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 시대, 구걸하는 노인을 보며
백세 시대, 구걸하는 노인을 보며
  • 허봉조 기자
  • 승인 2020.06.16 15:3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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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무료한 시간과 주변으로부터 소외감 느끼는 노인
경제적 혜택과 마음의 곳간을 채워줄 정서적 안녕도 중요

들릴 듯 말듯 발길을 돌리게 했던 가느다란 음성은, 많은 인파가 오가는 버스정류장 주변에서 들려왔다.

6월 초순의 따가운 한낮, 버스에서 내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던 중 누군가 말을 건네는 것 같은 느낌이 전해졌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보았다. 왜소한 체구에 남루한 복장, 작은 종이상자 하나가 실린 리어카를 끄는 노인이었다.

"아주무이요,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빵 사먹을 돈 한 푼만 보태주이소."

외면하고 돌아섰다. 서너 발자국을 지나 '마트'라는 작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빵을 사드리면 될 것을! 다시 발길을 돌려, 노인의 팔을 이끌며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어르신, 저기 가게에 가서 빵을 사드릴게요."

"아니!"라며, 노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배가 고프다면서요."

"그래도, 가게에는 안 가요."

"왜요? 빵 많이 사드릴게요."

"빵이 아니라, 빵 사먹을 돈이 필요하다니까."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배가 고프다면서, 빵이 아닌 돈을 달라니.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나약해 보이는 노인이어서 그랬는지 평소와 달리 마음 한구석 잔잔한 물결이 쉴 새 없이 파도를 일으켰다.

연배가 높은 지인을 만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하면서도 끝내지 못한 숙제라도 남겨둔 것처럼 기분이 개운하지 못해, 참회하듯 그런 일이 있었노라고 실토했다. '앞으로도 그런 사람을 만나면, 아무 생각 말고 손에 집히는 대로 돈을 건네주라'는 충고가 돌아왔다. 만약 그랬더라면 그렇게 마음이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필요한 것이 빵이 아니라 술이었다면, 또는 그 자체가 일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들어가며 진솔한 의견을 나누었다.

우리나라는 65세 이상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 이상을 차지하는, 고령사회다. 밖에 나가보면 정말 노인이 많다. 지하철은 말할 것도 없고, 공원이나 철도역사 등 공공시설의 기다란 의자에도 노인들이 무리지어 앉아있거나 서성이는 풍경이 쉽게 눈에 띈다. 더러는 공원 벤치에서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모습이 즐거워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모인 노인의 상당수가 은퇴 후 마땅한 일이 없어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 같다. 등허리가 꼿꼿한 몸 상태로 보아 적당한 일이 있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더욱 안타깝다.

노인(65세)이 되면, 여러 가지 복지혜택이 있다. 기초노령연금에 지하철과 도시철도, 국·공립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의 입장료가 무료다. 국내선 항공기와 국내여객선 요금이 할인되고, 공연장이나 국·공립 국악원과 공원 또는 영화관도 할인이 적용된다. 틀니와 임플란드(2개) 할인도 있다. 그밖에도 가까운 주민복지센터를 찾아가보면, 더 많은 혜택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경제적 혜택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백세 시대의 숙제가 아닌가 싶다. 때로는 노후준비의 여유를 갖지 못한 세대의 노인들 앞에 경외감마저 들 때가 있다. 가족을 위해 혼신을 다 바쳤던 시간이 지나고, 주변의 관심으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할 일 없이 긴 시간을 보내야한다는 것이 얼마나 막막하고 힘든 일인지.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병들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을 대하는 일부 젊은이들의 시선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무엇을 바라보듯 음울하고 냉소적이라는데 노인들은 더 큰 서글픔을 느낀다.

살아갈 날이 많은 노인들에게 경제적 혜택은 매우 중요하다. 더불어 노인들의 허허로운 마음의 곳간을 채워줄 정서적 안녕 또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역량이 손을 맞잡아야 할 일인 것 같다.

노인들이 스스로 웅크리지 말고, 활기를 찾아 움직여야 한다. 이제 와서 주변을 밝히는 등불이 될 수는 없더라도, 사회를 침울하게 만드는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불특정다수의 왕래가 많은 복잡한 장소보다는, 공기가 맑고 조용한 곳에서 적당한 여유를 즐기는 것도 좋겠다. 아울러 공공기관이나 사설단체 등으로부터의 각종 복지혜택을 제대로 활용한다면, 뭇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구걸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낙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