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보령 성주사지, 적막한 빈 절터에 ‘흥망성쇠의 흔적’이 있다
(11) 보령 성주사지, 적막한 빈 절터에 ‘흥망성쇠의 흔적’이 있다
  • 오주석 기자
  • 승인 2020.05.16 10:5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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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선문 중 하나였던 큰 절 성주사
고운 최치원의 사산비명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폐사지 성주사지에 남아 있는 문화재는

충청남도 보령의 성주면에는 신라 말기 사찰 성주사의 절터인 성주사지가 있다. 성주사는 아홉 곳의 큰 산 아래 문을 연 선종(禪宗) 사찰인 구산선문 중 하나로 이름 높았던 사찰이다. 평지사찰이었던 성주사지는 폐사지가 보여주는 황량한 공간을 넘어 아름다움을 대표할 만한 크고 유서 깊은 절터다.

충남 보령에는 구산선문 중 하나였던 성주사의 절터 '성주사지'가 있다. 오주석 기자
충남 보령에는 구산선문 중 하나였던 성주사의 절터 '성주사지'가 있다. 오주석 기자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주사는 백제 법왕에 의해 오합사(烏合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법왕이 왕자일 때 삼국전쟁으로 희생된 이들의 영혼을 위령하는 뜻으로 세웠다고 한다.

보령시 성주면의 성주산은 높이 680m에 불과하지만, 선(禪)과 선(仙)의 규모를 이루고 있는 산이며, 기암으로 이루어진 산세 때문에 그 기세가 남다르다. 이 산을 성주산이라고 부르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신라 태종 무열왕의 8세손인 승려 무염(無染)국사가 당나라로 가서 오랜 기간 수행한 뒤 귀국한 후 이 산에 있는 오합사에서 입적하였는데 이후 성승(聖僧)이 살았던 절이라 하여 성주사(聖住寺)로 바꾸고, 그 산의 이름도 성주산이라고 불렀다.

백제 때 세운 오합사가 통일 신라 때 성주사로 사찰이름이 바뀌었는데 지금 절집은 간곳없고 석탑과 부도비만 남아 있다. 오주석 기자
백제 때 세운 오합사가 통일 신라 때 성주사로 사찰 이름이 바뀌었는데 지금 절집은 간곳없고 석탑과 부도비만 남아 있다. 오주석 기자

무염국사(낭혜화상)가 성주사의 주지로 있을 당시 성주사는 불전 80칸, 수각 7칸, 고사 50여 칸 등 천여 칸에 이르는 큰 규모였으며 이때 성주사에서 정진하는 수도승만 2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성주산 심연동 계곡을 등지고 성주사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오층석탑이다. 백제탑 양식의 오층석탑 뒤편으로 3기의 석탑이 어깨를 나란히 서 있다. 그리고 왼쪽에는 큰 비각과 그 안에 부도비가 서 있다.

성주사지에는 국보 1점, 보뭉 4점 지방문화재 2점이 남아 있는 야외 박물관이다. 오주석 기자
성주사지는 국보 1점, 보물 4점 지방문화재 2점이 남아 있는 야외 박물관이다. 오주석 기자

옛 영화의 흔적은 사라지고, 부도비와 석탑만이 넓은 빈터를 지키고 있는 성주사는 발굴 결과 통일신라 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사찰로 중문-석등-오층석탑-금당의 불대좌-강당으로 이어지는 ‘1탑 1금당’ 가람배치 구조다.

사적 제307호로 지정된 성주사지에는 현재 국보 제8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보물 제19호 ‘오층석탑’, 보물 제20호 ‘중앙 삼층석탑’, 보물 제47호 ‘서 삼층석탑’, 보물 제2021호 ‘동 삼층석탑’ 그리고 지방문화재인 석계단과 석등이 있다. 3기의 석탑(동, 서, 중앙)은 원래 성주사에 있었던 탑이 아니라 후대에 다른 곳에서 옮겨온 신라 후기의 탑으로 밝혀졌다.

또 발굴 조사에 의해 금당지, 삼천불전지, 회랑지, 중문지 등의 건물터도 드러났다. 동, 서, 중앙 3기의 석탑은 원래 성주사에 있었던 탑이 아니라 후대에 다른 곳에서 옮겨온 신라 후기의 탑으로 밝혀졌다.

절터 서북쪽, 제법 멋을 부려 세운 전각 안에는 큰 부도비가 있는데 바로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다. 국사였던 무염대사 입적 두 해 뒤에 세운 부도비로 무염대사를 기리기 위해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 최치원 선생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그의 조카 최인연이 글씨를 쓴 ‘최치원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다.

성주사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비각. 오주석 기자
성주사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비각. 오주석 기자

10세기 초 세워진 거북 받침돌 위 비석에는 무염대사의 일생과 업적, 성주사를 일으키고 선종을 전파한 내용이 낱낱이 5천 자나 적혀있다. 비석의 재료로 성주산 일대에서 채취되는 ‘남포오석’을 사용해, 글자 하나하나가 심한 훼손 없이 보존되었다.

비문의 내용 중에는 ‘낭혜는 무염국사의 시호이며, 신라 태종 무열왕의 8대손으로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 열세 살의 나이에 입문한 낭혜는 21세에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나 그곳에서 선종을 익혔다. 귀국하여 성주사의 주지가 되어 신라의 선종을 크게 융성시킨 낭혜는 88세의 나이로 입적하였으며, 진성여왕이 낭혜를 기리기 위해 시호와 함께 부도비를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이 부도비는 현존하는 신라의 부도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높이 4.5m, 폭 1.5m, 두께 42㎝로 거의 원형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또한,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 역시 조각이 화려하고 뚜렷하여 신라 부도비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 최치원 선생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그의 조카 최인연이 글씨를 쓴 ‘최치원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다. 오주석 기자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 최치원 선생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그의 조카 최인연이 글씨를 쓴 ‘최치원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다. 오주석 기자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글을 지은 비문 중에서도 불교사원의 유래나 고승의 행적을 기술한 네 개의 비를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 한다.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국보 제315호), 산산조각이 나버린 경주 초월산 대숭복사비(비석은 파손되었으나 비문 필사본이 전해지고 있어 이를 토대로 비석 복원을 했음)가 바로 최치원 사산비명인데 4개 중 3개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성주사지에 남아 있는 역사의 잔재들...'역사는 유물을 남기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 오주석 기자
성주사지에 남아 있는 역사의 잔재들... '역사는 유물을 남기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 오주석 기자

사찰이 무너진 자리에 남아 있는 웅장한 건축물들은 없지만, 정제된 복원으로 천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너른 들판에 덩그러니 석탑과 석등, 불좌대만 있는 빈 절터에서 과연 무엇을 볼까 싶겠지만, 스러지고 만 것들 앞에 서서 마음으로 절집을 지어보거나, 허물어진 것들이 건너온 시간을 셈하다 보면 문득 감동이 느껴지기도 한다.

금당 터 뒤로 해가 질 무렵에 찾았던 폐사지인 성주사지는 석양이 비치면서 찬란함을 감추고 그윽하게 아름다웠다.

성주사지에는 다음의 주요문화재가 남아 있다.

성주사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

성주사지 5층석탑(보물 제19호)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보물 제20호)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보물 제47호)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보물 제2021호)

성주사지 석등(도지정 유형문화재 제33호)

성주사지 석계단(문화재 자료 제140호)

성주사지 배치도 및 성주사지 위치. 오주석 기자
성주사지 배치도 및 성주사지 위치. 오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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