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날] 동지요 전우로...때론 측은지심으로
[부부의날] 동지요 전우로...때론 측은지심으로
  • 강지윤 기자
  • 승인 2020.05.20 09:4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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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받치는 두 개의 기둥은 부부다.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틀이 있는 관계가 아니다.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는 가정이다. 가정은 부모 자식 형제 자매로 이루어져 하나의 세포처럼 번식하여 인류라는 거대한 집단을 이루어 왔다. 성장기가 끝나고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 홀로서기가 가능할 때 원가족을 떠나 각자의 배우자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살아 왔다. 2000년대 이전에, 사람들은 이를 보편적인 생애 주기라 여기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결혼을 출발점으로 여겼다.

 

그러나 디지털이 빠르게 생활의 기반이 되고, 실시간으로 다른 사람의 삶의 방식이 공유되며 개인의 삶에 대한 물음이 화두가 되었다. 이제는 누구와 결혼하느냐가 아니라 결혼 자체에 대해 고민하는 세태가 되었다. 물론 동성간의 결혼이나 혈연 외의 다른 사람과도 충분히 가족을 이루고 사는 등 다양한 가정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어떤 형태의 가정이든 가정을 받치는 두개의 기둥은 부부다. 부부란 어떠어떠해야 한다라는 틀이 있는 관계가 아니다. 수많은 상황을 두 사람이 헤치고 일궈 나가는 과정이 흡사 살아 숨쉬는 생명체 같은 것이다. 부부관계란 두 사람이 가진 가치관과 본성이 이리저리 부딪치고,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 남편은, 아내는 이러해야 한다고 믿는 그 정형의 틀을 깨뜨려 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결혼 전 선이 굵고 남자답게 보이던 그의 성격이 실은 자기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모습이었다든가, 다정다감하고 뛰어난 유머 감각의 그가 무능한 생활인으로 보이는 데는 몇 년이 걸리지 않는다. 그토록 남자답고 멋있거나 성실했던 모습이 동전의 양면처럼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아내들은 본격적으로 강해지고 가정을 수호하기 위해 서서히 전투 모드로 전환된다.

삼시세끼 밥 먹고 치우고 젖병 소독하고 씻기고 입히고 시댁의 경조사나 수시로 해야 하는 며느리의 임무에 시달리다 보면 남편은 우선 순위에서 밀리기 시작한다. 사람의 자리보다 슬슬 월말이면 월급 봉투를 가져다 주는 하숙생 비슷한 입지가 된다. 자다 깬 젖먹이가 울기라도 하면 베개를 들고 슬며시 사라진다. 수입과 지출은 늘 아슬아슬하게 시소를 타고 아내의 입장에 대한 이해나 도움도 별로다. 은근 슬쩍 축구나 등산을 핑계로 주말에도 집을 비우고 땀냄새 진동하는 빨래감만 가득 만들어 주말 저녁 돌아오는 남편이 곱게 보일 리 없다.

이때 쯤이면 억울하다. 속은 것도 같다. 내가 선택한 사람이 저 사람이 맞아?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래 10년만 눈 질끈 감고 살아 보자. 그동안 내게 주어진 건 엄마라는 자리. 아이들에게로 향하는 헌신, 그러나 헌신이라 생각했던 일도 지나고 보면 딱 그때 내가 아는만큼이 아니었을까? 엄마로서도 설익었을 것이다. 이때쯤이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 궁금해진다. 앞 집도 옆 집도 다 재미있게 사는거 같다. 나만 빼고.

이렇게 아내로 남편으로 자리매김하고 지지고 볶으며 서서히 가정의 질서가 자리 잡고 안착하는가 싶으면 이번에는 또 다른 파도가 밀려든다.

건강이나 직장 사업 등 우리의 발목을 잡는 지뢰들은 도처에 깔려 있다. 가정의 뿌리가 흔들릴 만큼의 충격 앞에선 본능적으로 안다. 외부의 적에 맞서기 위해선 두 사람이 합심하여 똘똘 뭉쳐야 한다는 걸.

유년기를 넘어선 아이들도 어려울 때 훌쩍 마음의 키가 자란다. 있는 자리에서 내가 뭘 해야 하지? 스스로 묻고 답을 구한다. 말로 하지 않지만 몸으로 행동으로 가족 공동의 가치가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자라 간다. 이때쯤이면 깨달아진다. 내가 느꼈던 그의 약점들이 실은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에게로 쏘아댄 내 눈의 필터 때문이었다는걸. 그의 약점 이전에 나의 억울함과 분노 미숙한 감정을 알아 보게 된다.

아이들의 성장과 부모님의 죽음, 자식들이 각자의 인연을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과정을겪다 보니 어느새 사십년. 이제 옆에 남은 사람은 단 하나. 부부의 이름으로 만난 사람이다.

두 사람의 전혀 다른 개성이 만나 부딪히고 깨어지며 새로운 역할을 찾고 온 힘을 다해 수행해온 동지이자 전우인 것이다. 원망과 불신이 끼어 들어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솟아나 함께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 만큼의 격정에 몸을 떨었던 시절도 지나갔다.

절대 변하지 않을 습성과 본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튀어 나오는 말은 곧장 날아가 꽂히기보다는, 감정을 건드리지 않을 만큼 저공비행으로 날아가는 여유도 생겼다. 듬성해진 머리카락이나 굽은 어깨에 자주 눈길이 간다. 눈길은 자주 측은지심으로 변한다. 그에 대한 또는 나 자신을 향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람의 삶은 제각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한 말이다.

몸 마음을 다하며 하는 모든 일을 수행이라 부른다면 부부의 자리야말로 나를 깨뜨려 자신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최전선의 수행처였는지 모르겠다. 인생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동반자로 살아 갈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지금부터 400여 년 전 조선시대에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이응태(1556~1586)를 그리는 애틋한 원이 엄마의 편지가 있다. 안동시 정상면에서 이장 작업 중에 망자의 가슴을 덮고 있던 한지의 이면에 촘촘하게 써 내려간 한글 편지가 나왔다. 갑작스레 병으로 죽은 남편을 보내며 쓴 애끊는 아내의 마음이 담긴 편지. 긴 시간을 지나 아직도 읽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하는 편지는 부부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케한다.

 

원이 아버지에게

병술년(1586년)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 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 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꿈 속에서 당신의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낫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 주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 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현대어로 옮김:임세권(안동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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