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달] 이놈의 6·25가 내새끼들 다 잡아가고
[호국보훈의달] 이놈의 6·25가 내새끼들 다 잡아가고
  • 김외남 기자
  • 승인 2020.06.0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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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야 잘자라 노래가 새삼 가슴을 적신다

6·25 전쟁이 일어난 해에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요새 같으면 초등생도 뭘 좀 알겠지만 통신이며 뉴스며 캄캄하던 시절이라 아무 것도 몰랐다. 7월 들어 장마로 냇물이 불어 떠내려간다고 학교 가지 말라는데도, 새 고무신은 치켜들고 치마는 동동 걷고 건너다가 아차 고무신 한 짝을 둥둥 떠내려 보냈다.

아까워서 엉엉 울면서 절뚝거리며 가는데, 양쪽 길 옆에 철모를 깔고 죽 앉아 있는 커다란 코에 새까만 얼굴, 하얀 얼굴들이 총대를 잡고 빤히 쳐다봤다. 무서워 언니 치맛자락에 얼굴을 가리고 학교에 갔다.

그날 교장 선생님이 전쟁 이야기를 해주어서 처음으로 알았다. 교실은 유엔군에게 내어주고 이 마을 저 마을 학년 단위로 흩어져 수업을 했다. 교실은 어느 때는 유엔군, 어느 때는 국군, 어느 때는 피난민 수용소로 내어주었다. 우리들은 학교 뒷산 황토 땅바닥에 풀을 뜯어 자리하고 소나무에 매단 흑판을 보고 구구단을 배웠다.

피난민들이 몰려와서 마을별로 배치했다. 우리 집은 사랑채를 내어주어 충정도 보은에서 온 5명의 가족이 지냈다. 그들은 '높은 산 위에서 살피는데 인민군들이 까맣게 몰려오는 걸 보고 옷가지와 이불 냄비 숟가락 들고 무조건 남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여름철이라 평상에서 홑이불을 둘러치고 자기도 하고 냄비를 걸어놓고 불을 지펴 죽도 끓여 먹고 등겨 가루로 까만 개떡도 쪄 먹었다. 농삿일에 품도 팔았다. 냇가에 고기를 하도 잡아서 물방개 한 마리도 없었다. 햇참깨가 나는데 멍석에 널어 놓으면 배가 고팠는지 몰래몰래 한 웅큼씩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먹었다. 그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피난민들은 추석 쇠고 다들 돌아들 갔다. 대구나 경산은 피난 갈 준비로 집집마다 미숫가루도 장만해 두었는데 다행으로 피난 가지 않아도 됐다.

우리 집은 6.25 일어나기 전에 수난을 겪었다. 산골 마을이라 공비라는 무리가 몇 차례나 내려와서 2, 3일간 머물다 가면서 개도 잡고 닭도 잡아먹고 약탈을 해갔다. 그 와중에도 어렸던 나는 빨갱이는 눈이 빨간 줄 알고 이 사람 저 사람 보는데 눈이 빨갛지 않아서 실망했다.

빨갱이들이 우리 집에도 쳐들어 왔다. 군인 가족이나 경찰 가족들은 몰살시킨다는 소문에 콩나물 시루 같이 식구들이 한방에 몰려있는데 할아버지의 긴 수염이 눈에 보일 듯이 흔들렸다. 공비들이 신발을 신은 채 총을 세워놓은 큰방 구석에는 큰아버지가 연대장으로부터 받은 표창장 액자가 두 개나 걸려 있었고, 군사우편 찍힌 편지가 선반에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공비들은 쌀가마니를 거두어 가는 물적 피해는 입혔지만 인명피해는 입히지 않았다. 만약에 지서나 경찰서에 알리면 이 동네는 불바다가 될 거라며 겁을 주어서 학생들도 일체 함구했다. 공비 한 명이 청도에서 검거되어 불면서 사달이 났다. 남정네들이 줄줄이 굴비같이 엮이어 지서로 끌려가서 반죽음으로 매타작을 당했다. 남로당에 가입된 자가 한 명도 없으니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다들 돌아왔다.

아버지는 달구지로 쌀가마니까지 실어 나르며 부역했으니 잡혀가면 병신이 되겠기에 그 길로 산을 타고 국군인 삼촌 부대가 주둔한 영천으로 도망가서 큰아버지 배려로 여관에 머물면서 험한 꼴은 면했다. 이른 아침 시간에 아버지를 잡으러 순경들이 들이닥쳤다. 짚 무더기 속을 칼 끝으로 쑥쑥 찔러보기도 하고 헛간과 창고도 뒤졌다. 이른 아침 마당을 쓰는 할아버지에게 아들 어디 숨겼느냐며 댓바람에 뺨을 세게 쳤다. 할아버지는 한쪽으로 돌아간 뺨을 잡고 비명 지르며 쓰러졌다. “당신 아들 어디다 숨겼어? 바른대로 말해"라며 반대편 뺨을 또 갈겼다.

할아버지는 모른다고만 말했다. 나는 너무나 무서워서 방 뒷문을 박차고 뒤란으로 내뺐다. “거기 서! 안 서면 쏜다. 손들어.” 아버지가 집 안에 숨어있다가 달아나는 줄 알고 내게 총까지 겨누었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그 자리에서 앙앙 소리 내어 우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쫓아 와서 “제 손녀가 어려서 너무 무서워서 그랬나 봅니다“ 하며 싹싹 빌었다.

고등학생이던 작은삼촌은 학교 가서 선생님들께도 닦달당하고 알만한 놈이 신고하지 않았다고 지서에 끌려가서 장작으로 등짝을 맞아 척추가 탈이 났다. 어떤 이는 목디스크가 어긋나기도 했다. 바깥 출입을 못하고 척추가 아프다가 결국은 목에서부터 엉덩이까지 깁스를 하고 누워 지냈다. 등창이 나서 허연 뼈가 드러났다. 작은삼촌은 하반신 마비로 3년을 견디다가 결국 돌아가셨다.

큰삼촌이 강원도 양구전투에서 전사했다는 통보도 뒤따라 왔다. 며칠 전 특별휴가로 왔다가 인절미 보따리를 들고 귀대할 때 나도 졸랑졸랑 삼촌을 배웅하러 따라갔다. 부대원들에게 나누어 먹일 찰떡 보따리를 아버지가 지게에 지고 버스를 기다렸다. 이 버스를 타고 가야만 군용열차 시간에 맞게 경산역에 도착된다. 버스가 휑하니 세워주지 않고 달아났다. 삼촌은 메고 있던 총을 벗어 달아나는 버스 타이어를 겨냥했다. 운전사가 버스를 세우고 허겁지겁 내려 달려와 죄송하다고 싹싹 빌며 떡 보따리를 받아 버스에 싣고 떠났다. 전시에는 군인이 최고였다.

큰삼촌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 때부터 군인이었다. 부대가 흩어져 애를 먹었다는 편지 후로 연락이 끊어지더니 찾아든 것은 전사통보. 전쟁 중에도 큰 공을 세워 특별휴가도 다녀갔다. 그때도 완전무장이었다. 동구에 들어서면서 공중을 보고 탕 한 방 쏘면 일하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길로 나와서 삼촌을 영접하고 전시 이야기도 들었다. 그날 저녁은 동민 모두 모여 배달된 막걸리로 파티가 벌어졌고 귀한 건빵도 나누어 먹었다.

총 끝에는 뾰족한 칼도 있었다. 제대하면 장가 갈 거라며 이웃 마을 아가씨도 점 찍어두고 혼숫감도 장만해 둔 터였다. 전세가 막바지로 위험하고 곧 휴전될지도 모르는데 그만 제대하고 가지 말라고 어른들이 말렸다. ”나는 무서운 게 없습니다. 군인은 나라의 몸이고 사사로운 일로 임무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죽지 않고 꼭 돌아옵니다. 걱정 놓으십시오“라고 했다. 그 말 남기고 떠난 지 바로 며칠 후 치열한 공방전에서 전사한 것이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들이) 이북 어디에 살다가 꼭 돌아올 거라고 말씀하시면서도 틈만 나면 “이놈의 세상, 이놈의 육이오 내 새끼들 다잡아 가고.”넋두리 하셨다. 어떤 때는 “내 새끼들 돌려내라“며 통곡을 하셨다.

준비해두었던 큰삼촌의 혼수 비단은 명절 때마다 내 옷을 해주셨다. 나는 멋모르고 비단옷을 입고는 좋아했다. 아버지는 3형제이다가 외동이 되셨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현충일에 관광버스를 내어 현충원에 가서 삼촌의 묘비를 참배했다. 6·25 참전 용사 묘역에는 후손들이 없으니 너무 고즈넉하고 외롭고 쓸쓸했다. 혹여나 유골이라도 찾을까? 막내 고모의 DNA를 채취해서 그곳 현충원에 보관 중이다.

지금 우리는 6·25 참전용사들이 죽음으로써 나라 지켜준 덕분에 너무나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다. 나라를 죽음으로써 지켜준 사랑하는 순국선열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정치권만 좀 잘해준다면 바랄 것이 없는데 위정자들 때문에 마음이 우울해진다. 6·25에 즈음하여 참전용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군가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전우야 잘 자라’ 노래를 바친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