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인생이 연극이라면
[인문의 창] 인생이 연극이라면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0.05.21 09:19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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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살아온 인생은 하나하나가 소설이고 각본 없는 드라마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각자’는 이 넓은 세상에 ‘살아 움직이는 예술(藝術)’ 이다.
찰리 채플린(1887-1977)은 영국출신 연기자이며, 제작자, 감독, 시나리오 작가이다. 그는 공교롭게도 88세에 예수가 온 날인 성탄절 날 저 세상으로 떠났다. 출처=위키백과
찰리 채플린(1887-1977)은 영국출신 연기자이며, 제작자, 감독, 시나리오 작가이다. 그는 공교롭게도 88세에 예수가 온 날인 성탄절 날, 저세상으로 떠났다. 위키백과

오래간만에 아트홀에서 연극을 봤다. ‘시간을 파는 상점’이란 제목이다. 주인공은 인터넷 카페에 ‘크로노스’라는 별명으로 ‘시간을 파는 상점’을 개점했다. 이 카페는 찾아오는 손님들의 어려운 일을 해결해주며 자신의 시간을 판다는 이색적인 장소이다.

‘훔친 물건을 제자리에 갖다놓아 달라’는 의뢰, ‘천국의 우편배달부가 되어 달라’는 의뢰 등은 생뚱맞은 의뢰 같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연극에 흠뻑 빠져들었다. 많은 배우가 눈 앞에서 거친 숨결을 고르니 필름 영화와는 달리 생동감과 박진감이 넘쳤다. 연극 속에는 주연과 조연 그리고 대사 없는 엑스트라도 함께 나왔다.

인생이 한편의 연극이라면, 우리는 세상이란 무대 위에 서서 자신의 배역을 맡을 것이다. 주인공이든 조연이든 엑스트라든, 배역(配役)의 비중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누구든 원치 않은 배역을 맡을 수 있고 원했던 배역을 맡을 수도 있다. 배역의 높낮이가 아니라, 오직 무대 위에 존재하느냐 않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소로 탄수화물 뿐 아니라 지방과 단백질 모두가 생존에 필요하듯이, 필요없는 영양소란 없다. 제 기능과 역할이 모두 따로 있다는 말이다.

연극무대에 출연하는 배우가 주연(主演) 한 명밖에 없다면 어떨까. 조연(助演)이나 엑스트라 없는 연극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공원에 붉은 장미만 혼자 덩그러니 피어 있으면 무엇하랴. 패랭이꽃 벚꽃 물망초 개나리꽃이 함께 어울려야 조화롭고 공존의 미가 돋보이기 마련이다. 연못에 외래종 황소개구리만 덩실된다면 정말 꼴불견이다. 어느 시대든 사회든 간에 악동(惡童)은 있기 마련이고 필요악이다. 말썽꾸러기가 있어야 주연이 빛나고, 주연이 빛나야 그 연극이 성공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세상에서도 엑스트라라는 배역이 없어진다면 동시대의 사람들은 얼마나 공허하고 무미건조할까. 상상만 해도 끔찍스럽다. 바로 이 순간, 지구상에 발을 디디고 사는 70억 인구, 이들 각자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으라차차 우리 인생 브라보(bravo)다!

누구든 살아온 인생은 하나하나가 소설이고 각본 없는 드라마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각자’는 이 넓은 세상에 ‘살아 움직이는 예술’ 자체임에 틀림없다.

인생에는 재연(再演)도 리허설도 없다. 단 한 번의 공연에만 협연(協演)할 수 있으니, 이것이 우리 인생의 숙명이자 운명이다. 인생살이는 오직 한 편의 연극과 다르지 않다. 예습도 복습도 할 수 없는 허망한 존재이다. 생명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환생(還生)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환생한 사람을 여태껏 보지도 만나지도 못했으니 리허설할 필요도 없다.

쇼펜하우어(1788-1860)는 독일 단치히에서 태어났다. 그는 흔히 세상이나 인생을 비관적으로 본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허영심은 사람을 수다스럽게 하고, 자존심은 사람은 침묵케 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출처=위키백과
쇼펜하우어(1788-1860)는 독일 단치히에서 태어났다. 그는 흔히 세상이나 인생을 비관적으로 본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허영심은 사람을 수다스럽게 하고, 자존심은 사람은 침묵케 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위키백과

우리 인생 행로를 넓게 조망해 볼 때,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모든 인생은 비극이지만, 평범한 일상 속에 희극적인 요소도 담겨있다’고 말했다. 한편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했다. 언뜻 보면 상반되는 말 같지만, 현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면 사실 일란성 쌍둥이다. 똑같은 명제에 관점만 달리 했을 뿐이니, 다초점(多焦點) 렌즈와 닮았다. 보는 시각만 달리했을 뿐이다.

그 순간에는 슬프고 힘들지만 지나고 나면 보랏빛 추억이 된다는 것일 게다. 인생을 가까이서 본다는 것은 현실과 맞부딪힐 때이고, 멀리서 본다는 건 한 발 물러서서 인생을 본다는 의미가 아닐까. 결국 채플린은 멀리서, 쇼펜하우어는 가까이서 삶을 관조한 셈이다.

목숨을 걸고 촌각을 다투는 전쟁터에서도 총구에 내려앉는 나비를 바라보며 미소지을 수도 있고, 무기징역을 받은 죄수가 평범한 내일의 일상들을 상상하며 입 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태연자약과 유유자적이 연극에서만 가능해야 할까? 이런 환상과 낭만이 연극에선 클라이맥스 효과로 설정되기 십상이고, 관객들은 참 멋있다고 탄성을 자아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에선 섬망(譫妄)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그러나 이런 일을 섬망이 아니라, 현실로 바꿔 놓아야 한다. 우리 인생은 어차피 한 번 뿐이지 않던가. 한 번 가면 재연(再演)은 없으니 유유자적을 마음껏 누려보는 것이 훨씬 꽉 찬 삶이 아닐까? 그러니 노추(老醜)니 노욕(老慾)이니 노망(老妄)과 같은 말은 일언지하에 무시하고 뛰어 넘어야 한다.

우리 인생은 각본 없는 무대에서 공연하다가, 막을 내리는 순간 사라지는 바람에 불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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