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귀 뀐 놈이 성 낸다'더니
'방귀 뀐 놈이 성 낸다'더니
  • 허봉조 기자
  • 승인 2020.05.18 10:0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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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클럽 발 집단감염으로 '코로나19' 방역에 비상
마스크 착용 안 한 버스승객 되레 거칠고 불손한 태도
한두 사람의 방심이 여러 사람에게 피해 줄 수 있어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웃집 새댁과 마주보며 허리를 구부리고 웃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했던 것이었다.

외출을 하다가 횡단보도 앞에서 또는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중요한 물건을 빠트렸을 때의 일이다. 요즘은 마스크를 챙기지 못해 돌아가야 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보니, 누구라도 그런 실수를 하게 되는 모양이다.

5월초까지만 해도 코로나19 확진환자 수가 하루 10명 안팎을 유지하면서, 그토록 사회를 뒤숭숭하게 했던 공적 마스크를 더 이상 구입하는 일이 없게 되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태원 클럽 발 집단감염이 2차, 3차 감염으로 이어지면서 방역에 비상이 걸리고, 마스크에 대한 인식의 고삐를 다시 당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전에, 볼 일이 있어 버스를 탔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승객들은 저마다 큼직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몇 정거장 가다가 승객 한 명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얼굴로 버스에 올랐다. 승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의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잠시 후, 운전을 하던 기사가 뒷거울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뒤에 앉은 아저씨, 마스크 쓰세요”라고. 그는 알았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차가 신호에 걸려 대기하던 중 기사가 다시 한 번 말을 했다. 그때 용수철 튀어 오르듯 돌아온 반응은 “운전이나 똑바로 해”라는 매우 거칠고 불손한 말투였다. 당장 주먹다짐이라도 해보겠다는 도전적인 음성이 평온하던 버스에 찬물을 끼얹었다.

거울에 비친 운전기사의 얼굴에 먹구름이 번졌다. 그냥 넘어갈 수도, 마주 고함을 지를 수도 없고, 운행 중인 버스를 세우는 것은 더욱 곤란했다. 앞자리의 승객 중 몇 명이 그쪽을 뚫어지게 주시하는 모습은 당찬 훈계의 뭇매라도 맞을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태였다. 마침 그곳이 지하철과 연결되는 정류장이었기에, 더 이상 사태를 지켜보지는 못했다.

마스크, 급히 나오다가 미처 챙기지 못할 수 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데, 실수를 인정하고 공손한 태도를 보였더라면 누군가 비상용으로 갖고 있던 마스크 하나쯤 그냥 줄 수도 있는 것이 우리네 인심이다. 그런데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느라 듣기에 거북한 표현으로 왜곡하는 것은 망신을 자초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방귀 뀐 놈이 성 낸다’는 속담이 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오히려 화를 낸다는 뜻이다. 하지만 화를 내는 것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 불특정다수가 이용하는 철도, 버스, 지하철 등 대중교통과 공공시설에서는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도록 방역당국에서는 연일 방송이나 문자메시지를 통해 권고하고 있다. 한두 사람의 방심이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말(飛沫, 침방울)로 전염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혼란에 빠트려놓았다. 전문가들은 올 가을 다시 대유행이 찾아올 수 있고, 2년 정도 연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측을 내놓았다. 또한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코로나19의 완전한 퇴치는 어려울 수 있으며,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어야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손꼽아 기다렸던 학생들의 등교가 다시 순차적으로 연기되고, 자칫 ‘생활 속 거리두기’가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되돌아갈 수도 있을 정도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치료제나 백신이 개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죽하면 마스크를 백신이라고까지 표현할까. 기온은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 마스크가 갑갑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야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 상대방을 배려하는데 더 큰 이유가 있어서다.

방귀 뀐 놈이라고, 어찌 미안한 마음이 없을까. 하지만 너무 오랜 긴장과 스트레스로 답답하고 억눌렸던 감정이 엉뚱하게 폭발했을 것이라고 뒤늦은 변명이라도 해주고 싶은 것은 무슨 측은지심인지. 행여나 그런 모습이, 코로나19가 우리 사회에 남긴 또 하나의 위태로운 풍경이 되지는 않을지 슬며시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