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의 금강산, 화왕산 관룡산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관룡사(觀龍寺)
경남 창녕의 금강산, 화왕산 관룡산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관룡사(觀龍寺)
  • 장희자 기자
  • 승인 2020.06.26 1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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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 산세와 기암괴석이 일품인 관룡산 중턱에 위치
신라시대 8대 명찰로 보물 6점, 지방문화재 5점 보유
창녕의 금강산이라 불리우는 구룡산 병풍바위 비경 조망
경남의 또 다른 경주라 불리우는 창녕의 불교예술 역사박물관
구룡산 병풍바위를 배경으로 자리잡은 관룡사는 경남의 전통사찰 1호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인 가치가 높은 명찰이다. 장희자 기자

관룡사(觀龍寺)는 경남 창녕군에서 동쪽으로 이십리 떨어진 옥천리 소재 관룡산 중턱 해발 36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태백산맥이 영남으로 흘러 팔공산과 비슬산을 만든 다음 낙동강과 나란히 달리면서 다시 크게 솟구친 산이 바로 화왕산줄기이다.  관룡산은 화왕산의 동쪽으로 이어진 산봉우리로 수려한 산세와 기암괴석이 일품이여서 창녕의 금강산으로도 불린다. 이런 비경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사찰이  관룡사이다.

범종루안에 있는 목조사자고대(木造獅子鼓臺)에 올려진 법고로 모양이 독특하다. 장희자 기자

절의 명칭 ‘관룡’은 증법국사가 사찰을 지을때 화왕산 정상의 월영삼지(月影三池)에서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는것을 보고 지었다는 설과, 삼국통일 이후 원효대사가 제자인 송파와 함께 백일기도를 드리는 중, 아홉마리 용이 승천하였다는 구전이 있다. 이 때문에 관룡사 뒷산 왼편은 관룡산, 오른편은 구룡산으로 불리고 있다.

설법을 하는 장소로 쓰이는 원음각(경남 문화재자료 제140호), 예전에는 누각을 거쳐 대웅전마당으로 출입하다. 장희자 기자

절의 창건에 대해서도 두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약사전의 묵적(墨蹟)인 ‘영화오년기유(永和五年己酉’에 따라 349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연대는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법흥왕 15년(528)보다 앞서는 것으로 신빙성이 의문시 된다.

대웅전 동편에 있는 함월당(含月堂)으로 스님들의 수행공간이다. 장희자 기자

둘째 「창녕군지」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 5년(583)에 증법국사(證法國師)가 초창했다는 설이다.

대웅전(보물 제212호),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 산세와 잘 어울리면서 이 절의 중심을 잡아주는 둣 하다. 장희자 기자

이때 관룡사는 신라의 8대 종찰의 하나로 원효대사가 제자 천여 명을 데리고 화엄경을 설법한 도량이였다고 한다.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대좌(보물 제1730호), 불상들은 얼굴형이 네모나고 인상이 약간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한 표정으로 보인다. 장희자 기자

비록 관룡사의 정확한 초창연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으나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던 고찰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대웅전안에는 관음보살벽화(보물 제1816호) 등 예술성이 높은 여러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장희자 기자

그 뒤에 고려시대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다만 현재 관룡사 경내에 있는 부도(경남 문화재자료 제19호), 약사전내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19호)과 석조(石槽) 등은 고려시대 유물로서 고려시대에도 사찰이 잘 경영되었음을 입증해 준다.

대웅전 서편의 안양료(安養寮)는 종무소로 행정사무를 보는곳이다. 장희자 기자

1965년에 발견된 ‘대웅전상량문’에서 초창(1401), ‘약사전 상량문’에서 약사전 재창(1507)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시대 창건이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초에 사찰의 재건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때 유일하게 남은 약사전(보물 제 146호)과 삼층석탑(경남 유형문화제 제11호) 전경. 장희자 기자

 다시 임진왜란의 피해를 입어 불전, 승사 등이 불에 타버리고 유일하게 약사전만 남아있다.

약사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19호)은 영험한 소문이 돌아 자녀 입시철이면 부모님 기도가 줄을 잇는다. 장희자 기자

그후 1733년에 발간된 관룡사 사적기에 ‘조선 숙종 30년(1704) 가을에 큰비가 내려 금당과 부도 등이 유실되고 승려 20여 명이 익사하는 참변을 당한 뒤 숙종 38년(1712)에 대웅전 등을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 영조 25년(1749)에 기존 전각을 중창했다

대웅전 좌측 언덕에 있는 건물로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측에 관음보살, 우측에 대세지보살 봉안. 장희자 기자

20세기에는 6.25전쟁 때 관룡사 일대가 북한군의 집결소가 되어 폭격으로 팔상전이 전소하고  대웅전 일부도 파괴되어 1956년 보수하였다.

대웅전 동쪽에 위치하며 대들보를 자연상태의 만곡재를 써서 목조건축의 미를 살렸다. 장희자 기자

1963년에는 대웅전을 보물 제212호로 지정헸다.    1965년 7월에는 해체보수 및 단청을 하였다.

구룡산 병풍바위 아래 산자락들이 모여 이룬 아늑한 터에 솔숲·대숲과 어울려 자리잡았다. 장희자 기자

1968년 요사채를 이건, 1978년 대웅전 번와보수, 1988년 부식재교체 및 번와보수를 실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 비탈의 경사면을 경영하여 건물을 배치해 경내는 좁아 보이지만, 그대신 경내에서 올라보는 경관은 장엄하다. 장희자 기자

경내에는 신라 8대 명찰이라는 명성답게 보물과 문화재가 즐비하여 약사전(보물 제 146호), 약사전석조여래좌상(보물 제519호), 대웅전(보물 제212호), 대웅전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대좌(보물 제1730호), 관음보살벽화(보물 제1816호),  용선대석조여래좌상( 보물 제295호), 약사전 삼층석탑(경남 유형문화제 제11호), 관룡사 사적기(경남 유형문화제 제183호), 관룡사 석장승(경남 민속문화제 제6호), 관룡사 원음각(경남 문화재자료 제140호), 관룡사 부도(경남 문화재자료 제19호) 등이 있다.

지형과 지세에 따라 달리하며 건물을 내려다 보는 경관이 탁 트였다. 장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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