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진골목 명소 '미도다방' 정인숙 사장
대구 진골목 명소 '미도다방' 정인숙 사장
  • 박영자 기자
  • 승인 2020.06.11 14: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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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숙 사장이 분홍빛 고운 한복을 차려 입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박영자 기자
정인숙 사장이 분홍빛 고운 한복을 차려 입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박영자 기자

 

대구경북의 문인, 예술가, 유림 중에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라면 미도다방(대구 중구 종로 진골목길·사장 정인숙·69)을 모르는 분은 아마 없을 것이다.  대구경북 시니어들의 사랑방이요,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나 외국인들에게도 명소가 되었다. 수십 년째 이 골목에서 어르신들을 모셔 왔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사장이 향기 그윽한 쌍화차를 내고, 바삭바삭 달콤한 과자는 추억을 소환해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1980년대 사시사철, 특히 여름엔 모시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쓰고 흰 고무신에 대님을 단정히 멘 어르신들이 밀양, 상주, 성주, 안동, 영주, 봉화 등지에서 수시로 모여들었다. 정인숙 사장은 그 추억의 다방에서 43년째 '안방마님'으로 살고 있다. 강산이 4번이나 바뀌었다. 

◆풍족한 가정 7남매의 맏이
청도군 풍각면이 고향인 정 사장은 어린 시절 유복한 가정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할아버지가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왔고 할머니가 진주여고를 나온, 일찍 개화한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풍각 송서교회에 땅을 기증하였고, 삼촌은 풍각고등공민학교를 창설, 국가에 기증했다. 
풍족한 가정의 장손이었던 부친은 평생 직장없이 재산관리와 가문만 지켰다. 대농만 하다가 빚보증으로 재산을 다 잃어버리는 바람에 가산이 기울어졌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가셨다. 7남매(3남4녀)의 맏이였던 정 사장은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했지만 문학소녀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대학 국문과를 포기했다. 그리고 동생들을 위해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다.

미도다방 내부.  박영자 기자
미도다방 내부. 박영자 기자

 

첫 직장은 피아노회사 경리직이었다. 월급 3천원이었다. 그나마도 두 달만에 7천원을 물어주고 나왔다. 다방 여종업원 일을 시작했다. 당시 월급이 2만 원이라는 데 철없이 혹했다. 동생들을 모두 데리고 남의 집 살이를 하면서 받은 설움이 하도 많아 얼른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몇 년을 하고 나니 대구 대명동에 주택을 살 수 있었다. 고생 고생해서 동생 여섯을 공부시키고, 결혼도 다 시켰다. 
자신은 고모의 중매로 5남매 맏이에게 시집 와서 아들 1명을 낳았다. 아들은 결혼 후에도 정 사장과 한 집에 살고 있다. "아들 내외가 효자 효부라 10년을 함께 살고 있으나 한 번도 얼굴 붉혀 화내 본 적이 없어요. 다 우리 며느리가 착해서 그런 것 아니겠어요? 재미있고 행복합니다. 손자(8세) 손녀(6세)와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데는 남편도 한몫을 한답니다. 나이 들어 마땅히 할 일도 없으니 집에서 아이들과 잘 놀고 있지요."

미도다방은 대구의 명소 진골목에 있다.  박영자 기자
미도다방은 대구의 명소 진골목에 있다. 박영자 기자

 

◆어르신들의 사랑방이 되다 
미도다방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어르신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옛날 어르신들은 누런 족보를 들고 와서 가문 자랑, 양반 자랑, 문집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했다. 퇴계 선생 이야기부터 성리학 유교 이야기까지 주제가 무궁무진했다. 인내가 필요할 때도 있었다. 누구의 몇 대 손이라는 둥하며 각자의 조상들 이야기가 나오면 날 밤을 새기도 일쑤였다.
힘이 들기도 했으련만 정 사장은 오히려 그런 게 참 좋았단다.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있었어요. 어느 곳에 가서 그런 좋은 강의들을 들을 수 있었겠어요? 덕분에 감사하게 생각하며 제 인격 형성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시내 여관에 아예 자리를 잡아놓고 다방을 이용하는 손님들도 있었다. 20여 명씩 모여서 학문을 논하다가 마지막엔 바둑을 두면서 밤을 샌다. 그 자리에는 정 사장도 불려가서 율무차나 약차를 대접하며 과자나 간식거리로 어르신들의 곁을 지켰다.
"외식하는 것도 요즘처럼 흔하지 않을 때였지요. 시내 덕산빌딩 옆 산마을 식당에서 회식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저를 부르십니다. 부르면 가서 서빙하고 고기 잘라주고 딸처럼 비서처럼 사랑도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종업원 아가씨가 차를 가져와서 차도 팔았죠. 커피 한 잔에 200원 할 때였는데 어떤 분은 아예 10만원을 맡겨 놓고 '정 사장이 다 알아서 해주시오'하기도 했습니다."
대구가 아닌 객지에서 오신 분들은 며칠씩 놀다 여비가 떨어지면 돈을 빌려 가기도 했다. "5천 원 ,만 원씩 푼돈도 제법 나갑니다. 돈을 되돌려 받은 기억은 없어요. 딸이 아버지께 용돈 드렸다고 생각하고 나면 기분이 그냥 좋아요. 대구에 자식들이 있어도 돈 달라는 소리를 못해서 나한테 빌려서 차비를 하는 어르신들이죠. 우리 가게에는 항상 밥솥에 밥이 가득합니다. 어르신들이 여기서 밥 드시기를 좋아해서죠. 집에서 끼니 해결이 안 된 독거노인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어르신들께 봉사하는 맘으로 살아온 것 같습니다."
어르신들도 가만 있지는 않았다. 대구에 올 때는 돈이 아닌 계란 한 꾸러미, 끝물에 딴 풋고추, 대봉감 몇 개, 고구마, 씨감자 등을 비닐봉지에 담아 와 아버지가 딸네집에 가져다 주듯이 가져온다. 
나이 든 어르신들이 자주 찾다 보니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적지 않다. "한 어르신이 의자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게 아닌가요. 하도 이상해서 옆에 갔더니 냄새가 진동을 했어요. 의자에 앉은 채로 '큰일'을 보신 거죠. 일어나 집까지 갈 수도 없고 집에 가도 아무도 없으니 난감했던 모양입니다. 제 아버지라 생각하고 연탄불에 물을 데워 씻겨 드리고 차비 5천원을 드렸습니다. 냄새가 얼마나 독한지 파란색 우단 의자를 씻어서 옥상에다 말렸는데 6개월이 되어도 냄새가 계속 나서 의자를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흔 넘은 노인들도 오셨으니 그럴 수도 있지 한답니다."

◆봉사활동 '미도봉사회'
정인숙 사장은 20년 전 봉사를 시작했다. 처음 6명의 지인들과 함께 '미도봉사회'를 결성해서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대학을 못 간 자신의 한을 푼다는 심정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지금은 180여 명의 후원회원과 일반회원으로 있는 큰 조직으로 성장했다. 정 사장은 미도봉사회 회장을 맡고 있다.  4명의 고등학생에게 장학금(120만원씩 3년)을 주고 독거노인 7명에게도 1년에 60만원씩을 드린다. 다문화가정, 새터민, 우수학생 등에게 장학금을 지원한다.

미도다방의 대표 메뉴 쌍화차.  박영자 기자

 

단골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옛날과자는 무한리필이다.  박영자 기자

 

연 3차례 어르신들을 모시고 버스 대절해서 문화탐방도 한다. 92세 노인도 있는데 나들이할 때는 1대 1로 회원들이 하루동안 남친 여친이 되어 노노케어를 한다. 어르신들이 제일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다. 푸짐한 선물과 놀이 탐방을 하는 것이 정말 보람되다고 한다. 올해 행사는 6윌 29일로 계획하고 있다. 몇 분이나 참가할까, 어떤 프로그램으로 즐겁게 해드릴까 기대하니 벌써 맘이 설렌단다. 
정 사장의 남을 먼저 생각하는 봉사정신은 어릴 적 고향 청도에서 이미 자라기 시작한 것 같다. 아홉 살 때였나. 어느 날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친구가 밥을 먹고 있는데 반찬은 없고 소금 하나가 전부였다. 그 모습을 보고 엄마 몰래 간장을 퍼다 주었는데,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엄마에게 혼쭐이 났다. 어린 아이가 간장을 뜬다고 다리를 들고 머리를 거꾸로 커다란 간장 독에 처박다 장독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고 혼을 낸 것이었다. 그 후로 엄마는 가끔 쌀과 간장 된장 등 먹을 것들을 그 친구에게 갖다주라고 하셨다. 자신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친구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몇 년 전 텔레비전 출연할 일이 있어 집을 나서려는데 예전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사는 그 친구는 예전 정 사장이 간장과 쌀 등을 줘서 정말 고마웠다고 옛날을 상기했다. 
정 사장은 미도봉사회 외에도 다양한 봉사단체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회원 수가 7천500여 명에 이르는 휴게음식업커피협회 지회장과 춘추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삼보연(삼일보국연합회) 재정위원장 직도 수행하고 있다.

◆지금도 배우며 공부하며 살아요

정 사장은 5년 전 늦깎이로 영진전문대학 사회복지과를 64세에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여전히 공부에 대한 갈증은 강렬하다. 치매 예방에 관심이 많아 남아 있는 시간에는 박사과정까지도 공부하고 싶다고 한다. 나이 들면 악기 들고 놀려고 크로마하프에 흠뻑 빠져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수필도 몇년째 열심히 배우고 있으며 요즘은 시낭송 봉사를 한다. 바쁜 중에도 부르면 어디라도 열일 제치고 간단다.
아마도 인간 정인숙은 미도다방의 단골손님이던 영남지방 양반들의 정신을 많이 보고 들어서 어린 시절부터 우리의 전통을 존중하고 봉사와 섬김을 배운 것이 아닌가 싶다.

 

한복이 불편하지 않느냐 했더니 우리 것이어서 좋고 나만이라도 입어야 하지 않겠냐며 반문한다. 조신하게 말을 하고 있는 우아한 모습에서 천사를 보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다방을 할 것이냐고 하니 '여기가 내 놀이터이니 손님 한 분이 오셔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문을 활짝 열어 놓겠다'고 한다.
미도다방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면 서예나 그림, 사진 등 온갖 작품 액자들이 벽마다 가득하다는 걸 금방 발견할 수 있다. 작품들은 모두 다방을 찾는 단골 손님들이 두고 간 것들이다. 자신의 작품이 미도다방 벽에 걸리는 걸 '영광'으로 생각하는 어르신들이 종종 기증한다고 했다. 주고 가신 작품은 그게 좋든 나쁘든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잘 간직하고 있다. 세월의 흔적을 볼수있는 작품 전시장으로서 손색이 없다. 복고풍의 별의 별 것들이 많아 추억 속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다.
"미도다방을 자신들의 아지트처럼 이용하던 초창기 담수회 어르신들도 이제는 다 돌아가시고 그들의 자식, 손자들이 이용하니 세월의 흐름의 느껴집니다. 내가 벌써 70을 바라보니 지는 해는 잡을 수가 없나 봅니다. 그래도 양반을 논하고 효를 가르치던 유림들이 찾던 그 시절이 좋았습니다." 
대구 진골목을 찾는다면 정인숙 사장이 지키고 있는 미도다방에 들러 달콤한 옛날과자와 계란노른자 동동 띄운 쌍화차 한 잔 하고 가면 어떨까.

진골목 미도다방에 가면
가슴에 훈장을 단 노인들이
저마다 보따리를 풀어놓고
차 한 잔 값의 추억을 판다

가끔 정 여사도 끼어들지만
그들은 그들끼리 주고 받으면서
한 시대의 시간벌이를 하고 있다

-전상열 시인 '미도다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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