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62)-권총
녹슨 철모 (62)-권총
  • 시니어每日
  • 승인 2020.06.01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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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병장,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일행은 일부러 알고 세워준 1호차 운전병에게 진정 고마운 인사를 하며 자리에 빼곡히 끼어 앉았다.

"한미군단에서 부관님이 부대에 심부름시켜 가는 길이에요.”

"야! 너, 요즘은 술 덜 마시냐? 위장은 덜 쓰려?”

태원이 묻자 ‘무슨 말을 합니까?’ 하는 눈으로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아이고! 실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실장님도 말씀하셨잖아요. 제가 스트레스 때문에 위궤양 걸렸다고요. 술은 속이 쓰려 마신거고요.”

“야, 이 녀석 봐라. 핑계 하나 좋네. 하여간 어떤 이유로든 술은 안 돼.”

태원의 친구들은 난생 처음 3성 장군의 지프를 타고 황홀한 심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태원이 말이 난 김에 더 나갔다.

“정 병장, 우리 대자리 시내버스 정류장까지 갈 수 있어?"

"아, 예. 서울까지라도 모실 게요.”

정 병장은 너스레를 떨며 되받았다. 민간인까지 태우고 위수지역을 넘을 수는 없다. 버스 정류장에서 친구들은 내리고 정 병장과 태원은 부대로 돌아왔다.

한 번은 태원이 서울에 가기 위해 시외버스를 기다리는데 헌병 중대장 차가 가다 말고 그를 보고는 차를 세웠다. 그리고 차에 오르라는 신호를 보냈다. 태원은 차를 탄 김에 부탁 한마디하였다.

“중대장님, 이왕 차 탄 김에 대자리까지 좀 가주시오.”

태원은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실장, 미안하지만 이 찬 안 돼요.”

태원은 무안하고 섭섭하였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헌병대 앞에 내려 길을 몇 백 미터쯤 가는데 지프 한 대가 그의 옆에 불쑥 정차했다. 차를 보니 아까 헌병 중대장 차였다. 운전병이 그에게 헌병 근무 모자(파이버)를 건네 주었다.

“야, 이건 뭐야?”

그가 심술어린 말투로 물었다.

 "그건 우리 중대장 모자예요.”

"그런데 왜 날 이걸 주는 거야?"

"우리 헌병 차는 헌병 외에는 아무도 탈 수가 없다고요. 그래서 아까 중대장님이 실장님 청을 거절했던 거예요. 하지만 그냥 보내고 나니 미안하다고 이렇게 헌병 모자를 쓰고 차를 타시라고 이 모자를 주신 거예요.”

태원은 뭣도 모르고 중대장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졌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또 이렇게 배려를 해주는 그 중대장이 정말 고마웠다. 이렇게 해서 태원은 전무후무하게 헌병 근무 모자를 쓰고 시내버스 종점까지 간 적도 있다.

차를 타고 가며 그 헌병 중대장이 한 말이 떠올랐다. 아마 대자리 화장터가 눈에 보이는 것과 관련이 있는 회상인 듯했다.

“우 대위, 내가 말이오. 2군 사령부에 근무할 땐 사형집행관도 해봤거든.”

그는 태원과 같은 대위지만 병에서부터 장교까지 진급을 한 탓에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 그는 같은 대위들을 만나면 대체로 반말을 쓰는 편이었다. 가급적 태원에게는 존댓말을 쓰는데 그것은 의사로서의 대접인지 군법회의 변호인으로서의 대접인지 그 이유는 확실치 않았다.

“대개 총살 직전 사형수들은 덜덜 떨며 조용히 자신들의 죽음을 맞는데, 언젠가 한 사형수가 무슨 노래를 부르는 경우가 있었어. 들어 보니 지가 지어낸 찬송가야. 그런 소리를 내면 일제히 나머지 사형수도 각자 자기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거야. 이건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죽는다는 것인지 아니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소리인지 아직 그 의미를 모르겠어.”

"그러면요?”

"그 소리 나면 바로 방아쇠를 당기는 거지 뭐.”

"하긴 그렇대요. 군법회의도 재판 끝 무렵에 피고인들 최후진술 없나? 하고 재판장이 물으면 대개는 말없이 그냥 서 있기 마련인데 어떤 때 한 놈이 '이번에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면 모두가 그 소리를 복창하더군요. 제 생각에 그때 저놈들을 석방해주면 정말로 착한 짓만 하고 살 것 같더라고요. 사형수들도 그때 풀어 주면 다시 죄를 안 지을 것도 같아요.”

 

헌병이 그의 소매를 내려주자 헌병과 관계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이렇게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며 지나갔다. 그 그림 속에는 어느 여름 밤, 태권도 도복 끈으로 목을 매어 죽은 헌병의 시신을 염하던 광경도 태원의 눈앞으로 재빨리 스쳐지나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 덧 그의 진료실에 도착하였다. 진료실은 잠겨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의자에 한참 앉아 선배와 선영이 나누었다던 대화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되뇌어보았다. 이성적으로 한 번 생각해보자. 기왕 선영과 이렇게 헤어지게 되었다면 평소의 그답게 깨끗이 체념하자는 쪽으로 자신을 달래보았다. ‘어차피 그녀는 남편이 있다. 내가 오히려 그 남편에게 두들겨맞아야 될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 남편은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선영이 또 다른 남자가 생긴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마음을 도닥거리니 약간은 진정이 되었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언젠가 그녀가 중위로 진급하면 주기로 마음먹고 자신이 달았던 중위 배지를 찾아 거머쥐어 보았다. 차디찬 금속의 온도가 전해왔다. 허공에 그녀의 미소 띤 얼굴이 떠올랐다. 기분이 나쁜 시늉을 할 때면 입을 삐죽이며 눈을 내리깔던 모습, 호기심이 난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던 모습, 기분이 좋다는 표시로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가만히 쳐다볼 때의 진지한 모습 등 갖가지 얼굴이 허공에 맴돌았다. 이윽고는 그녀 특유의 말들이 울려왔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바로 그런 점이 실장님의 단점이야!’ ‘전 그런 태원 씨의 모습이 좋아요.' 

모양에서 목소리로 그녀의 회상이 변하자 태원의 가슴에선 갑자기 부글부글 분노의 거품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일어나 거닐며 자신을 진정시키고자 했지만 화는 억누를수록 커져만 갔다. 태원은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들고 창문을 향해 냅다 던져 버렸다. 창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틀 째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서랍에 넣어둔 권총을 끄집어내었다. 원래 권총은 지휘관이 아닌 장교라면 본부대 장교 무기고에 일괄 보관하게 되어 있었으나 그 무렵 있었던 하기식 후에 권총을 반납하지 않고 그의 서랍에 넣어둔 것이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아둔 중위 계급장을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이 장전돼 있지 않은 권총은 ‘철컥’ 빈공이 치는 소리만 내고 말았다. 그는 대위 계급장을 창밖으로 힘껏 내던졌다.

“망할 년, 죽일 년, 뭐 사랑한다고? 저승서 만나? 정말 웃기는 년이다."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혼자 말을 하면서 웃었다. 갑자기 진료실 문이 열리면서 박 하사가 나타났다.

“실장님, 웬일이세요? 병원 일은 잘 보셨어요?"

창문 부서지는 소리에 놀란 듯 박 하사가 다가왔다. 군에서 무기 들고 설치는 놈에겐 호들갑 떨고 덤비다간 그 총에 맞아 죽기 십상이다. 하지만 박 하사는 태원의 본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모진 사람이 못된다. 그는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실장님! 그 권총은 저희가 이미 깨끗이 잘 수입해 뒀습니다. 안 그래도 내일 반납하려고요.”

그는 총을 건네받듯이 그의 손에서 빼앗았다. 권총을 빼앗긴 태원은 몸과 마음이 무척 허탈하였다.

"야! 박 하사, 날 따라와.”

박 하사는 권총을 든 채 그의 뒤를 따랐다.

"야! 그 총 이리 내. 네가 그걸 들고 나가면 넌 또 무장탈영이 돼.”

그는 자신의 권총을 다시 받아들었다. 예의 그 헌병들이 또 민간인처럼 굴었다.

"이제 가시는 겁니까? 고생하셨어요. 근데 박 하사는 왜 데리고 나가세요?"

"그래, 사제 밥이나 한 그릇 사 먹이려고, 그럼 수고들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