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61)-플라토닉 러브
녹슨 철모 (61)-플라토닉 러브
  • 시니어每日
  • 승인 2020.05.25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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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이 내가 근무하는 야전병원 정신과로 찾아왔다.

"형, 뭔가 날 속이고 있죠?”

태원이 다짜고짜 인사조차 생략한 채 화난 듯 질문했다.

"내가 너한테 뭘 속여?“

"내가 먼저 다 말할 게요.”

태원의 말투가 학생 시절로 돌아갔다. 그는 일단 흥분하면 목소리가 높아지고 얼굴이 붉어진다. 그리고 눈초리가 가로로 찢어지며 포악해진다. 지금 태원은 올바른 육군 대위의 모습이 아니었다. 대학 시절의 반항아 모습으로 재연되었다.

“내가 유선영하고 좋아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요?"

뭐라고 해야 될지 몰라 머뭇거리자 그는 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다음 말로 이어갔다.

“왜 사람들은 유선영과 우태원이 이런 관계니 저런 관계니 하고 남의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전 선영이랑 intercourse(성교) 한 번 한 일도 없어요.”

이럴 때 가만두면 녀석의 성격상 말이 횡설수설해지고 감정이 더욱 격앙되어 간다. 그래서 나는 짐짓 화를 내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야! 인마 왜 그렇게 떠드니? 말 살살해. 넌 보니까 내 말을 들으러 온 것 같은데 지금 너 혼자 떠들고 있잖아! 그래 네 말 중에는 내가 아는 부분도 있고 모르는 부분도 있는데 나도 말 다 할 게 들어봐.”

내가 명령조로 말하자 그는 성질을 참고 말을 중단하였다.

“사실 유 중위가 이 병원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나고 갔어. 너와 어디를 가려고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자기는 59후송병원으로 간다고 말하더군. 그러면서 그 이야긴 너에게는 하지 말라고 했어. 그런 말을 듣고 난 이상하게 생각했어. 그 사람은 나하고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 왜 나한테 자신의 전출 문제를 이야기하러 왔을까. 나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더군, 그런데 그 사람이 하는 소리는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고 하며 자신은 너를 아직도 좋아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어.”

“왜 형한테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한대요?"

"날 보고 네 선배 되느냐고 묻더군. 그건 어디서 소문을 들었나 봐. 아마 너에게 할 말을 대신 나보고 들어 달라는 소리 같았어.”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봐요."

“네가 보낸 편지가 남편한테 들켰나 봐.”

"내가 무슨 소릴 썼길래?"

"그건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리고 넌 네 마누라가 어떤 놈하고 편지를 주고 받는다면 잘 했다고 등을 쳐줄 거야? 네 성질 같으면 죽이려고 할걸?”

“형, 아까도 제가 이야기했지만 난 그녀와 별다른 짓을 한 게 없어요. 그런데 왜들 그럴까요?"

“야, 정말 네가 이해가 안 돼. 남들이야 너희 관계를 잘 모르니까 맘대로 오해할 수 있겠지만 남편 입장이 되어 봐. 그게 그렇지 않잖아. 유 중위 말이 맞아. 설사 너희가 서로 사랑만 한다고 칠 때, 계속 그냥 그렇게만 만나냐? 결국 남녀의 사랑이란 육체적인 결합이 그 끝이 되는 거야. 그렇게 되면 너희 관계는 그것으로 끝나게 돼, 무슨 정신적 사랑이니 무슨 친구 관계니 하는 소리는 전부가 눈속임에 속하는 거야. 유 중위는 서로의 가정이 깨어지지 않아야 된다는 현실적인 생각을 하게 된 거야.”

이제 태원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 사람이 말하더군. 자신도 너와 정신적 사랑을 나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때 가졌다는군. 그래서 남편하고 그 난리를 하고도 잠깐 동안은 너와 함께 전출 갈 생각도 하였다고 하더군, 여자는 한동안 흥분상태로 어떤 소리를 해도 결국은 남자완 달리 저의 현실로 돌아가기 마련이야. 난 그게 하늘의 조화라고 생각해. 여자마저 너처럼 이성을 잃게 되면 이 세상은 결국 혼돈의 구렁텅이가 되고 말거야. 그래서 하늘은 여자들을 현실적 존재로 만든 거 같아.”

나의 이런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배신자! 이중인격자!"

태원이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야! 그게 배신이고 이중인격이야? 유 중위가 딴 남자 사귀고 떠난 건 아니잖아. 그 사람은 다음 세상에 반드시 너와 결혼한댔어. 그러니 배신, 이중인격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지.”

내가 겨우 말을 마치는데 태원은 방문을 발로 차고 나가 버렸다. 태원은 시외버스를 타고 부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긴 통일로의 아스팔트가 태원의 눈에는 긴 회색 칼처럼 느껴졌다. 내 당장 저 칼을 번쩍 들고서 59후송병원이 있는 청평으로 뛰어가 선영의 몸을 두 동강 내리라 결심해보았다.

먼 훗날이 되어도 가끔 이날이 떠오른다. 태원이 눈에 불을 켜고 뛰어다니던 모습을... 만약 태원이 계획대로 영천 3사관학교를 갔다면 하고 판을 짜본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 정변이 일어난다. 9사단장 노태우 소장이 전방의 1개 연대를 빼서 서울로 쳐들어와 정변이 성공을 한다. 이 때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11군단장이 바로 영천 3사관학교 교장 마치고 자신이 부군단장으로 있던 군단장으로 되돌아온 황영시 중장이다. 중앙청으로 입성한 연대장은 우태원이 있던 55사단 71연대 2대대장이었던 김봉규 대령이다. 황 중장은 나중에 감사원장이 되고 참모장 박 준장은 국회의원이 되어 건설분과 위원장까지 된다. 당시 보안대장도 우태원과 절친했던 김부년 대령이다. 우태원이 영천만 갔더라면 재미있는 일이 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부대 앞길에서 버스를 내려 부대 후문으로 들어서는데 헌병 녀석이 아는 체했다.

“군의관님, 응급환자라도 있으세요?”

이놈들은 항상 이런 식이다. 장군 차나 혹은 자기네들 대장 차를 타고 정문으로 들어오면 일제히 “멸공!" 하면서 거수경례를 한다. 하지만 이렇게 걸어서 뒷문으로 들어가면 거의 대부분 경례구호 없이 거수 경례를 하며 이런 사적인 인사말을 하곤 했다. 그러면서 또 다가왔다.

“군의관님, 이제 내려야 돼요.”

친절을 베푼다는 듯이 걷어 올린 태원의 전투복 상의 소매를 내려주었다.

“오늘부터는 동절기 복장으로 바꿔야 합니다.”

태원은 신경질이 났다. 육군이란 가장 고생을 하며 나라를 지키는데도 대접은 이 모양이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같은 옷이다. 여름에는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겨울에는 그 걷었던 소매를 내리면 그게 겨울복장이다. 아니, 같은 육군이라도 행정부대나 병원 같은 곳은 소매가 짧은 약정복을 입는다. 말단 전투부대는 옷조차 이렇듯 초라하기만 했다. 자신의 옷소매를 양쪽에서 내려주는 헌병들이 자신을 막 대하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밉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게 좋았다. 이놈들이 나를 그만치 격의 없이 대해주는 것이 좋았다. 이 녀석들이 다른 곳에서 만났을 땐 나를 높은 장교처럼 대접해줄 줄 아니 이 녀석들이 고마웠다.

 

한 번은 시간이 없어 불광동에서 택시를 탔는데 이 운전사 녀석이 짧은 머리에 돈도 없어 뵈는 사람이 장거리를 가자고 하니 매우 불쾌한 표정을 했다. 태원의 외모가 만만치 않아 보여 차마 승차 거부는 못하고 주둥이를 한 자나 빼물고 말없이 난폭운전으로 심기가 불편함을 표시하고 있었다. 구파발을 지나 대자리쯤 오면 11군단 헌병 검문소가 있었다. 이곳으로는 대통령도 주말이면 골프를 치러 다니고 가끔씩 남북 무슨 회담 때 북한 사람들도 지나다니는 길이므로 그들 부대의 검문소는 거창했다. 마치 고속도로의 톨게이트처럼 가로질러 길 전면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런 광경에 그곳에 있는 헌병들을 보면 이런 구조물 덕에 여느 헌병들보다 크고 돋보이기 마련이었다. 헌병이 택시를 세웠다. 검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녀석이 차 안을 들여다보다 태원이 있으니까 반가운 나머지 거수경례를 붙였다.

"멸공! 어디 갔다 오세요?"

"야, 수고들 하네. 응, 서울에 잠깐 볼 일 보러.”

대꾸를 한 뒤 차창을 올렸다. 이 순간부터 택시 운전사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 사복 차림의 사나이에게 헌병들이 일제히 경례하는 것을 보고 계급은 그다지 높게 뵈지 않지만 무슨 주요 기관에 근무하는 장교로 알고 그는 오금이 조이는 눈치였다. 중앙정보부나 보안대 혹은 최소한 헌병대라고. 태원은 이따금씩 자신이 비록 군대이긴 하지만 이런 권력의 주변에서 자신도 덩달아 대접을 받고 있노라면 그 권력 맛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또 한 번은 서울에서 친구들이 놀러왔다가 집에 돌아가는데 차를 탈 수가 없었다. 유원지가 가까운 곳에 있어 도저히 만원인 시외버스를 탈 수가 없었다. 택시도 빈 차가 없어 잡을 수 없었고 그들은 아무 계획도 없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웬 지프 하나가 질주하다 말고는 갑자기 되돌아 왔다. 군단 1호 차였다. 차는 빈 채 운전병 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