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64)-마지막 회식
녹슨 철모 (64)-마지막 회식
  • 시니어每日
  • 승인 2020.06.15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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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그 말 듣기 좋다. 마음의 고향. 그래 그동안 잘 있었어? 니 년은 분명 선영이지? 응, 선영이 맞지?"

그는 권총을 빼어들었다. 계집애들이 질겁을 하며 뒤로 물러앉았다.

"그럼요. 실장님, 여긴 청평 59후송병원이고 저 여잔 선영이 맞습니다.”

이 상사가 대신 말하며 그의 권총을 슬그머니 빼앗았다.

“이 상사님, 내가 떠나더라도 뒷일 잘 부탁합니다. 이 상사는 내 마음 잘 알죠?"

“저야 섭섭하더라도 실장님의 장래를 위해선 삼사로 전출가시는 것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뒤치다꺼리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충성!"

이 상사가 장난스레 거수경례를 했다.

"그래, 다 잘됐다. 야들아, 이제 우리 한 번 청춘을 불태워보자. 니들부터 한 곡조 뽑아봐.”

태원이 고함을 지르자 그제야 작부들이 대강의 눈치를 채고 태원의 전출 회식에 기꺼이 참석했다.

“그럼 제가 먼저 오라버니의 영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한 곡조 올리겠사와요.”

그녀는 젓가락으로 상머리를 치며 노래를 시작하였다. '선데이 모닝' 뭐니 하는 서양 노래였다. 아마 의무실 사람들이라는 점을 고려한 노래 같았다.

"이봐, 니들 실력이 그것밖에 안 돼? 니들 왜 그러니? 응, 진짜 노래 같은 노래 한 번 해봐!”

태원이 투정을 하자 딴 작부가 젓가락을 두들기며 시작을 했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사랑했던 그 추억, 잊을 수가 없을 거야. 산을 넘고 바다 건너.......”

패티 김의 노래를 불렀다. 노래도 좋았지만 솜씨 또한 가슴을 찡하게 했다.

“언니, 제발 좀 부탁이다. 좆같은 노랜 때려치구 정말 노래 같은 노래 한 번 해보라니까!”

이제 선임하사가 나섰다.

“일동 악기 차렷! 노래 일발 장전! 준비된 가수로부터 발사!”

그는 노래를 시작하였다.

“밤이 늦은 공장에서 받은 님 소식은 전선의 향기 품고 그대의 향기 품어 ....”

구성지게 넘어가자 박 하사가 이어받는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태원도 시작했다.

“남쪽 나라 십자성은 어머님 얼굴, 꿈에 보는 너의 모습.....”

그제야 작부들도 분위기를 완전히 파악하고 그녀들이 그들을 이끌어가기 시작하였다.

‘갈매기 파도 위를 날지 말아요’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목포는 항구다’. 남녀노소가 그의 계급과 배경을 뛰어넘고 한 몸 한 뜻이 되어 지상의 천국을 이룬 상태가 되었다. 이윽고 주인 마님도 흥에 겨워 이들의 틈에 끼어 앉았다.

“얘들아, 가게 문 닫아 걸었어. 지금부터는 내가 실장님을 위해 술을 사는 거야. 마음껏 마시고 놀아봐.”

그녀는 태원을 일으켜 세워 브루스를 리드했다. 태원은 춤을 한 번도 추어본 적이 없는지라 취중에도 무척 부끄러워하며 더듬대다가 그녀의 발등을 밟고 휘청거리더니 나중에는 손을 놓고 선임하사에게 인계해 버렸다.

태원의 환송식은 이렇듯 뜻밖에 흥청망청하여 나중에 외롭게 떠난 그의 앞길이 그렇게 쓸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술좌석이 파할 무렵 주인 마담이 계집애를 하나 붙여주자고 하였지만 이 상사와 박 하사는 굳이 이 제의를 거절하고 태원을 그의 군인아파트로 데리고 갔다. 그들도 마음 같아서는 마누라도 없는 태원의 객고를 풀어주고 싶었지만 바로 아파트 동네에서 군의관이 오입했다는 첩보가 올라가면 이건 정말 그를 난처하게 만드는 사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하사가 오랜만에 태원의 아파트에 들어갔다. 휘청거리는 태원을 누이고 그는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부엌으로 갔다. 홀아비 생활한 지가 벌써 여러 주일이 지났건만 부엌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고 수저나 식기들도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이불도 장 속에 차곡차곡 잘 개어져 쌓여 있었다. 화장대 위에 태원의 부인이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보통 신혼집의 사진은 부부 둘이 정답게 찍은 사진이 있게 마련인데 이 집은 여자 혼자 사진만 있었다. 박 하사는 웃으며 그 집을 나왔다. ‘저런 걸 보면 역시 실장님은 보기보다 너무 수줍음이 많은 것 같아. 하지만 그게 그분의 매력이기도 하지. 속으론 사모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을 거야’ 라고 혼잣말을 하며 부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태원은 퇴근하면서 세탁소에 맡겨둔 전투복을 찾았다. 다음 날 아침 그 새 옷을 입고 아파트를 나섰다. 문을 열어 두고 갈까 하다가 열쇠를 관리병에게 맡겼다.

“어이, 이 병장! 그동안 고마웠어. 내가 장기 출장 가는데 그동안이라도 누군가 내가 아는 사람이 우리집에 들어가려고 하면 이 열쇠를 드려.”

멀리 가는 사람처럼 말했다.

"실장님, 마치 전근 가시는 분 같아요. 저희 실장님 좋아하는 거 알고 계시죠? 딴 부대 가시면 안 돼요.”

그가 덕담을 하며 열쇠를 받았다. 그는 태원에게 아파트가 비었다고 연락해주었던 사병이다. 그리고 그가 이 열쇠도 주었다. 말하자면 그와 태원은 몇 달 전 아파트 약탈 사건의 공범인 셈이다.

 

부대에 출근한 태원은 점심 식사 후 경비 중대로 올라갔다. 중대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봄에 여기 와서 토끼를 사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토끼들을 키워 잡아먹던 생각도 났다. 그리고 옴이 한창일 땐 매일 밤 여기 와서 소독하고 사병들의 아랫도리를 검사하던 날도 떠올랐다.

"중대장, 당신 권총 한 번 줘 봐. 내 것하고 같은가 보게.”

경비중대장이 차고 있던 권총을 받아들었다. 둘 다 같은 45구경 권총이다. 태원은 그의 표정을 감추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난 말이야 권총이 있어도 탄창을 끼워본 일이 없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럼 당신은 만날 빈 권총 차고 다녔어?"

“그렇지. 당신도 알다시피 난 한때 CR 메고 다녔잖아? 그후 이걸 받았는데 실탄은 안 주던데..........”

"그럼 권총 사격은 해봤수?"

"후보생 땐 해봤지, 그러나 여기 와선 한 번도 쏴본 적이 없어. 당신 말이야, 내가 전방서 칼빈 사격대회에서 1등한 거 알아?"

"에이, 군의관 주제에 무슨.....”

"그럼 우리 권총으로 한 판 붙어봐?"

태원은 중대장의 탄창을 슬슬 만지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탄알이 든 탄창을 가져가야 한다. 그는 그 기회를 잡기 위해 중대장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때 중대장실 문이 왈칵 열리면서 그의 당번병이 소리쳤다.

“중대장님, 본부대장님이 부르십니다.”

“그럼 내 다녀올게요. 시합 얘긴 갔다 와서 계속 하자고.”

중대장은 그의 권총과 탄창을 그냥 둔 채 뛰어나갔다. 태원은 중대장 권총의 탄창을 호주머니에 넣고 중대장실을 나왔다.

"어이, 서 일병 여기 니 중대장 총 치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