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66·끝)-한 장의 편지
녹슨 철모 (66·끝)-한 장의 편지
  • 시니어每日
  • 승인 2020.06.29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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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활 타오르는 불길 위에 한 장의 편지가 너울대고 있었다.

 

      '태원씨에게'

      ”바람이 많이 불고 있습니다. 어디로든 바람에 날아갔으면 하는 생각을 문득 해봅니다. 언제부터인가 난 나약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바람에게라도 기대고 싶은 이 나약함이 왜 생겼는지 당신은 알 것 같습니다.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신은 왜 인간에게 이토록 다양한 감정을 소유하게 하였을까요? 한 사람만 평생 그리워하게 만들었다면 인간의 고통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신의 잔인함은 바로 이런 것일 겁니다.

 

    당신은 죽음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했죠. 당신이 심각하게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곤 했습니다. 하지만 난 우리의 고통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표현이 있더군요. 삶 가운데 고통과 죽음의 장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 죽음에서부터 삶에 이르는, 또 고통에서 황홀경에 이르는 전 범위를 담담히 지켜보는 것. 아무것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감정이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선택되어진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사랑을 느낀 순간, 나의 고통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겠지요. 당신과 나 사이에 희망이 있을까요? 아마 희망조차 헛된 꿈일 것입니다. 당신과 만나면서 남편을 속이는 즐거움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한 생각이었는지 지금에야 깨닫습니다. 사랑이란 것이 누굴 속이면서 느끼는 단순한 쾌감이 아님을 이제는 알기 시작했습니다. 거짓말이 인간을 얼마나 굴욕적으로 만드는지 당신은 알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참으로 힘든 언어입니다. 남편을 속이는 것이 이제 고통이 되어 나에게 돌아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이렇게 몰래 편지를 쓰는 나 자신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군요. 어쩌면 그건 당신이 살아있음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겠죠.

 

     미래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동안 나는 당신을 통해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색다른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거울처럼 항상 나를 비춰주고 있습니다. 당신의 열정적인 사랑이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당신과 만나면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유식함과 쾌활함이 나를 살아 있게 합니다. 이 느낌이 없다면 나의 삶은 먼지와 같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죽음에 대한 말은 앞으로 다시 하지 말아주세요. 당신이 살아 있지 않는 세상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태원 씨,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화내지 말고 참고 끝까지 들어주세요. 이 선영이를 자유롭게 놓아주십시오. 이제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우리의 만남이 중단되어야 전 태원 씨와의 좋은 추억만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에 상처가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 감정이 진행되면 저의 예감에 어쩐지 우리는 불행해질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의 가슴도 무척 아픕니다. 그러나 나중에 죽음과 같은 고통보다는 지금의 아픔이 덜할 것 같습니다. 부디 마음을 진정하시고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언젠가 이런 불타는 감정이 조용히 가라앉으면 그땐 우리의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고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만남은 단지 육체의 불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사랑이 진정 영원한 사랑일 것입니다. 당신을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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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동안 부족한 글을 교정해주시고 연재해주신 시니어매일에 감사드립니다. 뻔뻔스럽게 소설이라고 이름붙이며 글을 쓰느라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몇 안 되시는 독자 여러분들이 끈기를 갖고 읽어 주셔 감사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권영재 드림

 

◆감상문------------------------------

권영재 동문의 소설을 읽고

이정우 신부

 

"그대는 이순(耳順)에 소설을 썼다고 한다. 정신과 전문의가 쓴 소설을 읽는 하루 종일, 내가 사는 팔공산 뒷자락 이 산골짜기 어릿골엔 2월 하순께의 눈발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눈발이 내려오며 숨어사는 나를 꾸짖고 있는 듯했다. 올해 봄맞이로 얼음장이 다 녹은 못물 위에 눈발은 내려오는대로 또한 녹아버리기도 했다. 

‘아련한 기억 속의 봄날’은 또 언제였던가. 봄날은 몇몇 번이나 오고 가고 또 오고 있는데, 지난 세월과 시간의 모습은 참된 삶의 뜻에 눈멀어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오직 기억만으로 남는가. 

우리 젊은 시절의 그 파테틱하게 푸르던, 그러나 돌이켜보면 욕망에 사뭇 배고파하던 목숨들에 대해, 바람 속 눈발의 혼돈과도 같던 우리 젊은 날의 어쩌면 소유만을 위한 삶의 투쟁과 무상함에 대해 그대는 밤새워 아픈 기억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젠 아무도 말하지 않는 우리네 삶의 궁극적인 뜻을 그대는 애써 새로이 생각하며 썼다고 한다.

“소유냐 삶-또는 가치-이냐?” 라는 소설 구조 속 깊이나 밑바닥에 감춰진 명제는 소유하고만 살려던 인생의 성찰에서 나온다는 걸, 그런 걸 알 때는 그만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건 그대가 아마도 병고 중에 정신적 초월의 의지로 이런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사유가 되었을까.

나는 이제쯤이야 ‘그냥 살아간다’는 별난 진리 하나 마음에 담고 새기며 살 뿐인데, 무슨 삶의 이론을 논하랴.

잘 알진 못하지만 , 재물이든 권력이든 명예든-그게 사랑이던- 그 어떤 소유를 위한 인간 필생(畢生)의 욕망고 투쟁은 그 근거가 육신의 안일과 평안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육신이란 늙고 소멸되어가는 것으로서 그것은 오래 가고 영원한 것이 아니므로 가치가 되지 못한다.

육신을 섬기기 위해 구하는 세상 사물도 사랑도 그러하다. 진정한 삶이란 가치를 추구하는데 있다면, 소유만을 위한 노력은 진정한 삶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대체로, 이러한 뜻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한 젊은 의사의 한없는 사랑에 대한 순수한 욕망과 소유욕까지도 비극적인 결말을 낳고 마는 게 아닐까 싶다. 

한 인간 생애마다가 그러하듯, 없어지는 것과 사라지는 것은 슬픔이지만 모든 잃은 것이야말로 기억 속에선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아, 그대가 도시에서 갖다준 소설을 읽는 날의 봄이 저만치 다시 오는 산과 들녘에 눈발이 덧없이 흩날리면서 말하고 있었다.

“인생은 오고 감도 없는 것이므로, 그러므로 더욱 슬프고도 아름답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