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㉗손길 안 닿은 흙은 없었다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㉗손길 안 닿은 흙은 없었다
  • 정재용 (엘레오스) 기자
  • 승인 2020.06.19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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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파먹고 살다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농부
밤이면 흙에 단련된 팔로 아내를 품었다

이광수의 ‘흙’이나 박경리의 ‘토지’나 펄벅의 ‘대지'(大地) 모두 인간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삶을 다룬 소설이다. 성경은 사람 자체가 흙에서 왔다고 한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고 했다. 그가 최초의 사람 ‘아담’(אָדָם)이다. ‘아담’은 땅 또는 흙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다마’(אֲדָמָה)에서 왔다.흙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흙을 파먹고 살다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게 정한 이치였다.

소평마을 사람들이 그러했다. 흙집 지어 잠을 자고, 자식 낳고, 흙 위에 논농사 보리농사 지어 먹고 살다가, 죽어 어래산 흥덕왕릉 부근 능곡(陵谷) 공동묘지에 묻혔다.

마당 없는 집은 없었다. 마당은 멍석을 깔면 안방이고, 밥상을 차리면 식당, 목침을 베고 누우면 침실이었다. 여름이면 잠 잘 때만 방에 들어가지 생활은 주로 마당에서 했다. 하늘을 천정 삼은 거실이었다. 그늘 찾아 멍석을 집 뒤뜰에 폈다가 해가 지면 앞마당으로 옮겨 저녁 먹고 이야기 잔치를 벌이다 자러 들어갔다.

아기는 어른이 한 눈 파는 새 멍석 밖으로 기어나가기 예사였다. “닭똥 주워 먹으며 큰다”는 말이 그런데서 나왔다. 아이들은 집 마당이나 ‘미뿌랑’ 놀이터에서 구슬치기, 땅따먹기, 고무줄놀이, 자치기, 사방치기, 딱지치기, 짜개받기 따위의 놀이를 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모두가 흙 위에서 벌어지는 놀이였다. 손발과 옷이 흙먼지로 범벅이 됐으나 툭툭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잔병치레도 크게 하지 않았다.

1985년 여름, ‘고래전’ 멀리 무릉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1985년 여름, ‘고래전’ 멀리 무릉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아이들이 마당에서 논다면 어른들은 눈만 뜨면 논에 가서 살았다. 농사짓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흙과의 씨름이었다. 농부에게서 논은 ‘소가 비빌 언덕’이었다. 광부의 광산, 어부의 바다, 염부의 염전이었다. 농부의 재물과 명예와 생명과 인간의 존엄과 등등 모든 것은 논에서 나왔다. 보리농사 벼농사의 진척도와 작황에 따라 농부와 가족들은 웃고, 울고, 화내고, 슬퍼했다.

쟁기로 논을 갈 때면 날을 약간만 젖혀도 논둑을 갉아 먹고 흙 한 삽을 어디에 붙이느냐에 따라서 길이나 도랑을 야금야금 침범했다. 논둑은 항상 아래 둑이 자기 둑이었다. 밑의 논 주인이 쟁기 날을 잘못 젖히면 자기 논둑이 무너지기 때문에 농부는 말뚝을 깊이 박아, 파고 들어오는 것과 무너지는 것을 예방해야 했다. 논둑을 하면서 진흙을 삽으로 매만지고 손으로 쓰다듬어 볼록하게 만들었다. 논두렁콩 심을 자리였다.

모내기 하는 날은 하루 종일 손으로 흙을 주무르고 발로 흙을 밟는 시간이었다. 못자리에서 모를 찌느라 모의 뿌리를 잡은 두 주먹으로 흙을 문지르고, 모를 심을 때는 모를 잡은 다섯 손가락을 진흙 속에 꽂아 넣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모와 모 사이는 가로 세로 한 뼘 남짓이었다. 못줄이 넘어가면 일꾼들은 뒷걸음으로 그 만큼 물러났다. 발가락 사이를 비집고 진흙이 올라왔다.

모내기를 마친 이튿날 혹은 사흘 째 되는 날, 농부는 지게를 지고 논을 둘러보러 나갔다. 모가 뜬 데는 없는지 한 바퀴 둘러보고는 논둑에 논두렁콩을 심었다. 지게 작대기로 구멍을 내고 콩 두 알을 떨어뜨린 후 재거름으로 구멍을 막았다.

논에 비료를 주거나 제초작업을 할 때도 맨발로 벼 포기 사이를 헤집고 다녀야 했다. 초벌과 두벌매기는 제초기를 벼 포기의 가로 세로로 다니며 밀고, 세벌 논매기 때는 제초기 없이 손으로 논바닥을 휘저어 수초를 뽑아 논둑으로 내거나 뽑은 자리에서 진흙에 거꾸로 처박아 묻었다. 방도사니, 올방개(‘올미’라고 불렀다), 부레옥잠, 가래, 물달개비, 물옥잠, 물질경이 등이었다. 피사리할 때도 ‘고래전’ 논은 장딴지까지 빠졌다.

농부는 모내기부터 벼를 베 낼 때까지 온몸을 흙과 부대끼며 살고 흙은 그런 농부의 얼굴에까지 튀어 올랐다. 농부는 진흙탕에 넘어져도 웃고, 바소쿠리에 담아 지고 가던 마른 흙이 머리 위로 쏟아져 흘러내려도 탓하지 않았다. 흙은 농부의 분이었고 허물없는 고향친구였다.

미꾸라지 잡을 때는 흙 한 줌 한 줌을 손으로 뒤졌다. 호미로 밭을 일구듯, 고구마 캐듯 진흙을 손으로 젖혀 가면 그 속에 숨어 있던 미꾸라지가 튀어나와 꾸물거렸다. 가끔 뱀장어도 나오고 말조개도 나왔다.

어쩌다 먹던 음식이 마른 땅에 떨어지면 재빨리 주워서 입으로 훅훅 불어서 먼지를 털어내고는 다시 먹었다. 과일은 옷에 쓱쓱 닦으면 됐다. 타작을 마당에서 하면 벼, 밀, 콩, 팥, 조의 낱알이 땅바닥에 뒹굴었다.

1973년 6월, 모내기를 앞둔 무논과 양동산. 정재용 기자
1973년 6월, 모내기를 앞둔 무논과 양동산. 정재용 기자

소평마을에는 연중행사처럼 한 두 차례 태풍이 찾아들었다. 그때마다 들판은 호수로 변했다. 앞도랑, 샛도랑, 앞거랑 물이 큰거랑으로 모여들어 형산강으로 흘러갔다. 문제는 포항 앞 바닷물이 역류하는데 있었다. 형산강 물은 가뜩이나 좁은 수로에 범람하기 마련이었다. 시시각각 마을로 차오르는 큰물에 흙 담이 무너지고 흙집의 기둥이 넘어졌다. 마을사람들은 서둘러 6.25 전쟁 피란(避亂)을 가듯 이불보따리를 짊어지고 북부학교로 물 피난(避難)을 갔다. 홍수는 여러모로 폐해를 주지만 도움도 줬다. 황톳물이 빠지면서 가라앉은 앙금이 논을 채웠다. 양동들이 한들이나 모래골, 야마리에 비해 비옥한 이유였다.

마을에 초상이 나면 채로 친 흙을 창호지에 싸서 시신 좌우에 넣었다. 관이 움직일 때 시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다던가, 죽어서도 함께하는 것은 흙이었다. 피와 눈물과 땀을 흘려 가꾸던 흙에 둘러싸여 땅속에 묻혔다. 옛날 북간도로 떠나는 사람들의 이삿짐 속에 고향의 흙을 담은 항아리가 있듯 농부에게서 흙은 고향이고, 조상이고, 생명이고, 삶이고, 존재 자체였다.

소평마을 주위 그 너른 들판에 농부의 손길이 안 닿은 흙은 한 줌도 없었다. 밤이면 농부는 흙에 거칠어진 손으로 구약성경 ‘아가’(雅歌)에서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듯 아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왼팔로는 나의 머리를 고이시고 오른팔로는 나를 안아 주시네” 품에 안긴 아내는 행복했다. 머리를 맞대고 엎드려 있는 초가지붕 위로 은하수가 출렁거리며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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