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달]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월남 참전용사 심재우 씨
[호국보훈의달]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월남 참전용사 심재우 씨
  • 권오섭 기자
  • 승인 2020.06.15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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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祖國)이 없으면 나도 없다.
1971년 3월 월남 파병 11개월 만에 철수 1진으로 귀국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심재우 씨.  심재우 씨 제공

 

월남전(베트남 전쟁)은 대한민국 국군이 건국 이래 최초로 해외에 파병한 전쟁이다. 8년 8개월이란 긴 세월 동안 32만 명의 젊은이들이 조국을 위해 전쟁터로 나갔다. 5천100여 명이 전사하였고 3만여 명의 전상자가 평생을 불구로 살아가고 있다. 10만여 명이 전쟁 후유증과 고엽제 후유(의)증으로 고통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되새겨본다.

심재우 씨가 군 시절 앨범을 보며 추억을 되새기고 있다.  권오섭 기자

“그 당시는 피할 수가 없었어요. 1년씩 근무 후 의무적으로 파병되었습니다. 베트남 다낭(Ðà Năng) 항구에서 귀국하는 병사들의 군용트럭을 교대해 몸을 싣고 배치된 곳이 최전방인 호이안(Hoi An)이었습니다. 귀신잡는 해병들의 생사가 오가는 치열한 전쟁터였는데,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이 자주 찾는 관광명소가 된 것을 보면 상전벽해로 세월이 참 많이 흘렀습니다.”

24세 늦은 나이에 지원 입대하여 보병 소총수로 월남 최전선 호이안에 파병되어 근무했던 청룡부대(해병대 228기) 심재우(74·대구 서구 서대구로) 씨.

심 씨는 1970년 7월 27일 해병대에 입대하여 3개월의 훈련을 마치고 보병 소총수로 경북 영일군 지행면에서 간첩침투에 대비한 해안방어 근무를 하다가 월남으로 가게 됐다. 파병 교육대에서 1개월 교육을 받고 이듬해 1971년 3월에 부산 3부두에서 배로 월남으로 파병되었다. 당시에는 지원이 아니었다. 특수한 케이스가 아니면 청룡부대 군인은 군번에 의해 선착순으로 의무적인 파병이었다고 한다. 최전선에 근무 중 ‘위험한 지역부터 철수한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청룡부대 철수 1진으로 그해 11월 9일 귀국길에 올랐다. 남은 병영생활 17개월을 국내에서 마치고 34개월 만에 병장으로 전역했다.

웃지 못할 일화도 많다. 당시 파병 장병들의 주된 식사는 미군이 지급하던 고기, 빵, 시레이션(C-Ration·전투식량)이었는데, 귀국을 준비하던 대대장이 이것을 몰래 처분하여 TV 등 일제 가전제품을 구입해버린 것이었다. 병사들에게는 시레이션 대신 연병장에 키우던 소를 잡아 일주일간 삶아 먹으라고 해 부대원들이 극단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사태도 벌어졌다. 육식을 좋아하지 않던 심 씨도 죽지 않기 위해 먹을 수밖에 없었다고 힘든 시기를 회상했다.

전투는 밤낮이 없었다. 야간 매복은 기본이었고 전투 상황도 수없이 많았다. 동료의 시신이 총상, 포탄에 심하게 훼손된 모습을 보면서 생과 사의 경계를 잃을 정도였다. 그런 광경을 자주 목격하니 눈물은 말라버렸다.

비는 계속 내리고 주변에 대한 경계도 쉽지가 않았다. 무거운 M1 소총은 비에 젖으면 곧 녹이 슬어 노리쇠 후진이 되지 않아 총의 구실을 못하게 됐다. 악조건 아래서의 전투였으며 당시에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 지금도 생각하며 끔찍하다고 말한다. 월남의 무더위와 모기 등 벌레도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생사가 오가는 혹독한 전쟁터라 그런 생각은 사치에 불과하다. 

부산에서 7일에서 10일간 수송선을 타고 도착한 군인들 중 월남 땅(흙)도 밟아보지 못하고 전사한 동료도 많았다고 한다. 다낭(Ðà Năng) 항구에 도착하면 1년간의 파병을 마치고 귀국하는 군인과 교대를 하게 되는데, 도착한 병사들은 귀국병들이 타고 온 십자성 11공수부대 트럭을 타게 된다. 군함이 정박한 바다 위로 통나무로 길을 만들어 이동 후 바로 트럭에 오르기에 흙을 밟지 않는다. 그 트럭에 올라 부대를 이동 중 적들이 설치해 둔 클레이모어(크레모아) 공격을 받으면 베트남의 흙 한 번 밟지 못하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귀국 군인을 태우고 오는 트럭의 인원은 사상자로 인하여 도착하는 인원보다 항상 적었다.

심 씨는 파병과 34개월의 군 생활 속에서도 운 좋게 고엽제 피해나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아 제대 후 평범한 직장생활을 했다.

군 제대 후에도 해병대 228기는 2개월마다 포항, 울산 등 전국 각지를 다니며 꾸준히 모임을 가지며 꾸준히 전우애와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비록 타국이었지만 생사를 오가는 전쟁을 함께 치렀기에 동료의 소중함은 누구보다 크다.

‘귀신 잡는 해병!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평상시는 얌전한 시민이지만 불의나 불합리한 일이 발생하면 70이 넘은 나이에도 하나같이 일명 개(?)병대 정신을 발휘한다. 

월남 파병에 따른 대가로 보훈청에서 매월 30여만원의 수당과 지방자치단체에서 지급하는 수당 8만원을 받고 있다. 또한 보훈병원 진료 시 감면혜택 등을 일부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