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5)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 최종식 기자
  • 승인 2020.06.01 12:3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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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귀화한 김충선 장군
-신선이 사슴들과 더불어 놀았다는 友鹿里
-한일우호관, 녹동서원, 창작스튜디오, 남지장사, 팔조령, 먹거리촌

우록리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소재지에서 청도 방향 911번 국도로 13.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경상북도 청도군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네 앞 팔조령 터널을 지나면 바로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과 연결된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조선시대 영남대로의 주요 길목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에서 귀화한 김충선 장군을 모신 녹동서원과 한일우호관, 먹거리촌, 남지장사 등 주요 관광지가 있어 대구투어 장소로 지정될 정도로 유명한 마을이다.

인근 팔조령은 해발 398m로 워낙 높고 험하나 정상에서 청도 쪽으로 내려다보는 경치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주말이면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팔조령 고갯길이 붐비고 있다.

이곳은 김충선 장군을 시조로 하는 ‘우륵 김씨’ 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4공화국 시절 내무장관과 법무장관을 지낸 고 김치열씨와 청도교육장을 지낸 김재덕씨가 이 곳 출신이며 많은 인재가 배출되고 있다.

한일우호관 길건너에 서 있는 우록리 상징물. 최종식 기자
한일우호관 길 건너편에 서 있는 우록리 상징물. 최종식 기자
우록리의 지도상 위치. 최종식 기자
우록리의 지도상 위치. 최종식 기자

■ 지명의 유래

우록리는 큰마을인 우록을 중심으로 7개의 자연부락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인근 청도나 대구 지역에서는 우륵이라는 지명으로 더 유명하다.

우록리 마을 입구(개미골)에 세워진 표지석. 최종식 기자
우록리 마을 입구(개미골)에 세워진 표지석. 최종식 기자

◇ 댁밑·덤밑·하백(下白)·하백록(下白鹿)

큰마을에서 백록마을로 가는 중간에 위치하며  옛날부터 당산제를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국태민안을 위해 지냈고 상, 하당으로 나눠서 지냈다고 한다. 제당의 밑이라 해서 댁밑이라 불리웠다고 한다.(자료제공, 金鍾福 외 4명 )

 

◇ 큰마을·큰마실·우록(友鹿)

400여 년 전까지는 우미산 아래 소의 굴레 모양의 마을이라 하여 우륵(友勒)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우선봉으로 부산에 상륙하여 조선의 순백한 풍토에 감격, 귀화하여 선조로부터 성명을 하사받고 자(字)를 선지(善之), 호(號)를 모하당(慕夏堂)으로 하는 김충선(金忠善) 장군이 이 곳에 터를 잡으면서 큰마을, 큰마실로 불리었다.

그 후, 옛날 신선들이 이 곳에 내려와 사슴과 더불어 놀았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우록(友鹿)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외지 사람들은 이 곳을 우륵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자료제공, 金容熙 외 5명)

우록1리 회관 전경. 최종식 기자
우록1리 회관 전경. 최종식 기자
우록리 유래가 새겨져 있다. 최종식 기자
우록리 유래가 새겨져 있다. 최종식 기자

 

◇ 황새들·황학(黃鶴)·황촌(黃村)

백록마을 왼쪽 산기슭에 위치하며 남향으로 경사진 곳에 숲이 무성하여 온갖 산새들이 많이 날아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황새 울음소리가 마치 ‘여기, 여기 …’ 하고 울었다고 하여 여기가 사람 살 곳이라 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황학이라 일컫는다.(자료제공, 琴炳和 외 4명)

 

◇ 개묵골·거묵골·개미골(螘谷 의곡)

우록리 입구 마을로 동네 지형이 개미집 같이 주위의 땅보다 약간 불룩하게 쌓여 이루어졌다고 해서 개미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부곡(富谷)이라고 일컬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개묵골, 거묵골 등은 모두 개미의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은 시원스럽게 왕복 4차선 도로가 뚫려 있으며 도로 양 쪽에 새로운 건물로 들어차 있다.(자료제공, 金聖淳 외 4명)

지금의 으록리 입구 마을 모습. 최종식 기자
지금의 우록리 입구 마을 모습. 최종식 기자

◇ 백록(白鹿)·백록동리(白鹿洞里)

지금의 우록1리를 지나 산길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비탈진 곳에 위치하며 마을 앞을 흐르는 계곡 상류에 남지장사(南地藏寺)라는 절이 있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거느린 승병과 의병장 우배순(禹拜純)의 군사가 합세하여 왜병들과 혈전을 벌일 때 사명대사는 바로 남지장사를 승병 훈련소로 이용했고 그 무렵에 흰 사슴이 나타났기에 백록(白鹿)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자료제공, 徐斗植 외 5명)

백록회관에서 내려다 본 우록리 모습. 최종식 기자
백록회관에서 내려다 본 우록리 모습. 최종식 기자

◇ 동구(洞口)

백록마을을 지나 신라 고찰 남지장사 밑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절에 들어갈 때 누구를 막론하고 돌 한 개씩 가져다가 쌓아 올려야 했다. 쌓은 돌무더기가 마치 윗입술, 아랫입술, 혀를 갖춘 입 모양을 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자료제공,  朱元祚 외 4명)

◇ 자양(紫陽)

지금의 녹동서원 맞은편에 위치하며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모화당 김충선의 산소를 마을 뒷산에 모신 뒤 사흘 동안 기이하게도 검붉은 햇빛이 내리 비추었다고 하여 자양(紫陽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뒷산 깊숙한 곳에 재실이 남아 있다.(자료제공, 金任得 외 4명)

◇ 진살·장전(長田)

우록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지금의 녹동서원 길옆에 위치하며 동네 옆 산기슭에 사래 긴 밭이 있다고 해서 진살이라고 하였다고 한다.(자료제공, 金龍淳 외 4명)

 

◆ 김충선 장군 출신 및 업적 소개

사성 김해 김씨 중 우륵 김씨의 시조 김충선[金忠善, 1571(선조 4)~1642(인조 20)]은 원래 이름은 일본명인 사야가(沙也可)이다. 자는 선지(善之)이며 호는 모하당(慕夏堂)이다.

이름을 하사받은 후의 본관(本貫)은 김해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좌선봉장(左先鋒將)으로 3,000여 군사를 이끌고 침입했다.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귀순하여 동래, 울산, 진주 등에서 일본군을 여러 차례 무찔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도원수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 등의 주청으로 선조로부터 성명을 하사받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10여 년 간 북쪽 변경의 방어를 맡았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정헌대부로 승진하였으며,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괄의 부장 서아지(徐牙之)를 잡아 죽이는 등 난의 진압에 공을 세웠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광주(廣州) 쌍령(雙嶺)에서 청군 500여 명을 죽인 전과를 올려, 임진왜란 때의 공에 더하여 임갑병(壬甲丙) 삼란(三亂)의 공신이 되었다.

청과 화의(和議)가 성립된 뒤에는 대구로 내려와 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과 혼인하여 살면서, 가훈․향약 등을 저술하기도 했다. 저서에 〈모하당문집〉이 있다.[​출처: 사성 김해김씨(우륵김씨) 족보]

 

  ※  관내 관광 명소

관내 등산로 안내판. 최종식 기자
관내 등산로 안내판. 최종식 기자

◆ 한일우호관

2012년 개관하였으며 1층에는 홍보영상관, 전통예절관, 교류역사체험관이 있고 2층에는 기획전시실, 야외 전통놀이체험시설이 있다. 그 외에도 김충선 장군의 발자취 3D 입체영상을 볼 수 있으며 일본측이 기증한 유물과 임대한 각종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구 투어에 참가하면 모든 것을 구경할 수 있다.

길 건너에서 본 한일우호관 전경. 최종식 기자
길 건너에서 본 한일우호관 전경. 최종식 기자

◆ 한일교류단 참배 기념비

2001년 한일교류를 위해 일본 와까야까현 교류단, 와까야마현 지사, 중의원 의원, 작가 등이 이 곳을 방문하고 김충선 장군의 묘를 참배하고 김충선 장군의 충정을 높이 찬양하고 한일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세웠다.

한일 교류단 참배 기념비 모습. 최종식 기자
한일 교류단 참배 기념비 모습. 최종식 기자

◆ 녹동서원

김충선 장군의 위폐를 봉안하고 있으며 봄, 가을 두 차례 제향을 한다. 영조 임금 말기부터 3도 유림이 뜻을 모아 상소하였고 정조 13년(1789)에 다시 상소한 결과 1794년에 준공하였다.

한일우호관 옆에 위치한 녹동서원 전경. 최종식 기자
한일우호관 옆에 위치한 녹동서원 전경. 최종식 기자

◆ 충절관

김충선 장군의 유품을 전시한 곳으로 전시1, 2, 3 등으로 되어 잇으며 조총, 태도(太刀), 당채목각촛대, 모화당 친필 장자결혼시(時), 모화당 문집 목판, 족보, 교지, 청동거울, 마구(馬具), 활, 강화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김충선 장군의 업적을 기린 충절관 전경. 최종식 기자
김충선 장군의 업적을 기린 충절관 전경. 최종식 기자

◆ 가창창작 스튜디오

가창창작 스튜디오는 대구문화재단이 운영하며 순수 창작활동을 하는 미술 창작 스튜디오이다. 운동장이나 시설사용을 신청할 때는 대구문화재단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문의전화는 (053)430-1266으로 하면 된다.  

창작스튜디오 활용 안내판. 최종식 기자
창작 스튜디오 활용 안내판. 최종식 기자

◆ 남지장사

684년 통일신라 신문왕 4년에 양개조삭 창건했다. 당시에는 대웅전, 극락전, 명부전, 만세루, 사천왕문과 동의 암자가 있어 규모가 컸다고 한다. 고려시대 충숙왕 때 보각국사가 중수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가 수도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이 곳을 승병훈련장으로 사용했으며 승병과 의병들은 우록 계곡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다수가 전사하였다고 전해진다.

남지장사 전경. 최종식 기자
남지장사 전경. 최종식 기자

◆ 치즈체험관

우미산 줄기 우록1리 마을 회관 개울 건너편에 위치하며 치즈·피자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다. 대구 임실치즈마을이라는 큰 간판이 보인다. 체험신청은 (053) 290- 5600으로 하면 된다. 

우록1리에 위치한 치즈체험관 전경. 최종식 기자
우록1리에 위치한 치즈체험관 전경. 최종식 기자

◆ 먹거리촌

가창 우록리 먹거리촌은 옛부터 염소고기와 닭백숙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그 외에 피자와 같은 다양한 먹거리로 라온아토, 야초가든 등 여러 식당이 들서 있다. 주말에는 많은 미식가들로 붐빈다.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끼리 다른 체험활동을 겸해서 이 곳을 찾는다. 

먹거리촌 안내판. 최종식 기자
먹거리촌 안내판. 최종식 기자

◆  팔조령

경북 청도군 이서면 팔조리에서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삼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해발 398미터로 비교적 높고 험하다. 조선시대까지는 한양에서 부산을 잇는 가장 짧은 직선 도로였다고 한다.

팔조령이라는 지명은 한양에서 부산까지 8번 째 고개라는 뜻도 있으나 고갯마루에 도적이 많아 적어도 8명이 무리를 지어 서로 도우면서 넘어야 안전하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더 신빙성이 있다.

지금은 아래로 왕복 4차선의 팔조령 터널이 뚫려 있어 평일에는 차량의 왕래가 거의 없으나 아베크족이나 고갯마루에서 청도쪽으로 내려다보는 수려한 경치를 즐기기 위해서 이 길을 찾는 관광객이 대부분이다.

팔조령 고개마루에서 내려다 본 아름다운 전경. 최종식 기자
팔조령 고개마루에서 내려다 본 아름다운 전경. 최종식 기자

◆ 팔조령 고개 쉼터

휴게소 앞에는 누구나 쉬어갈 수 있도록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여름철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다.

팔조령 휴게소 모습. 최종식 기자
팔조령 휴게소 모습. 최종식 기자

 ◆우록갤러리

주말에는 삼삼오오 어린애를 동반한 가족들이 유명 미술작가들이 전시한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많이 찾는다. 주위의 먹거리촌과 연계하면 좋은 체험코스가 되겠다.

우록리 마을 입구에 있는 우록갤러리 전경. 최종식 기자
우록리 마을 입구에 있는 우록갤러리 전경. 최종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