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달] 베트남 전쟁, 그리고 대한민국...10년의 기억
[호국보훈의달] 베트남 전쟁, 그리고 대한민국...10년의 기억
  • 은종태 기자
  • 승인 2020.06.1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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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베트남 전쟁은 기본적으로 1960년 결성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이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해 북베트남의 지원 아래 남베트남 정부와 이들을 지원한 미국과 벌인 전쟁이다.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벌인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1946~1954)과 구분해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도 하며, ‘월남전’이라고도 한다. 1975년 4월 30일까지 지속되었다. 초기에는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 사이의 내전이라는 성격을 띄었으나, 1964년 8월 7일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북베트남을 폭격한 뒤에 전쟁은 북베트남과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첫 해외파병

베트남 전쟁은 대한민국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전쟁이었다. 당시 중국, 소련, 북한은 북베트남(월맹군)을 지원하였고 미국, 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등 자유 우방국가들은 남베트남을 지원하였다. 한국 정부는 1960년 먼저 파병을 제안한 바 있으며, 1963년 9월 남베트남의 지원요청으로 130명 규모의 의무부대와 10명의 태권도 교관 등 비전투요원을 파견했다. 이후 주월 한국군사령부, 육군의 맹호부대, 해병대 청룡부대, 비둘기 부대, 백마부대, 백구부대, 은마부대, 십자성부대, 공수지구대(현 특전여단) 등 전투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하였다.

파병기간은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이며 파병 의무기간은 1년이었다. 1965년 3월 제6사단 사령부 비둘기부대 창설 전투병력 파병을 시작으로 1968년 이후 베트남에 주둔한 한국군은 평균 5만여 명을 유지하였고, 1965년 11월 1일 맹호부대 파견 등 파견 병력 누계는 32만여 명이었다. 

 

◆5천여 명 사상, 1만5천여 명 부상

미군과 남베트남 정부군은 자유우방국들의 지원으로 한때 막강한 화력으로 빼앗겼던 도시와 시설들을 탈환했지만 미국 내 반전여론과 월맹군의 게릴라전 등 요인으로 전쟁이 장기화하였다. 베트남에 대한 군사개입의 중단을 내세운 닉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마침내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평화협정을 체결한 뒤 미군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으며, 결국 북베트남은 1975년 대규모 공세를 벌여 그해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현 호치민)을 점령했다. 사이공이 점령된 뒤 남베트남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976년 7월 2일 지금의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베트남전이 종식되었으며, 베트남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전쟁 결과, 북베트남군(월맹군)은 4만1천여 명이 전사하였으며, 한국군은 5천여 명의 사상자(전사, 실종), 1만5천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미군은 5만8천여 명의 사상자(전사, 실종), 20만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파월 한국군의 대우는 보급과 수당면에서 미군은 물론이고 다른 참전 연합국에 비해서도 좋지 않았지만, 한국군의 베트남전 사상자 교환비율이 1대 24로 미국의 1대 9보다 크게 앞설 정도로 한국군의 전과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한국군 전력 증가 경제개발 발판

한국군의 월남 파병 배경을 살펴보면, 파병에 대한 보상조치로 브라운 각서(미국의 추가파병 요청과 그에 따른 보상조건 각서)와 월남 특수를 통한 경제성장이었다. 미국의 추가파병 요청은 한국군의 전력 증강과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차관공여 약속이었다.

파병된 병사 및 단기하사의 월급은 참전용사의 기억에 의하면 100~110$ 수준이었다. 53~56$은 한국 정부가 지급하였고, 생명수당 53~56$은 미국에서 지급하였다. 장기하사에 대하여는 월급 및 생명수당 뿐만 아니라 2호봉을 추가하는 특전이 있었고, 진급에 유리하게 적용되었다.

대한민국은 베트남 참전결과 약 10억 달러의 외화획득으로 연평균 12%의 경제성장율을 달성하였다. 파병에 대한 보상조치로 미국은 한국군 병사에게 2억3천600만$를 지불하였고, 대한민국 GNP는 파병 이후 5배의 성장을 이루었다.

 

◆미국의 용병 논란 파병의 후유증

베트남 파병은 한국 역사상 초유의 해외전쟁 참전으로서 국제사회로부터 용병이라는 비난이 있다. 파월장병들에 의한 현지처와의 2세 문제도  있다. 인권단체(라이따이한을 위한 정의)의 주장에 의하면 상당수의 피해자가 생존하고 있다고 한다. 인권단체는 배상요구보다는 사건을 인정하고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1964년 7월 18일부터 1973년 3월 23일 사이에 월남전에 참전한 자로서 고엽제 환자 및 유족에 대한 보상규정과 고엽제 후유의증 등 환자지원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규정이 제정되었으나, 고엽제 후유증 환자 등록신청 및 보상에 관한 절차가 복잡하여 제대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 글은 1960년대 월남 파병용사의 인터뷰와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내용을 바탕으로 1960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에서 일어난 베트남 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견한 한국의 월남전 파병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