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김헌 '천년의 수업'
[장서 산책] 김헌 '천년의 수업'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0.05.18 11:43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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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세상의 경계를 허무는 9가지 질문

신화를 중심으로 인간의 본질적 삶의 태도를 고찰하는 인문교양서이다. 지은이 김헌은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 서양고전학 협동과정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서양고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 책은 ‘여러분은 질문하는 삶을 살고 계신가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질문하는 법과 인간의 본질적 삶에 대한 9가지 질문에 대해 신화를 중심으로 고찰한다.

0.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팩트 체크부터 에포케까지-

질문을 하는 데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생각나는 대로 묻기만 하는 것은 의미 있는 질문이라 할 수 없다. 질문의 기초는 사실 확인이고 질문의 기본은 맥락 파악이다. 일상에서 사실을 확인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육하원칙을 따져보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나 자료를 찾아보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내용 자체가 논리적으로 정합한지 알아봐야 한다. 주어진 정보의 사실 여부를 확인한 다음에는 정보 이외의 것을 알아내야 한다. 이것이 맥락 파악이다. 정보 이외의 것들에는 정보를 전달하는 화자와 그 정보를 받는 수용자의 관계, 주변 인물들과 그들을 둘러싼 상황까지 모두 포함된다. 정보의 정확성만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맥락이다.

질문의 마지막 단계는 적극적 가치판단의 단계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가치를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하기 위해 세 가지 관점에서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는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손해가 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를 실용적 판단 또는 경제적 판단이라고 한다. 두 번째 질문은 ‘옳은가, 아니면 그른가?’이다. 이때의 판단 기준은 윤리와 도덕이다. 마지막 기준은 ‘아름다운가, 추한가?’이다. 이것은 미학적 기준이다.

사람은 누구나 확실한 답을 원한다. 사실을 확인하고, 맥락을 파악하고, 가치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확실한 답을 얻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 ‘확실한 답’은 자칫 독선이나 아집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판단을 내린 후에도 에포케, 즉 판단 중지를 권한다. 사실 여부를 다시 살펴보며, 이게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익이 되고 옳은 동시에 아름다운 일인지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언제 행동하나? 판단이 선다면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되, 독단에 빠지지 않도록 잠시 멈춰서 에포케 하라는 말이다. 에포케의 습관이야말로 질문을 끊임없이 지속해나가는 힘이 될 것이며, 꿋꿋이 행동하면서도 융통성을 갖고 더 나은 길을 모색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1. 나는 누구인가? -세상을 향한 질문의 시작-

‘너 자신을 알라’는 문구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이 아니라, 아폴론 신전의 현관 기둥에 새겨져 있던 글이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같은 뜻이고, 나에 대한 성찰을 의미한다. 나에 대한 성찰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것인가 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존재하는 ‘나’, 즉 타인이 보는 ‘나’의 모습도 있다. ‘내가 아는 나’와 ‘남이 보는 나’는 다르다. 비슷한 부분도 있겠지만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내면보다 외면이 더 중요한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은 ‘나’의 정체성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또, 사람은 누구나 다면적이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고려하면서 의도적으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선택하고 적절하게 드러낸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섣불리 답을 내리며 확신하기에 앞서 끊임없이 판단을 중지하는 ‘에포케’가 필요하다. 판단을 중지하고, 다시 한 번 묻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나’의 진짜 모습을, 의식하지 않은 부분까지도 생각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주는 지혜, 그 중에서도 소크라테스와 소포클레스가 강조한 두 가지를 함께 기억하려 한다.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안다고 착각하지 말라.

2. 인간답게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에 새겨 넣는 나의 무늬-

밭을 갈고, 집을 짓고, 성을 쌓으며, 인간들은 사는 동안 저마다 자신의 무늬를 새긴다. 우리 주위의 무늬들은 인류가 지금껏 질문을 던지고 나름의 답을 해온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수천 수백 년간 이 땅에 자신의 무늬를 새겨온 사람들의 삶을 헤아려보는 일은 세상에 태어나 언젠가 마감할 나의 생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된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 이 땅에 새길 나의 무늬는 어떤 빛깔,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나 자신은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어떤 무늬로 남게 될까? 떠올리기만 해도 고통스런 낙인처럼, 지우고 싶은 흉한 낙서처럼 남는다면, 그 삶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3.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사는가?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

삶은 영원하지 않고 시간은 잔인하리만치 냉정하게 뚜벅뚜벅 자신의 보폭대로 걸어간다. 행복만 계속되는 인생은 없으며, 설사 그렇다고 해도 결국은 죽음으로 끝이 난다. 타인의 고통을 오롯이 이해한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삶이 지독하게 힘들어도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꼭 하고 싶다. 누구의 인생도 줄곧 평탄하지는 않다.

오딧세우스는 영원하고 평탄한 삶을 포기하고, 아프면서 고통스럽고 시시각각 고민에 휩싸이는 인간의 삶을 향해 스스로 뛰어들었다. 그는 인간이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죽음마저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언젠가는 죽을 것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지금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더욱 더 가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슬픔이 있기에 기쁨은 더욱 달콤하고, 고통이 있기에 성취의 보람도 커진다. 힘든 시기를 이겨내는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생은 유한하며, 그로 인해 삶의 순간들이 빛난다. 삶의 순간에 응축된 다채로운 빛깔을 깨달을 때면,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진하게 보내려고 애쓴다. 무엇을 하고 누구와 시간을 보내든, 심지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순간조차도 그 때의 감정을 잔뜩 느껴보려 한다. 내 안의 충만한 감정을 느낄 때, 삶은 조금 더 풍성해진다. 모든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죽음이 사실은 모든 존재를 빛나게 만드는 셈이다. 그것이야말로 죽음이 가진 진짜 힘이다.

4. 어떻게 살아야 만족스럽고 행복할 수 있을까? -인생이라는 영화에서 멋진 주인공이 되기 위해-

“누구나 자기 인생이라는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다” 미국 작가 존 바스의 말이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인생에서 주인공(Hero)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부자이든 빈자이든 마찬가지다. 설사 주위의 비웃음을 살 만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한들 다르지 않다. 살아가는 데 있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고민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나’다. 아주 사소한 행위라고 해도 자기가 생각하고 결정해서 움직인다. 자기 인생에서 주연이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인생이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노력에 비해 큰 성과를 얻고,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성취가 따라오지 않으니 어느덧 자신감도 사라진다.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과 현실의 내 모습이 너무 다르다 보면 자존감을 가지려고 해도 자꾸만 작아진다. 누가 봐도 별 볼 일 없는 인생인데, 그런 자신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존감의 핵심은 타인이 아니라 본인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타인의 눈으로 자신을 판단하고 타인의 평가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 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지나치게 애쓰는 사람은 오히려 자존감이 낮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가 본인을 인정하는 것이 먼저이다.

따라서 참된 자존감이란 남의 눈에는 특별한 게 없어 보일지라도 삶을 열심히 꾸려가고 있으며, 그런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 진짜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다. 객관적인 기준과 상관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와 인생을 존중해야 할 이유 또한 거기에 있다.

참된 자존감을 갖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또 있다. 간혹 자존과 자만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귀하게 여긴다면 다른 사람도 귀하게 여겨야 옳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내가 내 삶에서 주연인 것처럼 다른 사람도 그 사람의 삶에서 아주 소중한 주인공이다. 상호인정을 해 주어야 한다. 내 삶에서 조연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하찮게 대하면 안된다. 내 삶에는 그가 조연이고, 그의 삶에서는 그가 주연이고 내가 조연이다. 상호존중의 태도에서만 참된 자존감이 성립한다.

5. 세상의 한 조각으로서 나는 무엇일 수 있을까? -개인은 미약하나 시민은 강하다-

잘못된 틀을 깨기 위해서는 그것을 깨뜨리고자 마음먹어야 한다. ‘나 혼자 덤벼봐야 달걀로 바위 치기 아니겠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아주 사소한 도전부터 해나간다면 작은 성취가 쌓여가면서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옆에 누군가가 그것을 격려하고 응원하며 함께 해준다면 도전은 한층 수월해지고 성취 또한 커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개인의 힘이 결코 미약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 안에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모여 정권을 바꿨던 기억이 있다. 아무도 아닌 줄 알았던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단합하면 큰 변화를 이뤄낼 수 있다는 믿음은 국민들의 의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달걀로 바위를 깨뜨린 중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아무런 힘도 없는 한갓 달걀인 줄로만 알았던 개인이 뭉치면 거대한 바위처럼 우뚝 설 수 있다는 것을, 무섭게 군림하는 바위인줄만 알았던 권력이 시민들의 지지를 잃는 순간 순식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고 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시민의식이 성숙해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였고, 정치적 무관심과 시민으로서의 무력감을 어느 정도 극복하는 기회가 되었다.

6. 변화하는 세상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교육에 대하여-

교육은 단순히 기존의 정보나 가치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으로 끝난다면 인류는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교육자들을 비롯한 기성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 ‘자, 이것이 우리가 지금껏 축적한 지식이고, 우리가 추구할 만한 가치라고 여기는 것들이다. 이걸 잘 배우고 이걸 토대로 너희는 더 좋은 걸 만들어라. 너희는 이것 이상으로 해낼 수 있다.’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교육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너희들이 만들어낼 것이 있다’라는 사명의식을 자율성과 함께 심어주는 게 교육의 또 다른 핵심이다. 그러면 새로운 세대는 기성세대와 다른 생각으로 다른 걸 시도할 것이다. 기성세대 입장에서는 그게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창의적인 도전을 지켜보고 격려해줘야 한다.

7. 평범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역사가 될 수 있을까? -역사의 발전을 위해 우리가 넘어야 할 것-

알베르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의 첫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반항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NO’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거부는 해도 포기는 하지 않는다.”

철학이나 과학, 예술을 포함한 인류의 역사가 발전한 것은 의심과 반항 덕분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기존의 질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 못한다.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지 말고 항상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질문해야 한다. 질문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를 둘러싼 세상을 바꾸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순응하지 않고 반항했으면 좋겠다. 그 반항은 기존의 것에 대한 반발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힘이 되어야 한다. 역사의 발전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새로운 세대가 강요로 느끼는 기성의 틀은 기성세대가 어렸을 때 그 이전의 틀을 깨고 만들어낸 새로운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기존의 틀을 깨고 만들어낸 새로운 틀은 그 이후에 태어날 새로운 세대에게 낡은 것이 된다는 것도 또한 기억하여야 한다. 이런 역사의 흐름을 또렷하게 인식하고 생생하게 상상한다면, 청년들은 기성세대의 틀을 깨고 나오려고 도전하면서도, 그것을 만들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던 어른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기품 있는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여유와 아량의 품격을 갖춘 어른과 패기 있으면서도 존경심을 잃지 않는 기품 있는 청년 사이의 맞대결은 얼마나 건강하고 아름다운가.

8.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가능한가? -갈등을 넘어 화합으로 가는 길-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욕망은 다양해지고 충돌도 잦아지며 그 양상도 복잡해진다. 몇몇 사람만 모여도 갈등이 생기는데 오죽할까. 우리나라도 지역갈등과 좌우갈등, 계층갈등, 세대갈등, 남녀갈등 등 수많은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보통은 갈등을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평화와 화합을 방해하고 망치는 요소라고 인식한다. 그런데 인간 사회에 갈등이 있는 건 당연하다. 갈등을 억지로 숨기기보다는 내놓고 함께 논의하면서 해결책을 찾는다면 상호 이해의 계기가 되고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갈등을 숨기는 것이야말로 위험한 일인지도 모른다. 갈등이 없는 것처럼 포장하는 사회는 결코 그 갈등을 해결해나갈 수 없다. 불거져 나온 갈등을 무조건 덮으려 하기 보다는 그 양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건강하게 극복해나가는 노력이 중요하다. 그 노력의 결과는 사회 발전이나 개혁으로 이어질 것이다.

‘나’와 ‘너’를 ‘우리’로 묶을 수 있다면 서로를 향한 공감과 이해, 배려와 존중도 자라날 것이다. 서로 다른 세대와 계급, 성별이나 사상을 가진 사람들도 이 사회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할 존재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갈등이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기적인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화합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 되기를 기대한다.

9. 잘 적응하려면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 -고전과 인생의 상관관계-

<독서의 역사>를 쓴 알베르토 망구엘은 독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또 어디쯤 서 있는지를 살피려고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읽는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곧 그 이야기의 세계에 빠지는 것이고, 우리는 책읽기를 통해 수많은 세계를 경험한다. 독서는 즐거움인 동시에 인생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무기가 된다.

독서는 질문을 던지는 행위와 비슷하다. 몇 가지 질문을 붙들고 가는 게 중요한 것처럼 독서 또한 양보다 질이 먼저인 것 같다. 많은 책을 읽어도 수박 겉핥기식이면 남는 게 없을 것이다. 평생 가까이 두고 시시때때로 펼쳐볼 수 있는 ‘인생의 책’이 있으면 마치 든든한 후원자, 믿음직한 동반자를 곁에 둔 것처럼 든든할 것이다. 같은 책을 다시 읽을 때마다 매번 다른 걸 얻을 수 있듯이 한 가지 질문을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던지면 이전과 다른 답이 나오기도 한다.

우리의 깨달음이나 답변이 완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구하고 얻는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시야는 조금씩 넓어지고 지혜도 조금씩 깊어질 것이다. 그러한 과정이 바로 성장의 기반이자 성장 그 자체이다. 인간의 삶에서 성장은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은 무르익어가며 아름답게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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