언덕 뙈기밭에 오미자나무를 심어 삼 년 전부터 수확해왔다. 올해는 농사가 잘되었다. 더욱이 건강에 좋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오미자 수요가 급증했다. 함께 수필 공부하는 여남은 명이 직접 밭에 가서 오미자를 따주고 필요한 만큼 사오는 '오미자 현장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오미자 중개상으로 나섰다. 형님한테 도움을 준다면 귀찮더라도 무엇이든 기꺼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형님은 삼십 대부터 줄곧 산촌인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한 분뿐인 형님은 나보다 열두 살이나 위여서 부모 맞잡이나 다름없었다. 지병으로 병석에 있다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 가장으로서의 짐을 오랫동안 져왔다. 부모 공양, 동생 공부 뒷바라지, 자식 키우기, 조상 봉제사와 선영 돌보기 등 만만찮은 일을 칠순이 넘은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 형님은 해방되기 몇 해 전에 일본에서 태어나 대만을 거쳐 다섯 살 때 지금 고향에 왔다. 귀국한 대가족이 농사지을 밭 한 고랑 없어 산지를 일구거나 소작을 얻어 겨우 입에 풀칠하던 터라 유년을 무척 어려운 여건에서 보냈다. 전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지역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지만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가난 때문이었다. 그 후 인근 여기저기서 한학을 배우기도 하고 도시에 나가 점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맏이를 계속 공부시키지 못한 데 대한 부모로서의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사셨다. 학교 다닐 때 총명하여 우등상을 놓치지 않았던 형님한테는 공부 운이 따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오늘 이렇게 별 탈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많은 부분 형님 내외분의 보살핌 덕분임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초등학교 졸업 후 일 년 동안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우면서 지냈다. 이런 나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마음도 편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때 마침 형님이 군에서 제대하고 돌아왔다. 어떤 계기가 작용했는지는 모르지만, 형님은 '사람은 배워야 한다'라는 신념을 나에게 반복해서 주입했다. 나는 형님의 독려로 진학 준비를 했고, 마침내 대구 어느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그 이듬해 봄, 우리 집 소유의 유일한 논 삼백 평을 팔아 입학금을 마련하고 유학길에 올랐다. 이때 형님은 이미 결혼하여 조카까지 태어났는데도, 아내와 아들을 고향에 두고 나와 함께 객지로 나왔다. 나는 운 좋게도 형님의 도움을 받아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공부까지 마칠 수 있었다. 어머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한테 '형의 은공'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당부했다. ​

​ 형님은 군 제대 후, 도시에서 직장을 구해 자리 잡으려고 했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나와 함께 시작한 형님의 객지 생활은 오 년이 안 되어 끝났다. 맏이로서 병석에 계신 아버지를 돌보고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다. 아직도 조상 기제사를 ‘자시(子時)’에 지내기를 고집한다. 내일 출근할 시동생과 아들의 편리를 위해 초저녁에 지내자는 형수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동생과 자식 사정은 이해하지만, 전통과 원칙을 지키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이웃이나 주위 사람에게 융통성 없이 깐깐하게 대하는 것은 아니다. 남과 잘 어울려 놀기도 좋아한다. 명절 때면 멀리 있는 일가친척에게 일일이 전화로 인사를 빠트리지 않을 정도로 예의범절이 몸에 배여있다. 특별한 이념이나 종교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정치나 사회에 대한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펼치기도 한다. 언제나 새벽에 일어나 들로 나간다. 재물을 모으려고 욕심을 부리거나 농사 외에 다른 것을 크게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는 부지런하고 소박한 농부다.

추석날이었다. 마을을 지나 산골짜기에 있는 오미자밭으로 향했다. 집집이 고향을 찾은 사람들의 자동차가 즐비했다. 하지만 허물어져 가는 빈집이 곳곳에 있었다. 잡초 무성한 옛 집터도 눈에 들어왔다. 삼십 호에 가까운 마을이 이제는 열 집 정도가 남았다고 한다. 모두 무엇을 찾아 어디로 떠났을까? 골짜기에 접어들었다. 예전에 죽을힘 다해 일구었던 전답도 잡목이 우거져 산으로 변했다. 마을과 산야가 마치 알맹이 빠져나간 거푸집 같았다. 그렇지만 이 거푸집이 있었기에 떠난 자들의 성공과 영광도 가능했으리라. 오미자밭에는 빨갛게 잘 익은 송이가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 말에 따르면, 덩굴과 잎 속에 묻혀있는 오미자 송이가 햇빛에 드러난 것보다 알도 더 충실하고 색깔도 더 곱다고 한다. 그렇다. 형님의 인생이 덩굴 속에 묻힌 오미자가 아니겠는가? 동생과 자식들 뒷바라지에 힘을 쏟느라 정작 자신의 욕망은 챙기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겉은 거푸집처럼 보이지만 형님의 삶은 덩굴 속에서도 잘 익은 오미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나한테 가장 신나고 보람 있었던 일은 아마도 오미자 중개상 노릇이 아니었던가 싶다.

 

수필집 '기억의 윤리' 수필미학사. 2014. 2. 20.

 

농촌의 실상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지 싶다. 나도 매년 감자 수확기가 되면 어설픈 중개상 노릇을 해왔다. 판로가 없는 시어머니께 감자 값을 지불하고 가져와 지인들에게 한 박스씩 돌렸다. 올해는 하지夏至가 지나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몇 주 전에 갔더니 창고가 휑뎅그렁했다. 씨를 뿌렸다하면 풍작이라 ‘어머님 손은 마이더스의 손’이라며 우스개를 했는데 작황이 너무 나빴단다. 씨알도 잘뿐더러 소출조차 적었다고. 차라리 잘됐다 싶으면서도 빈 창고를 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수년 동안 정으로 나누던 지인들한테 줄 것이 없어 난감했다. 그렇다고 감자농사를 망쳤다는 말을 하려니 그 또한 객쩍은 변명이란 생각에 관두었다.

'형님과 오미자'를 읽는 마음이 훈훈하다. 짠맛, 쓴맛, 신맛, 매운맛, 단맛. 다섯 가지 맛이 난다하여 이름 붙여진 '오미자'처럼 진한 형제애를 느끼게 해준다. 알알이 영근 ‘오미자’가 열매의 존재를 뛰어넘어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하게 만드는 매개체다. 흔히들 맏이를 집안의 대들보라 하던가. 아버지의 부재는 자식들에게 고난을 강요한다. 특히 장남은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수반하는 자리다. 그만큼 자릿값이 무겁기 마련이고 어떤 형태로든 만만찮은 책임이 뒤따른다. 불평불만이 있더라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형제간의 사랑이 지극하여 기껍게 읽힌다. ‘가장 신나고 보람 있었던 일’ 마지막 한 행이 많은 것을 대변해주고 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