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달] 호국 성지-상주 화령장전투 전적지
[호국보훈의달] 호국 성지-상주 화령장전투 전적지
  • 김정호, 김항진 기자
  • 승인 2020.06.0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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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면 신봉리, 화령장 전투 전승 조형물. 김정호 기자

 

화령이란 지명은 경북 상주시 화서면의 옛 지명이다. 지금도 면 소재지가 있는 곳을 화령이라 부르고 있다. 올해는 동족상잔의 6‧25전쟁 70주년을 맞는 해다. 상주 화령장전투는 전쟁 발발 초기 개전 이후 국군이 첫 승리를 거둔 싸움으로 역사적 의의가 크다.

화령 신봉리에는 전적비와 전적기념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고, 화령장 전투 전승기념관은 화서면에서 5km 거리 실제 전투가 벌어진 화서면 송계리 옛 송계분교 자리에 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찾는 이 없는 전적지는 적막감만 감돌고 있었다.

화서면 신봉리, 무공수훈자공적비. 김정호 기자

6‧25전쟁 발발 당시 인민군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물밀듯이 남한으로 진격하였다. 속수무책인 국군은 인민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서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하고 남으로 밀리고 있었다. 운명의 날 7월 17일 국군 17연대(연대장 중령 김희준) 1대대(대대장 소령 이관수)는 화령시장 부근을 통과하다 화령초등학교 운동장에 주둔하였다.

화령에는 엄 포수로 불리던 엄암회(작고. 택호 봉림) 씨가 봉황산 등지에서 사냥하고 있었다. 마침 북한군 15사단 48연대, 45연대가 충북 괴산을 거쳐 대구로 진격하기 위해 상주시 화북면에서 화서면으로 연결되는 갈령재를 넘어 화남면 동관리 방향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엄 포수는 곧바로 화령장에 주둔해 있는 17연대 1대대에 이 사실을 알렸다. 7월 17일 아침 8시 경이었다.

국군은 즉시 수색조를 편성하여 봉황산에서 적정을 살폈다. 엄 포수의 제보대로 인민군이 갈령재를 넘어 화남면 동관리 방면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관수 1대대장은 즉시 본대에 연락하여 17연대 병력은 화령장 뒷산인 봉황산 능선에 매복하고 적군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적군은 화서면 송계리 송계분교 교정에서 식사하기 위하여 집결하였다. 국군 17연대는 일제히 적군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가하였다. 이 전투가 화령장 1차 전투인 상곡리 전투다.

이어 18일 적 후속부대인 보급부대가 통과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아군은 다시 봉황산 능선에 매복하고 적군을 기다렸다가 18~20일 3일간에 걸쳐 적군의 주력부대인 45연대를 완전히 소탕하였다. 이 전투가 2차 전투인 동관리 전투이다.

화령장 전투로 적군 사살 625명, 포로 56명에 수많은 적군 장비와 군사물자를 포획했다. 아군은 전사 4명, 부상 30명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화서면 송계리, 화령장전투 전승기념관.  김정호 기자

후세는 이 전투를 화령장 전투라고 부르고 있지만, 현지 주민들은 이 지역을 통과하는 달천(달내) 전투라 한다. 1, 2차에 걸친 화령장 전투는 국군이 개전 이후 최초로 대승을 거두고 낙동강 전선을 구축하여 대구를 사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전투였다.

오늘날 이 전투에 참여한 군인들은 고령으로 거의 다 작고하셨고, 생존자 세 분은 연세 90세가 넘어서 상주 지방에는 한 분도 거주하시지 않고 객지에 살고 있다. 17연대 전우회 회장 배동선(서울 구로구 거주) 씨와 전화 통화만 가능하였으나 연세가 많으셔서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화령장 전투 전승 기념행사는 향토사단인 육군 50사단과 상주시가 공동으로 주관하여 매월 10월에 개최하지만, 올해에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개최 자체가 불투명하다고 상주시 담당 계장은 아쉬워했다. 민족의 상잔인 6‧25전쟁 중 화령장 전투 전승 무용담이 후세들에게 반드시 계승되고 역사에 찬란하게 빛나기를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