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달] 월남전쟁 2번 참전한 정춘석 씨
[호국보훈의달] 월남전쟁 2번 참전한 정춘석 씨
  • 권오섭 기자
  • 승인 2020.06.1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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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부대 전우들과 기념촬영한 정춘석 씨.(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정춘석 씨 제공

 

월남(베트남) 전쟁은 대한민국 군대가 외국에서 싸운 첫 전쟁이다.

1964년 7월 18일 공병부대인 비둘기부대, 해병대 청룡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 등이 연합군과 함께 1973년 3월 철수할 때까지 베트남의 공산화를 저지했다. 파병 당시 우리나라는 1963년 수출액은 8천680만$, 국민 1인당GNP는 100$에 불과했으며 미국으로부터 연간 5억$의 군사와 경제 원조를 받았다. 보릿고개가 있던 힘든 시기였다.

한국은 베트남 파병으로 5천 명이 넘는 고귀한 인명 손실과 비동맹국가와의 외교마찰을 빚기도 했으나 미국과의 우호적인 협력관계를 강화시켜 한반도의 안보를 튼튼히 할 수 있었다. 또한 베트남 파병은 국군 장비의 현대화와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컫는 경제 발전의 초석을 쌓는 계기가 되었다.

“꼭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먼 타국의 전쟁터로 떠나는 모자(母子)의 이별은 실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눈물의 파월장병 환송식.

정춘석 씨가 월남전 파병 당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권오섭 기자

1966년 10월 3일 파월, 1967년 12월 7일 귀국, 1968년 5월 30일 파병 지원, 1969년 5월 29일 귀국 후 병장 전역.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는 이국땅. 가능하면 가지 않으려고 했던 월남 전쟁. 군 생활 41개월 중 2번의 파병에 26개월을 전쟁터에 보낸 정춘석(75·대구 북구 오봉로7길) 씨의 군 생활 이력이다.

"♫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례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부산 항구에서 귀국 길에 언제나 목이 터져라 불렀던 군가. 정 씨는 벌써 45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잊으려야 잊히지 않는 아직도 생생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정 씨는 경남 거창군 남상면 빈농의 2남 6녀 8남매 중 6번째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거창대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입대 전까지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지었다. 점심은 굶는 것이 일상화되었던 보릿고개여서 자식이 귀했던 인근 외갓집에서 일손을 도왔다.

20세이던 1966년 3월 1일 논산훈련소에 입대하여 ‘11573055’ 군번을 부여받고 전후반기 16주 교육 후 강원도의 26사단 이기자부대 주특기 104 기관총 사수로 복무를 시작했다. 정 씨가 군 생활하던 시절 부대 일등병 180명 중 중졸 이상은 2명이었고 대부분 국졸(초등학교 졸업)이었다.

정 씨는 입대 7개월 후 맹호부대의 교대 파월 장병 지원 합격했다. 1개월의 파월 교육을 마치고 1966년 10월 3일 겁 없는 젊은 군인으로 적지로 뛰어들기 위해 부산항에서 열렬한 파월환송식을 받았다. 1주일의 밤낮 없는 항해 끝에 월남 꾸이뇬(퀴논·Qui Nhon) 바다 위 항구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군용트럭에 몸을 싣고 막사도 없는 밀림지역의 푸켓(Phu Cat) 주둔 대대에 도착, 맹호부대 1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로 배치되어 월남전쟁의 군 생활이 시작되었다.

1주일의 간단한 교육 후 병영생활은 밤낮 언제 전쟁에 투입될지 모르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휴식을 취할 내무반 막사조차 없는 곳에서 모두 땅을 파고 위장을 한 다음 생활하였다. 습기와 벌레 등 모든 것이 불편하고 힘든 상황이지만 생사가 오가는 전쟁에서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매복과 소탕 작전, 위험한 자연 동굴에 숨어있는 적들을 섬멸하기 위하여 무작정 진입했다. 매복해 있는 적들의 공격을 받아 대량 인명피해를 막기 위하여 동굴 안에 휘발유 등 유류를 쏟아 붙고 레일을 이용 불을 붙여 다음날 상황을 조심스럽게 확인하는 등 항상 전시태세를 유지했다. 생사가 오가는 수많은 밤낮을 전투에 참여하며 전쟁터를 누볐다.

1967년 12월 7일 14개월의 월남 전선의 군 생활을 마치고 부산항을 통해 다시 배치된 곳은 강원도 화천군의 15사단 38연대 중화기 중대였다. 겨울이라 밤새 눈과의 싸움이었다. 파월로 인해 겨울을 모르고 살아왔던 정 씨. 1968년 1·21사태(청와대 무장공비 침투사건·김신조 간첩사건)이 정 씨가 근무하던 인근부대에서 발생했다. 이때부터 휴가와 외출은 금지되었으며 각 군의 복무기간도 연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계절 적응 등으로 힘든 시기, 제대를 앞두고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한다는 병장 시절을 보내던 정 씨는 5월 30일 다시 월남 파병 수송선에 몸을 실었다.

“강원도 춘천에서 기차가 출발하면 정차하는 역(驛)마다 월남으로 향하는 동료 군인을 태우고 주민들의 열렬한 환송행사가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처음 적진으로 떠나는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저는 두 번째 가니 그나마 그곳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 그때는 마음이 차라리 편했습니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 씨는 당시의 상황을 지금 살아있다는 심정으로 담담히 말했다.

정 씨가 배치된 곳은 첫 파병지였던 푸켓이었다. 약 6개월 만에 다시 온 부대 동료 병사들은 정 씨를 '왕병장'으로 불렀다. 운(?)좋게 군 생활 동안 두 번이나 파병된 정 병장을 환영하는 의미였다. 전선에 대시 배치되었을 때는 직전 소대장과 많은 친숙했던 얼굴들은 작전과 전투에서 타국에서 전사하고 없었다. 그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왜 다시 왔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그런 심정도 잠시, 잠시 6호 작전에 투입되어 밤낮을 잊은 군 생활이 이어졌다.

파월이 1년으로 정례화 되었던 시절이기에 이듬해 5월말 그는 부산항에 다시 돌아왔다. 수송선에서 내리자마자 인근 경남 창원의 32사단에서 전역신고를 하고 20대 초반의 군 생활을 마무리했다. 월남 파병 두 번 26개월과 국내 복무 등 의무복무기간을 초과한 41개월의 군대생활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월남을 두 번 갔다 왔다면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돈도 많이 벌어 왔겠다고 묻습니다. 아마 그 당시 매월 1만 원 정도 집에 보내 드렸을 겁니다. 고향에 논 2마지기(400평) 정도 살 큰돈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제대하고 보니 살림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고 보내드린 돈은 사업하는 큰형님에게 다 보태드린 후였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하나뿐인 큰 형님이 대구에서 사업을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자식 잘 되라고 하신 일인데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군 제대 후 정 씨는 친구 따라 서울로 가 1년간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다시 부산의 밀가루 제조업체인 영남제분을 거쳐 대구의 철공소에서 일을 배웠다. 그러던 중 직장동료의 소개로 허분열(74) 씨를 만나 1973년 12월 말 28세의 나이에 결혼하여 2남 1녀 3남매의 가정을 꾸렸다.

정 씨의 사회생활 또한 군 생활 못지않게 힘들었다. 종업원 10여 명을 두고 철공소를 운영하였으나 늘 적자에 허덕였다. 결혼 후 어려운 형편을 알았던 부인이 팔달시장에서 좌판(坐板)을 펴고 비린내가 진동하는 고등어, 갈치 등 생선을 팔았다. 부인은 정 씨의 사업을 도우며 자녀를 키우며 억척스럽게 가정을 일궜다.

철공소를 접은 정 씨는 지인에게 10만 원의 빚을 얻어 시장에 점포를 구한 후 생선가게를 열고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이즈음 생활은 안정기에 접어 들었지만 정 씨의 건강은 극도로 망가졌다. 병원에서 유행성출혈열을 오진하고 잘못돈 투약을 했고, 2번의 파월에 따른 후유증이 겹쳐 콩팥이 망가지는 만성신부전증이 온 것이다.

다행히 혈액형은 다르지만 쌍둥이처럼 일치한다는 부인의 콩팥(신장) 기증으로 1997년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약은 복용하고 있지만 특별한 후유증 없이 살아가고 있다. 신장이식 후 김대중 정부 시절 파월에 따른 고엽제 후유증 고도장애 판정을 받았으며, 노무현 정부 때 보훈청으로부터 전상군경 4급 판정을 받아 정부로부터 매월 연금 등의 지원을 받고 있다.

정 씨는 현재 대구 북구 매천시장 안에서 가족과 함께 거창수산(영업인 25번)을 운영하고 있다. 꽃마음회의 후원회장과 상이군경회 등 지원과 불우이웃돕기에 남다른 숨은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주위를 탓하지 않고 열심히 살다보면 길이 보여요. 늘 집사람에게 고맙죠. 제가 이 시간까지 큰소리치며 살아가는 것을 보면요. 쑥스러운 마음에 제대로 표현을 잘 못하지만, 여보 항상 감사하고 영원히 사랑합니다!’”

정 씨와의 인터뷰는 필답과 고성이 오가는 험난한 과정이었다. 정 씨가 고엽제 후유증 등의 합병증에 따라 보청기를 착용하고 있어 의사소통이 어려웠기 때문이다.