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신호의 ‘하운산방 24’
조신호의 ‘하운산방 24’
  • 김채영 기자
  • 승인 2020.07.15 10:00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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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호의 ‘하운산방 24’

-호박

 

태풍 산바(Sanba)가

지나간 다음 날

한 바퀴 돌아보니

 

몇 번이나 뜯어말려도

감나무 낮은 가지 타고 올라가서

고관대작인양 햇살에 번득이며

제법 으스대던 호박 하나

덩굴째 굴러 떨어져

만신창이 되어 있다

 

낮은 땅에

아무렇게 엎드려

천천히 기어가던 호박은

비바람이 무슨 대수더냐

황금빛 둥근 얼굴로

잘 익어가고 있다

 

시집 『하운산방』 초록숲. 2018. 09. 20.

 

덩굴식물의 특성이라면 아무데나 뻗어가는 자유분방함이라 하겠다. 바닥을 기어서가든 위험천만하게 고공을 행진하든 삶의 방식이고 또 주어진 환경일 뿐이다. 최선이 이런 거란 듯 살아남기 위해 용쓰는 자세가 기특하지 않은가. 영역 확보, 세력 확장을 꿈꾸며 죽은 나무라도 부여잡을 줄 안다는 것은 전생에서 터득해온 학습효과이리라. 심지어 가녀린 줄기 앞세워 수직 벽을 타기도 한다. 나는 높은 건물 외벽을 감싼 초록 세상 앞에서 아찔함은커녕 싱그러움에 감탄할 때가 있다. 아이비의 어린잎들은 현기증이나 고소공포증 같은 것을 앓지 않을까? 이런 염려는 오지랖에 불과할 게다. 어쨌든 덩굴식물의 치열함을 보면 발버둥으로 아슬아슬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호박들의 성장 체험기라고나 할까. 시집 ‘하운산방’ 시리즈 가운데서 ‘호박’이란 부제가 붙은 ‘하운산방 24’를 읽는다. 서정시는 이 시의 제재인 호박만큼이나 접근성이 좋다. 첫 구절 ‘태풍 산바(Sanba)’의 등장은 시간적 배경을 뒷받침해준다. 산바를 찾아봤더니 2012년에 상륙하여 한반도를 강타한 강력했던 태풍이란 정보가 나온다. ‘몇 번이나 뜯어말려도~만신창이 되어 있다’ 요즘 젊은이들의 표현법으로 웃프다. ‘낮은 땅에 아무렇게 엎드려~잘 익어가고 있다’ 호박을 통하여 속도보다는 방향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운다. 시인은 호박이야기를 하면서 은근슬쩍 우리 삶을 짚어보게 한다. 모험이나 발전도 좋지만 위만 보지 말고 옆도 뒤도 바닥도 살피면서 살라는 깊고 따뜻한 가르침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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