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날] 이틀 밤과 하루낮 동안 예식장 찾아간 새 신랑
[부부의날] 이틀 밤과 하루낮 동안 예식장 찾아간 새 신랑
  • 이철락 기자
  • 승인 2020.05.20 09:40
  • 댓글 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4년을 해로한 故 이종원 씨 부부의 결혼 일기
가부장제 사회의 결혼식 풍습을 수기 ‘소띠의 日記’에서 발췌
1943년, 재일교포 사회에서는 부부의 인연(因緣)을 어떻게 맺었을까?
2003년 11월 19일, 대구향교 명륜당(明倫堂)에서 이종원 씨와 곽쌍분 여사의 혼인 예순 돌을 기념하는 행사(회혼식)가 있었다. 자손과 일가친척의 축하 속에서 노부부가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이철락 기자
2003년 11월 19일, 대구향교 명륜당(明倫堂)에서 이종원 씨와 곽쌍분 여사의 혼인 예순 돌을 기념하는 행사(회혼식)가 있었다. 자손과 일가친척의 축하 속에서 노부부가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이철락 기자

 

가장(家長)이 아이들의 결혼 강제권을 갖던 20세기 가부장제(patriarchy) 사회에서 당시 18세 청년이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얼굴도 모르는 신부의 집을 3일 동안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켜 승리한 일본은 1941년 미국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또다시 일으켰다. 1943년 지구촌 곳곳에서 역사상 최대의 피해를 남긴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자, 일본은 모자라는 병력을 채우기 위해 재일교포 청년들을 소집하여 ‘반도장년연정(半島壯年鍊精)’이라는 이름하에 훈련시켰다.

외동으로 자란 18세(1925년생) 청년은 일본에서 훈련을 받고 언제든 전장으로 불려 나갈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시국은 점차 극도로 혼란한 상황으로 변하고 있었다.

대(代를) 잇는다는 의식이 강하던 시절, 집안 어른들은 청년의 결혼을 서두르게 된다. 한국에서 ‘아리랑 극단’이 와서 공연 보러 가고 싶다는 청년을 그의 아버지가 불렀다. 그리고 사성(四星)을 쓰고 끝에 이름과 함께 일심(一心)이라는 서명을 권유받는다. 그는 어리둥절하여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며 묻는다.

“웬 사성입니꺼?”

“너도 이제 장가들 때가 되었다.”

“한 달간 훈련도 받았고, 손톱, 발톱은 물론 일본이 시키는 대로 유서까지 써서 보관 중인데, 전쟁터에 언제 불려 갈지도 모릅니더. 아직은........”

“그 문제는 그때 당해서 해결할 것이니 지금은 거론하지 마라.”

“...........”

“우리는 할 말이 더 있으니 넌 나가 놀아라.”

가부장제 사회에서 집안 어른들이 18세 청년의 결혼을 진행하던 당시의 풍습이다. 청년은 ‘1925년생 소띠의 日記’라는 수기에서 결혼식 당시를 생생하게 회상했다.

“결혼식은 1943년 음력 10월 20일 한식으로 올리기로 하였다. 사모관대와 족두리 등 몇 가지 중요한 혼수품은 멀리 ‘나고야(名古屋)’에서 가져오기로 하였다. 호화롭고 거창하게 치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정된 돈으로 명색을 갖추려던 것이다.”

“‘이와데겡 오-하시(岩手縣 大橋)’에서 신붓집이 있는 ‘군마겡 시모모꾸(群馬縣 下牧)’까지의 거리는 버스와 기차로 이틀 밤과 하루낮이 걸리는 먼 거리였다.”

“아버지와 나는 정시에 도착해야 한다며 집을 나섰는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우리 마을 앞에서 기차 정거장 사이를 왕복하는 버스가 고장 나 운행을 못 한다는 것이다. 부득이 트럭을 이용하여 간신히 기차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기차에 오른 나는 피곤하여 잠이 들었다. 얼마를 잤을까? 기차 밖의 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깨어보니 기차는 멈춰 있고 객차 안은 텅 비어 있다. 내려오는 기차의 탈선 사고로 선로가 불통 상태가 된 것이다. 다음 정거장까지 걸어가서 상행선 열차로 갈아타는 방법밖에 없었다.”

“밤 여덟 시가 넘어 캄캄했지만, 먼저 출발한 승객들로 보행 행렬은 길게 늘어섰다. 약 10km가량의 길을 걸어서 다음 정거장에 도착한 후, 임시 열차를 타고 ‘모리오까’ 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타야 할 기차는 이미 40분 전에 떠났고, 다음 열차를 타려면 3시간 반을 더 기다려야 했다. 당일 사시(巳時; 9:00~11:00)에 식을 제대로 올릴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다음 날 아침 ‘우에노’에서 ‘시모모꾸’행 기차를 타고 가면서 여객 전무를 찾아가 ‘열차 사고 6시간 연착’이라는 전보를 신부 쪽에 쳐주었다. 6시간 연착이면 이미 해가 져 어두운 상태다. 제 시각은 고사하고 제날짜에도 맞추기가 어렵게 되었다.”

“열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목적지 ‘시모모꾸’ 역에 도착한 것은 예정보다 한 시간 더 늦은 오후 4시 30분 경이었다. 여러 사람이 마중 나와 기다릴 것으로 생각했지만 의외로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갑자기 조급해졌다. 산골이라 택시를 찾았지만 없었고, 왕래하는 버스도 그 시간에는 끊어진 상태였다.”

“트렁크를 들고 약 2km 이상을 걸었다. 해는 지고 땅거미가 밀려오고 있었다. 신붓집 앞 다리목에 도착하자 4~5명이 다리를 건너오며 떠드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중에는 술에 취한 친척도 보였다. 이미 날은 저물어 결혼식은 치를 수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우리 쪽 어른들은 백중력을 보고 우리가 도착한 날이 혼인날인 줄로 알았는데, 신부 쪽에서는 만세력을 보고 다음 날인 음력 10월 20일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백중력과 만세력은 거의 매년 같았으나 공교롭게도 그 해만 하루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양가는 만세력을 따라 결혼식을 올리기로 하고 헤어졌다.”

“예정된 시각에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많은 하객이 우리를 축하해 주었다. 고종 자형은 구식의 절차를 밟으며 혼례식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갔다.”

“신부는 현풍 곽씨 문중의 규수로서 일본에서 예절 학교에 다녔으며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지난 15년간을 현지서 살아온 덕인지 일본어가 유창하였다.”

“어른들은 혼례식 다음날 곧바로 귀가했지만 나는 온천으로 ‘인장’(결혼식 후 신붓집에 며칠 있다가 휴식을 위하여 신부가 아닌 신부 측에서 정해준 다른 남자와 다른 곳에서 며칠 쉬었다가 다시 신붓집으로 오는 행사)까지 치르고 5일 만에야 혼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와데겡’에서 ‘시즈오까겡 이와부찌’로 이사하였다. 그해 음력 12월 28일, 신부는 신행(신부가 시집으로 처음 오는 것)을 왔다. 혼례식을 치른 후 두 달 남짓 만에 다시 만난 신부였다.”

‘1925년생 소띠의 日記’라는 수기에 기록된 이 이야기는 21세기인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결혼식 전날까지 서로 얼굴도 모른 채, 양가 어른들의 주선으로 맺은 부부였기에 서로 맞춰가며 살기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필자는 이 부부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나 두 분의 사이를 고스란히 보며 자랐다.

일상의 대화에서 늘 찌그락 짜그락하는 소소한 다툼이 잦았지만, 결코 이 다툼들을 서로 크게 확대하지는 않았다. 부부 사이에서 크게 번질 만한 갈등들은 미리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조심하는 것이 몸에 배 있었다. 특히 두 분은 평생 이혼이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자식 5남매 앞에서 두 분이 크게 다투는 모습조차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자식들의 기억 속에, 아버지의 가부장적 권위 의식은 어머니보다 훨씬 강했지만,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은 항상 가정을 온화하게 지켜주었다.

2003년 11월 9일, 대구향교에서 혼인한 지 예순 돌을 기념(회혼식)하는 부부를 축하하러 5남매로부터 얻은 손자·손녀 11명과 일가 친척 등 많은 사람이 모였다. 이날 KBS 9시 뉴스는 상대적으로 긴 시간을 할애하여 이 장면을 방영하였다.

난로처럼 두 분은 너무 가까워 뜨겁지도 너무 멀어 춥지도 않게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하나의 세상을 함께 그려온 것 같다.

얼굴도 모른 채 양가 어른들의 주선으로 결혼식을 올렸지만, 이렇듯 64년을 부부로서 다정한 남매같이 해로하셨다.

곁에서 짜그락거리던 어머니가 먼저 별세하시자 아버지의 기세는 남은 8년 동안 크게 꺾이셨다.

 

[아버지]

세상 밖

살아있는 이들이

하나씩 잠들어 갈 제

봄비는 갓 시집온 새색시

64년을 부부로 함께 살아

당신 몸이 된 어머니를

먼저 여의시고

자식에게조차

고적함을 표현하지 못하는

늙은 아버지

붙잡히지 않는 잠이

저만치 떨어져

지나온 삶을 또박또박 읊조릴 때

띄엄띄엄

가로등 새벽 불빛이

아버지의 밤샘 저고리를

매무시한다.

 

어머니는 82세, 아버지는 91세로 지금은 두 분 다 고인이 되셨지만, 두 분이 살면서 보여준 모습은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귀감이 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7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구언회 2020-05-24 16:47:35
50~60년전 전통 혼례식 광경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도ᆢㅎ

오주석 2020-05-24 06:44:17
감동 가득한 부모님의 사랑일기 잘 읽었습니다.
기자님의 부모님 실화라서 더 애잔합니다.
불현듯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이상갚 2020-05-24 01:22:58
그런 사연이 있으셨네요
아주 오래전 두분 뵈었던 기억이 납니다

정신교 2020-05-22 13:58:03
두분의 회혼 예식을 다시금 축하드립니다. 이박사님 내외분도 백년해로 하시기 바랍니다.

최승호 2020-05-21 20:09:04
재미있게 읽았습니다. 더구나 필자의 부모님이라니 더욱 생생하고 흥미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